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31화 (31/96)

#31

“그러면 형은 한국에 있고, 너만 유학 온 거야?”

“형도 미국에 있어. 시카고 말고 다른 데 있지만.”

같은 뉴욕에 있었음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미국엔 왜 왔는데.”

“……엄마가 가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나, 너는 아니냐?”

“난 내가 간다고 했어.”

“……어릴 적부터 꿈이 컸구나.”

이번엔 내가 먼저 잔을 내밀었다. 강세현의 손이 너무 큰 건지 아니면 잔이 너무 작은 건지 맞부딪히는 잔이 너무 작아 보였다. 술을 마시면 점점 취기가 올라와 핑그르르 돌 때부터 기분이 좋아진다던데 아직까지 그런 건 없었다.

“그리고 다른 건?”

“시카고까지 온 이유. 학교라면 뉴욕에도 비슷한 대학은 많잖아. 일부러 뉴욕에서 시카고로 온 사람은 못 봐서.”

“그냥 지겨워서.”

“어떤 점이?”

“미국에 간 뒤로는 쭉 뉴욕에만 있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다 권태로워지더라고. 자주 가는 곳, 자주 만나는 사람들, 전부다.”

“그것도 의외네.”

“왜?”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쓸 것 같았거든. 너라면 새로운 것보단 안정적인 생활을 좋아할 줄 알았지.”

이것 봐. 정확히 본다니까.

“그래서, 시카고는 어떤데. 마음에 들어?”

“……비슷한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상대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러면 여기도 지겨워지면 다음엔 어디로 갈 건데.”

“……글쎄.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

“한국이라는 말은 안 하네. 졸업해도 미국에 있으려고?”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세현이 따라 일어섰다. 바깥으로 통하는 가게 뒷문을 열자 뒤편에 재떨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찬바람이 닿자 춥다기보다는 약간의 서늘함이 기분 좋았다. 그제야 내 얼굴이 달아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가게 안 노란 조명에서도, 하얀색 가로등 아래에서도 강세현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지금쯤 내 얼굴은 빨개져 있을 텐데. 나와 똑같이 술을 마신 사람 같지 않았다.

“나 뻗으면 길바닥에 버리지 말고 근처 모텔에 넣어줘.”

“취했어?”

“아니. 지금은 아닌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설마 버릴까 봐.”

“너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도 돈을 써가며 오밤중에 택시를 태워 보내는데 날 그냥 둘 것 같진 않았다. 강세현은 적어도 자신이 함께 있는 사람의 마지막 정도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우리는 곧바로 한 잔을 더 마셨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병은 바닥을 보였다. 나는 상대를 향해 빈 병을 흔들며 물었다.

“어떻게 해, 한 병 더 시켜?”

“같은 거로? 괜찮으면 그러던가.”

조금 도수 낮은 거로 바꿀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히려 내일이 되면 더 괴로워질 걸 생각해 다시 소주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직원이 같은 상표가 붙은 소주를 놓고 갔다.

“나에 대해 궁금한 건 그게 다야?”

“설마. 조금 전에 못 들었어? ‘다’라고 했는데.”

“네 여자친구가 너 이렇게 집착하는 남자라는 거 알고 있냐?”

“하하.”

강세현은 처음보다 많이 웃었다. 특히, 형들과 다 같이 있을 때보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더 자주 웃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 매번 똑같은 생각을 했다. 자식, 그것참 잘생겼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홀린 듯 쳐다보다가 오늘도 그렇게 생각했다.

“몇 달 동안 여자친구보다 널 더 만났을걸.”

“그거야 장거리 연애니까 그렇지.”

“장거리라고 해도 매주 봤어. 그래도 너랑 있었던 시간이 더 길 거다.”

“그건 인정.”

그런데도 이렇게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매번 공부를 핑계로 함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대화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의 관계를 말하자면,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가깝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불편한, 그런 애매한 사이였다. 그리고 강세현은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내게 매번 도움을 줬다.

“내 성적의 반은 네 덕분이다, 강세현.”

비워진 잔을 채우고 먼저 잔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자 강세현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다 빚이야, 그거.”

무심한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는 게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게 더 많았다. 그중 몰랐던 게 이해가 안 갈 만큼 사소한 것도 있었다.

“이런 것도 서로 몰랐던가.”

“말했잖아. 너 나한테 관심 없었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없었잖아.”

“같은 취급하지마. 오늘도 내가 만나자고 안 했으면 네가 먼저 연락 안 했을걸.”

“…….”

“할 말 없지?”

“……어.”

나름대로 말싸움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이길 수가 없었다.

