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왜 그냥 있어.
꼭 추궁하는 말투였다. 마치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처럼.
“피곤한데 잠은 안 와서 그냥 누워서 핸드폰 보고 있었어. 넌 밖이야?”
- 밖이니까 담배 피우지.
대답하는 강세현의 주위로 꽤 시끌시끌한 잡음들이 들려왔다.
“……아니, 집 아니냐고.”
- 어. 약속 있어서.”
체력도 좋다. 한국에 도착한 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 이 시간에 약속이라니.
“약속 상대는 어디에다 두고 혼자 피워?”
- 놀아.
“아…….”
- 그러니까 다 피울 때까지 잠깐만 나 상대해.
강세현은 지난번 혼자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 한국에 있는 동안 뭐할지 좀 생각해 봤어?
“아니. 아직.”
오랜만에 한국에 왔지만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싶은 음식이나 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물건까지 정해 둔다는데 몇 년 동안 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 무얼 해야 할지 전혀 계획이 없었다.
“너는?”
나도 그랬고, 강세현도 그랬다.
강세현과 나란히 일등석을 타게 된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잠든 후 두 시간 만에 깨어난 강세현에게 물었다.
‘한국 가면 뭐 할 거야?’
‘글쎄.’
‘하고 싶은 거 없어? 너 여름에도 짧게 갔다 왔다며.’
‘별로.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게 아닌데 왜 가? 비자 때문에?’
‘아니.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매번 그렇게 놀라고도 또 놀랄 게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말은 칼같이 듣는구나, 하고.
‘넌 뭐할 건데.’
‘나? 음…… 나도 잘 모르겠다.’
‘너는 왜 몰라.’
‘그러게. 막상 묻고 나니 나도 생각이 안 나네.’
‘그럼 넌 왜 가는 건데?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나도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참 이상한 데서 통했다. 물론 파헤쳐보면 전혀 다른 사정이겠지만 어쨌거나 둘 다 비싼 돈 주고 한국을 나가면서 해야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사실은 같았다.
- 생각은 안 해 봤는데 해야 하는 게 생기긴 했어.
“해야 하는 거? 뭔데.”
- 일.
“일? 무슨 일? 한국에서 일을 해?”
- 그냥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니.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강세현이 심심해서 일하는 미친놈이라는 거.
“열심히 해라.”
- 넌 안 궁금해?
“뭐가?”
- 보통은 뭔지 묻지 않나.
묻겠지. 보통이라면 물었겠지. 너라서 안 물은 건데.
“왜, 또 별 관심 없는 것 같아?”
- 그건 이미 알고 있고.
“……하.”
내가 기가 막히듯 혀를 차자 강세현은 웃었다.
“그래서, 무슨 아르바이튼데?”
- 그냥 아버지 회사 일.
“……이렇게 대충 대답할 거면서 왜 묻길 원한 거냐.”
또 한 번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우리는 불과 몇 시간까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또 이야깃거리를 찾아내 오랜 통화를 했다.
강세현은 고작 5분이면 다 피울 수 있는 담배를 핑계로 무려 20분 동안이나 전화를 못 끊게 했다. 그리고 나도 그가 이미 한참 전에 다 피웠다는 걸 알고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새 이 집에 대한 불편함도, 새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알 수 없는 혼란도 사라지고 없었다.
- 안 들어올 거야?
최근에 개봉했다는 독립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불만을 품은 목소리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 금방 갈게.
- 치, 조금 전에도 금방 온다 그래놓고. 담배는 안에서 피워도 되잖아.
알겠다고 대답하는 강세현의 말투는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설마 했던 상대는 여자친구가 분명했다. 이 시간에 바로 무슨 약속인가 했더니 데이트였던 거야?
“너 만난 사람이 여자친구였어?”
- 어.
“그럼 같이 있어야지.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면 어떡하냐.”
- 다른 사람도 있어서 불편해.
“그러면 더 같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그런가.
그런가라니. 연인을 향해 달콤한 말을 입에 담을 줄은 알면서 그런 기본적인 걸 모르는 건가.
“불편해도 참아야지.”
- 왜.
“왜냐니…… 여자친구랑 같이 있다며. 옆에 있는 사람을 봐서 참는 거지.”
- 그건 힘들걸.
