#45
좋아졌다.
내가, 좋아졌다.
강세현이 나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억지로 담담한 척을 했을 텐데, 이렇게 중요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정말 황당한 타이밍에 말하는 바람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미친.”
엄청난 말을 던진 강세현은 이 와중에 웃었다.
“예상 못했어?”
“……당연하지.”
“왜 예상 못했지. 너라면 내가 할 말 있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했을 줄 알았는데.”
네가 연락 끊지만 않았어도 그랬겠지.
2주간 보지 못했고, 일주일 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려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건 정 반대되는 말이었다.
깜빡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강세현은 늘 내 예상을 벗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보통 고백을 받고 나면 우선은 고맙다, 그러고 나서는 미안하다, 원래라면 그랬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평범한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강세현.”
“어.”
“같은 거 물어봐서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묻자. 너는 이제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말했잖아. 나 좋아하라고.”
기가 찼다. 지난번에 농담처럼 흘린 말이 진심일 줄이야. 진지하게 고민해 달라든지, 천천히 생각해 보라든지, 뭐 비슷한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너 그게 무슨 의민지 알아?”
“뭐가.”
“네가 날 좋아하는데 나까지 널 좋아하는 게.”
“넌 그새 내가 바보라도 된 줄 아는 거야?”
“그럼 아는 놈이 그런 말을 하냐?”
난 널 좋아해, 너도 날 좋아해, 룰루랄라 손잡고 오늘부터 1일. 그렇게 모든 게 쉽게 될 거였으면 애초에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못할 건 또 뭔데. 서로 좋아하는 게 문제 될 거 없잖아.”
“문제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 나는 문제가 돼.”
“왜.”
“왜긴, 당연히-”
“둘 다 남자라서?”
“……알고 있네. 그걸 알고도 문제가 없다는 거야?”
강세현은 대답하지 않고 빤히 나를 바라봤다. 몇 초간, 말없이 나와 눈을 맞추던 그는 퉁명스레 말했다.
“남자라도 반할 만하다며.”
“뭐?”
“나. 남자도 반할 만큼 잘 생겼다며. 너도 여기저기 다 먹히는 얼굴이지. 국적 불문, 나이 불문, 그리고 남녀불문.”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와?”
“그러니까 문제가 안 되는 거라고. 너랑 나, 둘 다 남자도 반할 만하니까. 서로 당연히 그래도 될 이유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와, 이게 대체 무슨 논리야?
강세현이 하는 말은 미친 소리였다. 그런데 더 미치겠는 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남들처럼 만나면 되는 거 아냐? 평범하게.”
“절대 평범하지 않은데 어떻게 평범하게 만나.”
“그럼 평범하지 않아도 해 보자.”
“내가 너랑 왜.”
“부자니까.”
“…….”
“나 돈 많아. 그게 네 이상형이라며. 그러니까 나랑 해, 연애.”
강세현에게서 연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마 전 강세현과 게이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을 때가 생각났다. 이렇게 안 어울릴 수 있을까. 강세현과 연애.
2년이 넘도록 강세현이 누군가 사귀는 걸 봤는데도 연애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주 예전에 형들이 강세현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자친구한테 잘하는 건 맞는데 그게 진짜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는 말.
‘많이 사랑하나 보죠. ……왜요?’
‘아니,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기해서.’
‘그게 왜 신기해요?’
‘네가 강세현을 알고 나면 절대 그 말이 안 나올 거거든.’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형들의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처음엔 연인에게 다정한 강세현의 겉모습만 봤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강세현은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절대 바람은 피우지 않지만, 다정하고 성실한 그 모습이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사귀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라는 걸. 그러니 연애를 했다기보다는 연애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봐야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도 그랬었는데 지금 나랑…… 그걸 하자고? 평범하든 평범하지 않든, 생각해 보면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성하야.”
날 부르는 살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심각한 표정을 본 강세현은 구겨진 이마를 꾹 눌렀다.
“그거 알아? 너 지금, 이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만 따지고 있는 거.”
“당연히 따져야지. 네가 이상한 거야. 이게 말이 되냐? 어떻게-”
“그게 아니라,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원래는 싫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
“당장 싫다고 말 안 하는 거면 나한테도 희망 있는 거잖아.”
맞는 말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애초에 수락하고 나서의 일이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강세현의 고백을 받아들일 마음이 상당히 크다는 뜻이었다.
강세현이 한국에 가기 전까지 나는 정상이었다. 강세현이 나를 좋아하지 않기를 원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고백하지 않기를 바랐고, 고백한다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떨어져 있는 동안 강세현이 다시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기를 기도했다.
분명 그랬는데……. 강세현이 정상이 되기를 기도하다가 내가 이상해져 버렸다.
“……난 가끔 네가 좀 덜 똑똑했으면 좋겠다.”
