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21화 (21/96)

#21

6. 추위

강세현

“너는 언제부터 우리 학교 학생이 됐냐?”

후드티 위에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기현 형이 코까지 덮은 마스크를 끌어 내리며 물었다. 왔다는 인사도 없이 불쑥 질문부터 던진 형은 내가 피식 웃기만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둘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권성하는 그런 형을 향해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형, 왔어요? 먼저 자리 맡아뒀어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권성하는 형들에게 존댓말을 썼다. 같은 나이임에도 나는 반말을, 권성하는 존댓말을 쓰자 불편했던 형들이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어. 나야 우리 학교니까 왔는데 강세현 얘는 또 왜 좋은 자기네 학교 놔두고 여기 와있냐.”

시큰둥하게 대답한 형은 굳이 비어 있는 권성하의 옆자리를 두고 가방이 놓여있는 내 옆에 앉았다. 순간 찬 기운이 훅 밀려왔다.

“그것도 이 추운 날에 여기까지 온 거? 나라면 절대 못 와. 아니, 절대 안 오지.”

“그렇게까지 추운지 모르겠던데.”

“아씨, 얼어 죽겠구만. 넌 이제 감각도 없어졌냐? 아니면 네가 입은 패딩은 뭐 특별히 안에 다른 기능이라도 달렸어?”

형은 본인이 입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 패딩 안에 손을 넣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아, 지금보다 더 추워질 거 생각하면 진짜 끔찍하다. 미친 시카고, 미친 다운타운. 진짜 여기다 캠퍼스 지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거 같아.”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넌 이게 익숙해지냐? 우리 사촌 형은 여기서 태어났는데 30년째 적응을 못하고 있다더라.”

더위를 많이 타는 기현 형은 추위도 많이 탔다. 사실 아무리 추위에 강한 사람이라도 시카고 겨울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사람은 없었다. 11월 말부터 추워진 날씨는 12월이 되자 화씨 20도(영하 6도) 이하로 떨어졌다. 특히나 높은 건물이 많은 다운타운은 그냥 기온이 낮은 다른 곳의 추위와 차원이 달랐다. 건물 사이로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이 살을 벨 것처럼 불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정도는 괜찮은 편이었다. 진짜 추위는 12월 말에서 1월까지였다. 그쯤에는 아무리 두꺼운 옷을 몇 겹씩 껴입어도 살갗이 아리는 추위를 피할 수 없었다.

“근데 오늘은 왜 둘 다 도서관에 있어?”

“공부.”

“누가 공부하러 온 거 모르냐? 왜 다른 데서 안 하고 여기 와 있냐고.”

“성하가 여기서 형들이랑 한대.”

지난번 중간고사 이후로 권성하는 종종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간혹 중요한 과제나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에는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게스트룸에서 자고 그다음 날 바로 학교에 가곤 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권성하가 매번 ‘신세’라고 말하면서도 유일하게 내게 빚을 지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기말고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지난주까지도 집에서 공부했었는데 오늘 갑자기 학교 도서관에서 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형이 서운하다고 그랬다며. 우리끼리 공부한다고.”

“그래, 맨날 둘만 붙어있지 말고 이제 우리도 좀 끼워주라.”

“오라고 해도 안 오면서 무슨.”

애초에 우리 집 서재를 그런 식으로 꾸민 것도 같은 공간에 여러 명이 모여 공부할 수 있도록 일부러 인테리어를 따로 한 것이었다. 그 여러 명에 속하는 사람은 당연히 형들밖에 없었는데, 고작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도 형들은 그 시간이 아깝다며 대학 도서관을 선택했다. 사실 기숙사에 있는 형들에게는 그게 더 편하다는 걸 알기에 나도 그 후로는 따로 제안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늘 둘이었다. 권성하와 나, 우리 두 사람은 두 달 동안 주중에만 몇 번을 만나왔다. 같은 대학을 다니는 것도, 그렇다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자연스레 몇 시간씩 마주 보고 있었다.

내게는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 그리고 빠르게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일이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 게 싫어 되도록 누군가와 단둘이 만나는 걸 피해왔던 내가 권성하와는 계속 둘이 만났었다. 친한 기현 형과도 둘이 따로 만난 건 손에 꼽을 만큼 적은데. 그렇게 치면 확실히 권성하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탁.

권성하의 손가락 사이를 계속 배회하던 볼펜이 책상 위로 떨어지자 예상대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권성하는 팔을 쭉 늘어트리며 기지개를 켜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나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현 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어디가?”

“한 대 피우고 올게.”

평소라면 당연히 따라 나왔을 기현 형은 추운 게 싫긴 싫은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부터 흐렸던 하늘에는 일찍이 어둠이 내려있었다. 오후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밖은 컴컴했다.

“…….”

“…….”

도서관 옆쪽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권성하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딱히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점까지 지금껏 만나왔던 타인들과 비교가 됐다. 우리 집안에 대해 알든 모르든 내가 사는 환경과 내가 걸친 것들을 본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흥미를 갖고 질문을 던지기 마련인데 권성하는 달랐다.

