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37화 (37/96)

#37

8. 이상

권성하

“그래서, 티켓은 끊었어?”

- 끊었으니까 연락했지. 금요일 오후 5시 15분에 오헤어 공항 도착.

“그래도 저녁 시간 전에 도착하네. 좀 더 늦을 줄 알았더니.”

- 원래 1시랑 7시 비행기만 남았었는데 오늘 보니까 4시 거 떴더라고. 기다려 보길 잘한 것 같아.

“그럼 오면 바로 저녁 먹으러 가면 되겠다. 6시 반으로 예약해 놓을게. 아파트에 들러서 짐만 내려놓고 가자.”

- 아. 드디어 가 보는구나, 시카고.

벌써 시카고에 온 지도 2년이 넘었는데 소라가 이곳을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오지 못했던 건 아니었고, 지금까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뉴욕으로 갔었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 근데 정말 일 빼도 돼?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냐?

“완전히 뺀 거 아니야. 다른 날이랑 바꾼 거니까 괜찮아.”

- 그래도 원래 일하는 날인데 그날 밥 먹으러 가는 게 괜찮은가 해서.

“사장님한테 미리 말해 놨어. 뉴욕에서 친구 오면 온다고 했더니 오히려 좋아하시더라. 일부러 홍보해 주는 거냐면서.”

시카고에 오면 어디를 가장 가고 싶냐는 내 질문에 소라는 곧바로 내가 일하는 가게 이름을 댔다. 실제로 맛집이기도 하지만 2년 동안 근무하는 곳이니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 그럼 네 친구들은 언제 만나? 밥 같이 먹어?

“저녁 먹을 때는 세현이만 올 거야. 그날 늦게 끝나는 형이 있어서 형들은 저녁 먹고 나서 보기로 했어. 술 마시재.”

- 와……. 드디어 보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소라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강세현이라는 이름만 수십 번은 더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 진짜 궁금하다. 다 궁금한데 걔가 젤 궁금해.

“왜?”

- 그냥. 처음엔 내 친구 뺏긴 것 같아서 질투도 좀 나고 그랬는데 지금은 고마워서. 그래도 걔 때문에 외롭진 않은 것 같으니까.

사실이었다. 사실 난, 시카고에 온 후로 거의 외로운 적이 없었다. 처음 몇 주 동안 혼자였던 걸 빼면 그 후로는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였다. 특히나 강세현과는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강세현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게 나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에 내 빈자리를 채워준 건 강세현이었다.

- 아직 한참 남은 거 같은데 어찌 기다리냐. 오늘부터 설레서 잠이나 올지 모르겠다.

“2주 금방이야.”

- 그래. 금방 갈게. 기다리고 있어.

역시 하루하루는 길었지만 2주는 금세 지나갔다. 학교 가고 일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기다리던 금요일이었다.

오랜만에 멋을 부렸다. 티셔츠 위에 시카고에 있으면서 한 번도 꺼내입지 않았던 얇은 니트를 입고 이번에 새로 산 청바지를 입었다. 멋을 부렸다고 하기엔 달라진 건 옷밖에 없지만, 그래도 거울 속 모습이 제법 달라 보였다.

신경을 쓴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날아올 잔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매일 보는 얼굴, 잘 보일 사람 하나 없다 말해도 소라는 나 대신 늘 내 차림새에 관심을 가졌다. 잘난 얼굴 두고 뭐하냐고, 큰 키 두고 어디다 쓰냐면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강세현에게 전화가 왔다. 6시 30분까지 가게로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소라가 탄 비행기는 항공사 사정으로 30분 늦게 도착했다. 거의 6시가 다 돼갈 때쯤,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연락이 왔다.

“성하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긴 팔다리가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헐렁한 니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소라는 남들이 보건 말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왔다. 하필이면 아래위 완전히 나와 같은 색이었다.

“왔어? 고생했어.”

“꼴랑 2시간 비행기 타면서 고생은 무슨. 너야말로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하필 연착될 게 뭐냐. 차는?”

“이 앞에. 나가서 건널목 건너면 바로야.”

“오케이. 얼른 가자. 잘하면 늦겠다. 6시 반이랬지?”

“어. 지금 출발하면 딱 맞춰 도착할 거야.”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중간에 집에 들르기로 한 건 생략하고 일단 곧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예상대로 강세현은 미리 도착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 성하 왔네.”

입구에서부터 일하는 직원들이 한두 명씩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내 옆에 있는 소라에게로 향했다. 서빙을 하던 직원 누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리셉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테이블은 사장님이 계신 3번 테이블이었다. 따로 테이블을 지정하지 않고 그날 바쁘지 않은 테이블로 해 달라고 했건만 강세현은 떡하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아! 어서 오세요.”

나와 소라를 본 사장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늦게 고갤 돌린 강세현은 갑자기 인상을 썼다. 반듯했던 이마가 한순간에 구겨졌다.

왜지?

