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요일>
-오후 4시 22분-
나: [내일 몇시에 올거야?]
강세현: [7시]
나: [너무 이르지 않아? 여기서 20분밖에 안 걸리는데]
강세현: [출근시간이잖아]
나: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 아니라서 많이 안막혀]
나: [막혀봤자 30분이야]
강세현: [그럼 7시 반]
나: [알았어]
-오후 11시 56분-
나: [출발할 때 연락해 내려가 있을게]
강세현: [전화하면 내려와]
강세현: [도착 전에 전화할테니까]
나: [그럼 10분 전에 전화해]
강세현: [일찍자]
수요일 아침, 도착 5분 전에 미리 캐리어를 들고 내려가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데님블루 색상 SUV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몇 주 전에 새로 바꾼 강세현의 자동차였다.
“트렁크 좀.”
전자동으로 뒷문이 올라가자 눈앞에 넓은 트렁크가 보였다. 역시 비싼 차는 좀 다르구나, 생각하며 캐리어를 싣고 앞 좌석에 탔다. 차 실내 역시 보통 다른 차들과는 달라 보였다.
“왔어? 두고 온 건.”
“없어.”
“다시 생각해. 여권. 핸드폰. 짐.”
“내가 애냐. 빨리 출발해.”
이렇게 이른 아침에도 강세현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말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반나절 넘게 비행기 타고 갈 거면서 편한 티셔츠 대신 셔츠를 입은 것도, 패딩 대신 코트를 걸친 것도 의외였다.
“오늘 좀 덜 춥지 않아?”
“그래도 추워.”
“날이라도 좋은 게 어디야. 눈 많이 올까 봐 걱정했는데.”
“비행기 캔슬 될까 봐?”
“어.”
“해외로 가는 건 웬만해선 잘 캔슬 안 돼.”
“그래도. 어제 갑자기 또 내리길래 혹시나 했거든.”
차 안에는 그럭저럭 유명한 컨트리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강세현을 처음 봤을 때는 비트가 빠른 EDM이나 힙합만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R&B나 컨트리 음악을 선호했다. 본인 취향대로 듣는 게 음악이라지만, 도저히 혼자 차 안에서 그런 음악을 흥얼거리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이런 취향만큼은 정말 놀랍도록 나와 같다는 것이었다.
“가다가 저 앞 신호등 지나서 조심해. 가끔 덜 녹은 눈이 얼어서 더 미끄럽더라.”
매끈하게 잘 빠진 차가 제설제로 엉망이 된 도로에 올라섰다. 다행히 출근길 정체 시간이 아직 심하지 않아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차 승차감 좋다.”
“그런가.”
“왜. 넌 아니야?”
“모르겠는데. 그것보다 색상이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걸로 샀을 거 아냐.”
“내가 산 거 아니야.”
“그럼?”
“누나가 줬어.”
“아.”
큰누나와는 나이 차이가 크다고 했는데 그 영향인지 확실히 강세현은 누나와 있을 때만큼은 고분고분해 보였다. 예전에 여자친구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기쁘게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억 소리가 나는 차를 툭 하고 선물 해 주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대단한 거라고 봐야겠지만.
공항으로 가는 동안 밖이 서서히 밝아졌다. 겨울이라고 늦장을 피운 해가 다 올라오자 그제야 완전히 아침이 된 느낌이었다.
강세현은 운전하는 것마저 강세현다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피드를 즐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운전대를 돌리는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정말로 강세현다운 행동이었다.
차가 막힘 없이 도로를 달리고 운전자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멍하니 밖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평소 둘만 있어도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 없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어색했다. 조용한 차 안이 낯설어서 그런가. 생각나는 여러 가지 말 중 가장 자연스러운 말을 꺼내 대화를 시도했다.
“아침은 먹고 왔어?”
“커피 마셨어.”
“……먹고 왔네.”
아침에 꼭 무언가 먹어야 하는 나와는 달리 강세현은 공복에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었다. 그런 사람에게 아침을 먹었냐고 묻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너는.”
“수속 밟고 안에 들어가면 시간 많으니까 일부러 안 먹었어. 카페에서 샌드위치 같은 거 먹지 뭐.”