권성하는 내가 다가가는 만큼만 내게 다가왔다. 정확하게, 딱 그만큼만. 절대 본인이 먼저 다가오는 법은 없었다.

속을 다 내어줄 것처럼 생겼으면서.

단순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도 마치 큰 빚을 진 것처럼 구는 바람에 심지어는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먼저 권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권성하라면 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호의를 넘어서는 순간 뒷걸음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이 사람 저 사람 쉽게 정을 주는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춥긴 춥다.”

찬 공기 사이로 반쯤 힘이 풀린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한참 만에 열린 입술 사이로 뽀얀 입김이 피어났다.

“그러게.”

무뚝뚝한 내 대답 위로 퉁명스러운 말투가 내려앉았다. 권성하는 오후부터 눈이 온다던 엉터리 일기예보에 대한 불만을 조용히 내뱉었다.

“오늘 어쩔 거야?”

“음…. 눈 안 오니까 그냥 집에 가도 되지 않을까. 당장 올 것 같지도 않고.”

눈이 온다는 소식에 원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려던 권성하는 멀쩡한 하늘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새벽에 내리면 어쩌려고.”

“혹시 모르니까 더 일찍 출발해야지.”

“시간 낭비 아냐?”

“애초에 거기 집을 구한 것부터가 시간 낭비라며.”

“그것도 맞는 말이고.”

얼마 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집과 대학을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게 안쓰러워 왜 대학과 그렇게 먼 곳에 집을 구했냐고 다시 물었다.

‘나라면 단순히 복잡한 게 싫어서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러자 권성하는 너무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일하는 데랑 가까워서.’

대학은 일주일에 5번. 일하는 건 4번. 나라면 당연히 대학에서 더 가까운 곳을 택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일하는 곳을 대학과 가까운 곳으로 선택할 수는 없었나.

‘그 식당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어.’

‘어디가 좋았는데?’

‘돈을 많이 줘.’

더는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이유였다.

“어쨌든 오늘은 집에 갈래. 어제도 집 비웠으니까.”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새삼 뭘 그래.”

“…반박할 말이 없어서 더 화나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디까지나 농담인 걸 알고 있었다. 권성하의 살짝 팬 이마 아래 쳐진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춥다. 들어가자.”

평소보다 더 빨리 담배를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 앉아 집중하던 기현 형이 우릴 향해 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을 걸었다.

“세현아. 너는 시험 언제 끝나냐?”

“다다음 주 화요일.”

“너네는 왜 맨날 한 주 늦어?”

“나도 몰라.”

“흠, 성하 너는 다음 주에 끝나는 거 맞지?”

“네.”

“그럼 강세현 빼고 우리끼리 술 마시고 놀자.”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웬일로 심각한 표정을 하나 했더니 역시나 노는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든가. 언젠 안 그랬어?”

“아씨, 너 진짜 자꾸 그러면 나중엔 사정해도 안 끼워준다.”

형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최근에 형들과 만나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못해도 2주에 한 번씩은 우리 집에서 모이던 모임도 벌써 두 달이 가까이 되도록 하지 못했다. 거의 매주 내가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 여자친구와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뭐라고 안 한다지만 그래도 아쉬운 척이라도 좀 해라.”

“형이야말로 우리 집에 있는 술이 아쉬운 거 아니고?”

“그것만 아쉽겠냐. 내가 세워놓은 게임 기록들이랑 모아놓은 칩들이랑, 또…”

장난 섞인 말투로 한참 투정을 늘어놓은 형은 마지막에 정말 서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번 달에도 계속 뉴욕을 가야 하는 거냐며.

“연말인데 한 번도 시간 못 비워?”

연말이니까 시간 못 내는 건데.

“설마 이번 주에도 가냐?”

“아니. 다음 주까지 안 가.”

“그래도 시험이라고 봐줬나 보네.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매주 보면 안 지겹냐?”

당장 이번 주에 시험 때문에 못 보는 걸 가지고 서운해하는 여자친구는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주말마다 뉴욕행 비행기 표를 보냈다. 핼러윈, 생일, 땡스기빙 등 각종 행사를 함께 하길 바랐고 일을 핑계로 가지 않으면 본인이 시카고행 비행기를 탔다.

“지겨운 건 둘째치고 대체 왔다 갔다 돈이 얼마야.”

“관심 꺼.”

“예, 예. 잘난 강세현은 연애든 공부든 알아서 열심히 하세요. 먼저 끝낸 우리는 알아서 자유를 누릴 테니. 아씨, 어딜 가야 강세현 이 자식이 부러워하지.”

멀뚱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권성하는 무언가 생각난 듯 그제야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형.”

“응?”

“괜찮으면 저희 집에 오실래요?”

“오. 그래도 돼? 우리야 당연히 좋지.”

“좀 멀어서…. 그리고 토요일 날 일 끝나고 밖에 안 돼요.”

“괜찮아, 괜찮아. 대신 재워줘야 해.”

“네.”

기현 형은 새 아지트를 찾은 것처럼 신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조용하던 채팅창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권성하의 얼굴에 아주 잠깐 후회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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