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내 눈빛에 서려 있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마도.”
허무할 정도로 짧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답이었다. 맞다고 해도 곤란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쪽팔렸을 테니까.
아마도.
아마도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긍정이긴 하지만 아직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대답 속에 확신이 없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드르륵- 드르륵-
핸드폰이 손 안에서 요란하게 진동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액정에는 정말 눈치 없는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받아.”
스피커폰도 아닌데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나왔다.
“네, 형.”
- 너네 어디야? 벌써 도서관 도착했냐?
“아니요. 아직.”
- 뭐 하느라 아직 안 갔어?
“카피센터에 잠깐 볼일 있어서요.”
- 오래 걸려?
“아니요.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것 같은데, 왜요?”
- 끝나면 도서관으로 가지 말고 중앙 건물로 와. 정우 잠깐 놀러 온대서 거기서 보기로 했어.
“정우 형이요? 갑자기 왜요?”
- 불쌍한 영혼들 놀리러 온대나 뭐라나. 그래서 내가 올 때 핫도그 사 오랬거든. 먹고 가자.
“알겠어요.”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오라는 기현 형의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강세현은 자연스레 왼쪽 길로 걸음을 옮겼다. 카피센터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는 게 새삼 대단했다.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해.”
강세현은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절대 나중에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이게 미룰 수 있는 얘기야?”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미뤘잖아.”
“뭐?”
“어쨌든 시간 없어. 여기서 할 얘기도 아니고. 그러니까 우선 가자.”
거의 등을 떠밀리듯 걸음을 옮겼다. 카피센터에 들렀다가 형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 갈 때까지 우리 사이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조금 전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당연하게도 머릿속에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술을 찾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이 상태로는 전혀 공부가 되지 않을 테니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말릴 줄 알았던 강세현은 내가 맥주를 가져오자 도리어 안주가 될 만한 과자를 찾아와 앞에 앉았다.
“착각 아닐까.”
“무슨 착각.”
“나를 여자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 테니 네 마음이 착각이겠지.”
“그건 아닐걸. 꽤 고민한 결과거든.”
꽤 고민한 결과.
원래라면 정말 곤란해야 할 사람은 강세현이다. 본인도 설마 자신이 남자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리라고 생각 못 했을 테니까. 그러니 착각이라는 말로는 다시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부정할 생각은 없어?”
“왜 부정해야 하는데?”
“내가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지난번에 오히려 고맙다며. 네가 그랬어.”
“내가 언제.”
“월요일. 오늘 네가 번호 줄 뻔한 애가 말 걸었을 때. 여기저기 다 먹히는 얼굴이라서 감사하다고 했어.”
“그건 얼굴에 관한 내용이었지.”
“지금 나랑 계속 말하는 거 보면 괜찮은 거 맞잖아. 기분 나빴으면 네가 지금 여기 있겠어?”
“…….”
“그리고 너라면 어차피 짐작하고 있었을 테고.”
하여간 진짜 말은 잘해.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내가 껴안았을 때부터 알았을걸. 어쩌면 그 전부터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고. 너 눈치 빠르니까.”
눈치가 빠른 건 내가 아니라 강세현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물어본 것 같다. 그냥 끝까지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봤자 내가 언젠가는 말했을걸.”
“아닐 수도 있지. 아마도라고 말한 건 확실하지 않다는 거잖아.”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그래도 아닐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어.”
“이미 얘길 꺼낸 순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다른 반론이 생각나질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나. 그런 생각과 함께 역시 후회하게 될 줄 알았다며 자책했다. 끝까지 넘어가지 왜 그런 질문을 해서.
“그냥 지금 이 대화는 전부 없던 거로 해.”
“그건 싫어.”
아니 그게 왜 싫어? 보통은 반대이지 않아? 오히려 고백한 놈이 없던 일로 해 달라고 해야 하지 않나.
“내가 봤을 때 너는 지금…… 오랫동안 누군가 있다가 없어져서 외로운 것 같아.”
“네가 봤을 때 내가 외롭다고 갑자기 남자를 좋아할 사람으로 보여?”
“……아무래도 자주 만나고 그랬으니까.”
“자주 만나면 남자도 좋아진다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 잠깐 헷갈리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런 걸 헷갈릴 만큼 바보는 아닌데.”
“…….”
상대를 기가 찬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쑥 코앞으로 맥주잔이 다가왔다. 이 와중에 건배제안이라니. 미적미적 팔을 내밀어 잔을 부딪쳤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달라지는 거 없어. 있던 일을 어떻게 없던 일로 해.”
“그럼 이대로 지내자는 거야?”
“못 지낼 이유는 뭔데.”
“네가 뻔뻔한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도 최근에 알았어.”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져.”
강세현은 웃었다. 넌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냥 지금처럼 있으면 돼.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아직은.”
“아직은?”
“어.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지내면 돼. 네 말대로 아직 확신은 없으니까.”
맥주보다는 소주를 마셔야 했다. 그게 아니면 독한 양주라도. 이 모든 게 맨정신으로 주고받는 이야기라고 믿어지질 않았다.
“부담되면 그냥 여자애한테 고백받은 거라고 생각해.”
“여자고, 남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게 너라는 게 문제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곤란한 이유는 상대가 강세현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게 호감을 가진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니길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친한 사람이기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굳이 예를 들어 그 상대가 기현 형이나 소라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뿐더러 백번 양보해 그 말을 믿어주더라도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강세현에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저 녀석이 누군가를 향해 품는 감정의 무게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 하필 나야.
아무리 생각해도, 수십 번, 수백 번을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내가 왜 좋은 건데.”
말해 놓고 순간 후회했다. 아마도라는 대답을 들었는데 마치 확답을 들은 것처럼 물었으니 질문 자체가 틀렸다. 하지만 강세현은 꼭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상형이라서.”
“언제부터 네 이상형이 남자가 됐는지 말해 봐.”
“남자고 여자고의 문제가 아니라며. 나도 그래.”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왔는지 따지려 해도 상대와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고, 아무리 머릴 싸매도 뚜렷한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사람의 마음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해 봤자 뜻대로 될 리 없었다.
“좀 전에 아직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어.”
“……만약에 확신이 생기면?”
다음에 나올 강세현의 대답을 예측했다.
1번. 어차피 포기할 테니 역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말한다.
2번. 마음을 접을 테니 전부 잊어달라고 말한다.
3번. 거리를 두자고 말한다.
실제로 1번과 2번은 같은 답이었고, 3번만 달랐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강세현이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강세현은 아주 잠깐 고민하는듯하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날 좋아해야지.”
이번에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시험을 망쳤다.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집중하지 못한 건.
일부러 일도 하지 않고 잠이며 휴일이며 전부 반납하고 시험공부에만 매달렸는데 아주 보기 좋게 망했다. 이게 다 강세현 때문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너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자 강세현은 왜? 라고 물었다. 시험 기간 내내 신경 쓰여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자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까지 날 생각했다니 영광인데.’
만약 유급하게 되면 학비는 자신도 좀 보태겠다는 농담까지 했다.
미친놈.
그날 이후, 강세현의 말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냈다.
다만 가끔 함께 있을 때 강세현은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쳐다보곤 했다. 더는 숨길 게 없으니 전보다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강세현: [내일 나 데려다줘.]
드디어 내일은 강세현이 한국으로 가는 날이었다. 이 날이 오도록 바라고 바랐다.
흔쾌히 알겠다고 답을 보냈다.
부디 다시 돌아왔을 땐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라는 답을 듣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