만난 지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새로 딴 병도 금세 줄어들어 곧 바닥을 보일 것 같았다. 내가 생각보다 술이 세다고 생각했을 때쯤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은데 잠이 왔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직 열한 시밖에 안 됐는데 이상하네.

“나 취했나 봐.”

“그런가 보네.”

중간쯤, 혹시 찬 바람을 쐬면 좀 괜찮아질 줄 알고 밖에 나갔다가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되려 더 취기가 돌았다. 그래도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버텼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시비를 거는 이상한 술버릇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동안에도 강세현은 다음 잔을 채웠다. 내 앞의 상대는 얄미울 만큼 멀쩡해 보였다. 나처럼 얼굴이 발갛지도 않았고 반쯤 눈이 감기지도 않았다.

“강세현.”

“어.”

“네가 왜 친구가 없을까.”

얼굴도 잘났고, 부자고, 술까지 잘 마시는데. 마음만 먹으면 친구 백 명은 만들 수 있는데 왜 혼자 놀지.

“가끔 성질부려서 그런가.”

“……하.”

내 말을 들은 강세현의 입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술에 취한 탓인지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구긴 모습이 유난히 더 잘나 보였다.

“대체 왜 혼자 노냐.”

“누가 그래.”

“형들이.”

“요즘은 너랑 놀잖아.”

“아……. 그건 그러네.”

그러면 나는 네 친구냐?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아, 한계가 왔구나. 테이블엔 빈 병이 세 개나 놓여있었다.

“졸려?”

졸린 게 아니라 취한 것 같다.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생각한 말을 제대로 뱉었는지 몰라도 강세현이 일어나 멍하니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도대체 얼마나 비싼 향수를 뿌리길래 이렇게 향이 좋은 걸까.

“가자.”

가자는 말에 쫄래쫄래 강세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가게 앞에 서 있는 정체 모를 차에 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계속되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손을 뻗자 딱딱한 플라스틱 케이스가 손끝에 닿았다.

몇 시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11:17 AM」

아침 먹을 시간이 지나 버렸다고 생각한 지 1초 만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보드랍고 포근한 침구는 매일 보던 것이 아니었다.

새하얀 시트가 깔린 킹사이즈 침대와 그 아래 깔린 값비싼 카펫, 그 끝을 따라 고개를 들자 천장높이로 양방향이 탁 트인 유리창 너머 한강 전망이 180도 로 펼쳐져 있었다.

어제 말해놓고도 설마 강세현이 모텔 같은 곳에 가긴 할까, 의심했었는데 역시 모텔은 아니었다. 눈을 뜬 곳은 호텔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술 취해서 잠깐 쉬어 가기엔 별도로 거실까지 딸린 스위트룸은 너무 좋은 방이었다. 이런 방은 하룻밤에 얼마쯤 할까. 생각하다 중간쯤 계산을 포기했다.

마지막 기억이 11시 반쯤이었으니 상당히 많이 잔 셈이었다. 덕분에 처음 술을 경험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여전히 좀 멍하고 살짝 허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두통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냄새만으로 다시 취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만큼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하아…….”

기억이 드문드문해도 차 타기 전까지 거의 다 기억이 났다. 마지막에 지갑에서 돈을 꺼낸 것도, 강세현과 함께 술집에서 나온 것도. 그런데 어째서인지 차에 타고부터 기억이 없었다. 그 후 잠이 들며 기억이 전부 날아간 모양이다.

운전해 준 사람은 누구지? 분명 택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군가 가게 앞까지 차를 끌고 온 기억은 있는데, 그게 택시였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욕실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핸드폰 액정을 열었다. 언제 들어올 거냐고 묻는 엄마의 메시지와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일단 엄마에게 한두 시간 내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강세현에게 연락했다.

평소처럼 보내면 되는데 뭐라고 보낼지 한참 고민하다 액정을 두드렸다.

나: [덕분에 호강한다]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강세현: [맘에 들어?]

나: [맘에 들긴한다만]

나: [빚 갚으려다 더 늘어난 기분이라서]

이러면 술을 사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상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강세현: [속은]

나: [다행히 괜찮아]

나: [너는 언제갔어?]

강세현: [너 데려다주고 바로]

강세현: [일 가야해서]

고마움을 넘어 괜히 미안해졌다.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게 상대더라도 어쨌거나 나 때문에 마지막에 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 내용을 담아 메시지를 보내자 이번에도 답장은 몇 초 만에 왔다.

강세현: [재밌었어]

강세현: [나도 친구랑 마신건 처음이었거든]

재밌었다는 중요한 메시지보다 친구라는 두 글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 역시 우리가 친구긴 했구나.

확신함과 동시에 이제야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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