하긴, 그게 가능했으면 형들이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겠지. 짧게나마 지금까지 봐온 강세현은 옆 사람을 보고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잘 상상이 가지도 않았다.
“아무튼, 얼른 들어가 봐.”
- 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불과 몇 분 후, 나중에 연락한다던 강세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조금 전 이야기하다 말았던 독립영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락한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어? 전화나, 문자나, 옆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진데.
아까 끝내지 못했던 내용을 적어 메시지를 보내자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던 답장이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 다시 보냈을 때도 답장은 칼같이 바로 왔다.
그렇게 별 내용 없는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다 보니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나: [이제 진짜 가서 놀아.]
강세현: [어]
강세현: [피곤하다며. 너도 얼른 자]
뭘 맨날 일찍 자래. 잠 안 온다니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지막 인사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텅 비어서일까, 왠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을 감기 전,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액정에 뜬 숫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열한 시였다.
평소라면 침대에 누워 있지도 않을 이른 시각. 정말로 잠이 들었다.
* * *
“야, 권성하.”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적대감.
거의 반년 만에 보는 상대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화려한 머리 색부터 온몸을 휘감은 명품까지. 나를 깔보는 눈빛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잘 지냈냐?”
정말 잘 지냈는지가 궁금해서 묻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 지냈다는 걸 알면 돌연 화를 낼 것 같은 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는 사이는 아닌데.
“네.”
달갑지 않은 이의 안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짧게 대답하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 순간 비스듬히 올라갔던 입술 끝이 단번에 아래로 떨어졌다.
“이 새끼는 몇 달 만에 형을 보고 인사도 없어. 싸가지 없이.”
형? 당신이 언제부터 내 형이었지? 거지새끼라며 남보다 못한 취급을 하더니 이제 와서 형이라니. 잘 지냈냐는 말도 어색한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사이었지.
이렇게 먼저 마주칠 줄 알았다면 조금 늦게 올 걸 그랬다고 후회할 때쯤, 다행히 고운 투피스를 차려입은 엄마와 새아버지가 들어왔다.
“세상에, 정말 오랜만이다.”
사납게 나를 노려보던 이는 뒤늦게 도착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아버지와 엄마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래. 못 본 사이 더 멋있어졌네. 정말 당신이랑 닮았어요, 기준이는.”
“하하, 칭찬하려거든 그냥 멋있다고 하고 끝내. 얘가 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어머, 그런 거니?”
“아니에요. 아버지 판박이란 소리 자주 들어요.”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내게 보이던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나를 미워하는 것도, 엄마 앞에서 그걸 숨기는 것도, 두 사람은 참 닮아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네 명이 모인 것부터가 조금은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재혼 상대와 그 재혼 상대의 아들과 식사라니. 나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저녁 초대를 수락한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든 건 엄마였지.
전처와 이혼 후 양육권을 넘긴 새아버지는 전 부인에게 양육권은 빼앗겼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은 끔찍했다. 엄마는 재혼할 때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이해했다. 그래서 몇 년 전, 전 부인이 사고로 사망한 후 일부러 의붓형을 더 챙기려 했다.
강기준이 나를 찾아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나를 잘 봐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받은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엄마의 바람은 우리 두 사람이 진짜 형제처럼 가까워지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강기준은 역시 그 사람의 아들답게 똑똑했다. 나라면 이렇게까지 엄마에게 호의적이지 못할 것 같은데 제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방법이 결국 엄마에게 잘하는 거라는 걸 일찍부터 눈치채곤 엄마 앞에서 다른 얼굴을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니까 한식이 나을 것 같아서 여기로 했는데, 괜찮니? 아빠한테 너 좋아하는 거 물어보니까 다 괜찮다고 해서.”
“그럼요. 한식이 제일 좋죠.”
“정말? 난 너무 어른 취향 아닌가 했어.”
“아니에요. 이런 한정식집은 이럴 때 아니면 못 오잖아요. 전 좋아요.”
“거봐, 괜찮을 거라니까.”
미리 주문해놓은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4인 상이라고 하기엔 종류도, 양도, 너무 많은 상차림이었다. 전, 조림, 찜, 전골, 무엇 하나 빠진 것 없이 훌륭하지만, 처음 도착했던 날 집에서 밥을 먹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만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엄마는 그런 내 맘도 모르고 갈비찜 속 전복을 계속 밥에 올려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