내 말을 들은 강세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그렇다고 당장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긍정적인 거지?”
“아마도.”
강세현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었다.
아마도.
지금 내 상태는 그때의 강세현과 같은 ‘아마도’였다.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는 강세현의 얼굴에 여유가 보였다. 마치 내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리고 조만간 이 모호한 마음이 자신 쪽으로 완전히 기울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
“이걸로 사.”
“비싸.”
“그래 봤자 3불밖에 차이 안 나는데 그냥 사.”
“별로 다른 것도 없는데 3불이나 더 주고 살 이유가 없어.”
경제 관념만큼은 확실히 다른 우리는 3달러를 두고 과연 이 돈이 3불밖에 되지 않는지, 아니면 3불이나 되는 건지, 몇 분째 실랑이 중이었다.
“이거랑 다른 것도 없는데 단순히 브랜드 때문에 비싼 거잖아.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브랜드는 안 중요해.”
“그럼 아까 와인 오프너는 뭐야, 제일 비싼 거로 골랐잖아. 기준이 뭔지 전혀 모르겠네.”
“그건 소모품이 아니잖아. 그런 건 좋은 거로 사서 오래 쓰는 게 나아.”
“흠.”
강세현은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대충 사.”
“안 돼.”
분명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커다란 손이 맨 왼쪽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고작 세탁 세제 하나 사는데 대체 몇 분을 고민하는 거냐는 타박이 따라왔다.
“원래 쓰던 게 단종될 줄 몰랐지.”
“그렇다고 누가 그렇게 오래 고민해.”
“잘 따져보고 고르는 거야. 아니면 후회하니까. 세제는 양도 많아서 오래 써야 한단 말이야.”
“별로면 버리고 새로 사면 되지. 보통은 그러지 않나.”
그건 너만 그래, 이 자식아.
꼼꼼히 따지는 습관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못 샀을 때 또 돈을 주고 새것을 사야 하는 것보다 남아있는 걸 버려야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특히 양이 많은 걸 살 때는 더 신중하게 골랐다.
“섬유 유연제는?”
“이거.”
“이게 저거보다 2불 더 비싼데?”
“그래도 이거. ……섬유 유연제는 향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어이가 없는 눈빛이 따라왔다. 서둘러 변명을 해 봤으나 전혀 설득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더 살 거 없으면 저쪽.”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강세현은 별다른 말 없이 맥주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카트를 밀고 앞서가는 곧은 등을 보며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오늘은 강세현에게 고백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고백 이후, 일주일이나 일찍 미국으로 돌아온 강세현은 할 일이 없다는 핑계로 월요일부터 우리 집에 머물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부터는 일이 끝나면 내가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의 몇 배나 되는 본인 집을 두고서 굳이 좁은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겠다고 우겼다.
‘불편하잖아. 그냥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됐어. 넌 일 때문에 그다음 날 다시 와야 하잖아.’
그럼 넌 대체 며칠 동안 묵으려고 그러냐고 묻고 싶었으나 설마 사흘 연속으로 자고 가겠어, 라는 생각으로 묻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집에 간다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떠난 지 정확히 세 시간 후 다시 돌아왔다.
‘장 보러 가자.’
돌아오자마자 멋대로 냉장고를 뒤진 강세현이 인상을 쓴 채 말했다.
이번엔 얼마나 있으려고 장을 보자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잔뜩 쓸어 담은 강세현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스낵은 뭐로 할래. 와서 골라봐.”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그래도 잘 봐. 또 이것저것 따져봐야지.”
“……놀리는 거냐?”
“칭찬일걸.”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강세현은 손을 뻗어 내 등을 두어 번 도닥였다. 아무렇지 않은 손길에 순간 마음이 술렁였다. 고백한 놈은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고백받은 내가 긴장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강세현은 고백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주 오는 거야 그 전에도 그랬었고, 다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 사이도 그대로인데, 놀랍게도 이미 알고 있는 상대의 습관이나 행동이 고백 후에는 새롭게 느껴졌다. 등을 툭 치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건 늘 해 왔던 신체 접촉인데도 괜히 긴장하게 되고, 별 것 아닌 말에 가슴이 들먹댔다.
“넌 뭐가 좋은데?”
나초는 너무 식상하고, 그냥 칩을 사자니 뭔가 다른 안주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두 가지를 두고 고민하다 상대에게 결정을 맡겼다. 바로 옆에서 빤히 나를 내려다보던 강세현은 툭, 성의 없는 대답을 던졌다.
“너 좋은 거.”
이런 거다. 이런 별 것 아닌 말.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
강세현에게 고백받은 지 겨우 4일.
‘아마도.’ 그렇게 대답한 지 고작 나흘째 되는 오늘.
강세현은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 사이도 이전과 같았다.
그런데.
내 마음만 변했다.
점점 더 이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