영문 모를 상황에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사장님께서 소라에게 직접 메뉴판을 건넸다.

“반가워요. 성하가 뉴욕에서 친구 온다고 처음으로 스케줄 바꿔 달라길래 대체 누군가 했더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였네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성하 너는 그냥 친구라더니, 중요한 손님이 오는 거면 말하지 그랬냐.”

친구라는 말에 모두가 남자를 예상했는지 예상과 다른 손님의 등장에 우리 사이를 오해하는 듯했다.

서둘러 아니라고 해 봤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냥 제일 친한 친구예요.”

“제일 친한 친구는 이쪽 아니고?”

사장님은 내 왼편에 앉아 있는 강세현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오자마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어 강세현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냐?”

“어.”

뭐지.

오늘 강세현은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조금 전 도착했다는 통화를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소라가 메뉴에 정신 팔린 사이 작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러자 뚫어지라 나를 쳐다보던 강세현은 몇 초 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입고 오면 누구든 오해할 것 같은데.”

“어? ……아.”

“일부러 맞춘 거야?”

“아니. 우연히 겹쳤어.”

“집에 들른다더니 갈아입을 생각은 왜 못했을까.”

“집에 못 들렀거든. 비행기 연착되는 바람에 바로 왔어.”

왜 자꾸 다들 이상한 눈으로 보나 했더니 잊고 있었다. 소라와 내가 너무나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쨌거나 단순히 우연이었다는 걸 알게 된 강세현은 그제야 구겨진 이마를 폈다. 대체 왜 강세현이 내 옷차림에 딴지를 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왜지.

“성하야. 나 소개 안 해 줘?”

그새 메뉴판을 다 훑어본 소라가 툭 어깨를 쳤다.

“아, 인사해. 여기가 소라고, 이쪽이 강세현.”

“얘기 많이 들었는데.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어. 괜찮아.”

강세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름 감동했다.

사실 강세현이 이 자리에 나오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 심지어 본인이 먼저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뭐라고?’

‘같이 밥 먹자고. 뭘 그렇게 놀래.’

‘……방금 제대로 들었어? 뉴욕에서 친구 온다니까? 너랑 나, 둘 아니야.’

‘그러는 넌 지금까지 뭐 들었어. 뉴욕에서 오는 네 친구랑 셋이 같이 밥 먹자니까.’

‘……괜찮겠냐?’

‘안 괜찮을 건 뭔데.’

‘아니, 너 새로운 사람 잘 안 만나니까. 누가 데려온 사람도 싫어하잖아.’

‘네가 데려오는 거잖아. 그럼 괜찮아.’

강세현은 꽤 수다스러운 소라의 말을 잘 들어줬다. 원래 처음부터 누구 말을 잘 받아주는 편은 아닌데 내가 데려온 손님이라고 나름 노력하는 듯했다.

“그러면 오늘은 강의가 아예 없었던 거야?”

“아니. 오전에 하나 있었어. 근데 11시라서 끝나고 1시 비행기는 못 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다음 거 탔지. 나 사는 곳에서 공항까지도 꽤 멀거든.”

“고생했네.”

놀랐다.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야 여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늘 시큰둥하거나 무관심했던 강세현이 새로 만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장단을 맞추는 것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형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치 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강세현을 보는 것 같았다.

“다 됐습니다.”

어느새 요리가 완성되고, 각자의 앞 접시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가 골고루 담겼다. 사장님께서는 주문한 요리 외에 몇 가지 해산물과 야채를 더 얹어주셨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반지르르하게 버터로 코팅된 새우를 맛본 소라는 연이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맛있어요, 사장님.’ ‘진짜 네가 자랑할만했네, 성하야.’ 이렇게 말한 후 중간에 내 허벅지를 쿡 찌르며 왜 뉴욕에는 이런 데가 없냐며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철판요리를 먹던 도중 따로 주문한 몇 가지 일식 요리와 튀김이 나왔다. 유난히 오징어 튀김을 좋아하는 소라를 위해 맨 먼저 접시에 놓아주자 씩 웃었다.

“역시 나 생각해 주는 건 너밖에 없네. 뉴욕에선 이렇게 챙겨 주는 사람 절대 없는데.”

“그래. 챙겨 줄 때 많이 먹어라. 모자라면 더 시키면 되니까.”

앞에서 지켜보던 사장님께서 우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오해를 아주 단단히 하신 모양인데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어 그냥 포기해 버렸다.

한참 식사에 집중하다가 뭔가 조용한 것 같아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세현이 뚱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자꾸 빤히 쳐다봐.

눈빛으로 소리 없이 묻자 상대가 대뜸 물었다.

“나는.”

“……너, 뭐.”

“나는 왜 안 줘.”

“……뭘?”

“저거.”

긴 손가락이 정확히 내 앞을 가리켰다. 동그랗게 말린, 잘 튀겨진 오징어였다.

아주 돌아버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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