“그냥 식당도 다 열었을걸.”
“괜찮아. 어차피 넌-”
뚜르르-
…안 먹을 거잖아.
내 마지막 말을 방해한 건 차량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화였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깜짝 놀랐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액정에 뜬 상대의 이름이었다.
「여보♡」
이모티콘에 이은, 거의 재앙 수준의 충격이었다.
내가 충격에 할 말을 잃고 있는 동안 강세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왜 안 받아?”
“어차피 또 올 거라서.”
“어?”
뚜르르-
정확히 그 예상대로 두 번째 전화는 종료 버튼을 누른지 단 몇 초 만에 걸려왔다.
툭.
강세현은 연결된 블루투스를 끊어버리고 거치대에 올려진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전에 봤던 모습을 생각해 조금은 다정한 말을 뱉지는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가는 중이야. 지금 운전 중이고.”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하는 말이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따로 전화를 받은 것 같아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 괜히 미안해졌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통화해도 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
“……도착해서 연락할 테니까. ……그래.”
나의 노력에도 통화는 1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옆쪽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사이 잘난 이마가 살짝 구겨져 있었다.
“계속 통화해도 되는데.”
“운전 중이잖아.”
아무리 능숙하다고 해도 운전 중 전화를 받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충 ‘괜찮겠지’하고 넘어가는데 역시 안되는 건 안 하는 강세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웬일로?”
앞만 보던 고개가 아주 잠깐 내 쪽으로 왔다 갔다. 1초뿐이었지만 나를 아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어. 나한테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같은 비행기 타는 것도 모를 뻔했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아? 너도 물은 적 없잖아.”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강세현은 말없이 웃었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이제 와서 새삼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웃긴다는 거 아는데,”
“그 정도로 오래 궁금했던 거야? 그러면 진즉 묻지 그랬어.”
“진짜 별거 아니라서 그래.”
“뭔데.”
강세현의 반응을 보니 고작 이모티콘과 저장된 이름에 대해 묻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질문에 앞서 몇 달 동안 봐온 강세현에 대해 줄줄이 읊자 평소답지 않게 서론이 길다며 타박을 받았다.
“그 이모티콘 안 쓰면 안 되냐?”
“돼. 난 또 뭐라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쓴 건가 싶어서. 누가 봐도 너랑 어울리는 건 아니었거든.”
“여자친구가 준 거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랑으로 커버되는 수준이 아니었는데.
“그 이름은 또 뭔데. 그것도 여자친구가 한 거야?”
“어.”
하트까지는 이해하지만 여보는 진짜 아니다.
설마 직접 했겠어, 싶은 생각에 당연히 다른 이가 해 줬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래도 역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생각도 못했을 텐데, 쓰라면 쓰고 하라면 하고.
이렇게 잘하는 애인이 또 어디 있다고.
강세현만큼 성실한 남자친구는 어딜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텐데 매번 의심하고 집착하는 그의 여자친구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게 다야? 궁금한 거. 또 저장된 이름 궁금한 사람 없고?”
“없어. 어차피 다른 사람은 그냥 이름으로 저장돼 있을 거잖아.”
“아닌데.”
“아니긴. 맞을걸.”
강세현의 성격상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지난번 기현 형에게 연락 왔을 때도 핸드폰 액정에 ‘서기현’이라고 떴으니까.
“너라면 누나도 이름으로 저장해 뒀을 것 같은데.”
농담처럼 툭 던진 말에 강세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짜야?”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지 몰랐네.”
“거봐. 맞잖아.”
웃음에 야박한 강세현은 오늘따라 여러 번 미소를 지었다.
“한 명 아닌 사람 있어.”
“한 명?”
“어.”
“누군데.”
“너.”
순간 인상을 썼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강세현은 처음 보는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농담이냐?”
“아니. 진짠데. 확인해 보든지.”
강세현은 전화를 걸어보라고 말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 전화를 걸자 잠자고 있던 까만 액정에 세 글자가 떠 올랐다.
「빚쟁이」
미친.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요 몇 달 사이 서로 알아 왔던 시간보다 아주 짧은 이 시간 동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