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7화 (17/96)

#17

권성하를 처음 본 건 전에 몇 번 갔었던 일식집에서였다.

한국에 있는 유명한 철판요릿집, 그곳에 아버지께서 유독 마음에 들어 하시던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이 어엿한 사장이 되어 시카고에 규모가 큰 식당을 차렸고, 아버지가 시카고로 출장 오셨을 때 따라서 간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어머니가 왔을 때 함께 간 적 있었지만,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기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색다른 요리를 먹고 싶다는 여자친구의 요구에 마침 그곳이 생각났고, 처음에는 평범하게 예약을 하려 했었다. 그런데 늘 특별한 대접만 받아온 여자친구에게 남들과 함께 테이블을 사용하는 것이 성에 찰 리 없었다.

‘그럼 다른 데 가.’

‘싫어. 거기 가보고 싶어. 엄청 맛있다며. 지난번에 아줌마가 그러셨어.’

다른 식당에 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언제 또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어떻게든 그곳에 가길 바랐다. 자신이 뉴욕에서 시카고까지 왔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주냐는 원망을 이틀 동안 듣다가 결국 마지못해 직접 사장님께 전화해 부탁을 드렸다.

밤 10시 넘어 철판요리라니.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날은 상대가 꾸물거리는 통에 예약 시간을 맞추지도 못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민폐였다.

당연한 거겠지만, 사장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 뒤로 조용히 웃고 있는 사람이 권성하였다.

인상 끝내주네.

권성하의 첫인상은 그랬다.

한여름인데도 지나치게 하얀 얼굴에 말간 눈동자. 잔뜩 내려간 눈꼬리에는 웃을 때마다 잔주름이 졌다.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아직도 젖살이 덜 빠진 고등학생 같았다.

뛰어나게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자꾸만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선한 눈으로 한번 웃기만 해도 홀딱 넘어갈 법한.

권성하는 그런 외모로 센스까지 있었다. 사전에 교육이 잘됐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필요한 걸 미리 가져다주는 것 외에도 적당히 눈치를 봐 가며 테이블을 정리할 줄 알았다. 더러운 걸 절대 보지 못하는 내가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

‘직원이 일을 잘하네요.’

‘그렇죠? 근데 파트타임으로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학생입니다.’

최소 반년은 지났을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이라니.

‘혹시 아는 애야?’

‘누구.’

‘아까 그 서빙하던 직원.’

‘아니, 왜.’

‘좀 신경 쓰는 것 같길래. 네가 그러는 거 드물잖아. 혼자 남아 있냐고 묻지 않았어? 그런 말 잘 안 하면서.’

몰랐었는데 뒤늦게 여자친구의 말을 듣고 알았다. 내가 한낱 식당 파트타임 직원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정말 나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친구가 되어서.

“너 안 나와서 성하 아직 앉지도 못했잖냐. 너한테 인사 못 했다고.”

내가 초대를 한 것도 아니고, 굳이 집주인인 내가 없어도 형들과 다 아는 사이라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대충 소파에 앉아 같이 게임이나 하면 될 텐데 상대는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 그뿐 아니라 보통 처음 온 사람들은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거나 신기한 게 많다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런 짓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권성하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은 얼마 전에 마련한 작은 아이스 메이커였다.

“이런 것도 있어?”

“어. 하도 많이 먹어서 샀어.”

“진짜 안 어울린다.”

마냥 조심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솔직했다. 나처럼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은 아니지만, 묻는 말에 잘 대답하는 거로 보아 낯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필요 없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우리 가게, 왔었던 거 맞지?”

권성하는 보자마자 했을 법한 질문을 한참 후에야 물었다.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척해도 되었을 텐데.

“글렌뷰에 있는 일식집 말하는 거지? 어. 맞아.”

당연히 사장과의 관계라든가 영업시간이 아닌데 예약을 잡은 이유 따위를 물을 줄 알았다. 하지만 권성하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완전 다른 것이었다.

“그때 같이 온 사람이 여자친구?”

“어.”

“예쁘더라. 잘 어울려.”

상대가 곤란해할 만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는 건가.

다시 만난 권성하는 흥미로웠다.

지금껏 만나 온 사람들과는 확실히 어딘가 달랐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현 형이 말했던 대로 예의 바르고, 좀 어른스럽고, 또 말도 성격도 바르다는 말이 정확했다. 욕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남에게 폐도 끼치지 않는. 단순히 틀린 일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올바르다는 것이 맞았다.

권성하는 조금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의외의 부분은 가지고 있을 텐데 그에겐 뜻밖의 점이 전혀 없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나 예상은 아주 간단하게 무너지기 마련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던 게 흔들릴 정도로 보이는 것 그대로였다.

얼굴도 바르고. 성격도 바르고.

결론은,

권성하는 이상하다.

그냥 모든 게 전부.

처음에는 무덤덤한 표정 뒤에 숨겨진 얼굴이 궁금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왠지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찍 포기했다. 그저 착한 척하는 거라고 보기엔 너무 습관처럼 배어 있는 행동들. 바른말만 하고 옳은 행동만 하는 권성하.

여전히 귀찮은 인간관계는 싫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감정 낭비도, 시간 낭비도 할 필요 없는 편한 친구 관계.

유일했던 인간관계를 하나 더 늘려보고 싶었다.

* * *

시험을 앞둔 일요일 오전.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야 올 줄 알았던 권성하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생각보다 이른 오후 1시쯤이었다.

“일찍 왔네. 어제 새벽에 잔 거 아냐?”

피곤함으로 눈 밑이 거뭇거뭇해져 하얀 얼굴이 유독 퀭해 보였다.

“해 뜨고 잤어. 그래서 두 시까지는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0시 넘으니까 잠이 안 와서.”

“잠 안 오는 얼굴이 아닌데.”

조금 일찍 출발해도 괜찮냐는 문자가 왔길래 알겠다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말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여기까지 운전해서 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일요일인데 더 자지. 며칠 연속으로 일했던 거 아냐?”

“일은 했는데 공부는 못했더니 걱정돼서 잠이 안 오더라.”

“해 뜰 때까지는 뭐 했는데.”

“책 좀 보긴 했는데 아직도 할 게 너무 많다. 하루도 안 남았는데.”

“하긴 내일이랬지.”

“아, 이거.”

새하얀 손이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겉면에는 익숙한 상호명이 적혀있었다.

“일부러 갔다 왔어?”

“어차피 오는 길이라서.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내가 좋아하는 거로 해 달랬어. 우리 가게는 초밥보다 사실 롤이 더 맛있거든. 롤도 괜찮지?”

“어.”

곧바로 식탁 위로 가져가 봉투에 담긴 음식들을 꺼냈다. 큰 도시락 상자에 알록달록한 날치알이 올려진 롤과 튀김가루가 위에 잔뜩 뿌려진 화려한 롤이 담겨있었다. 그것만으로 끝일 줄 알았는데 아래에 같은 도시락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밑에 건 내가 참치 들어간 거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셰프님이 먹어보라고 해주셨어. 그리고 이거, 아보카도 올려진 것도 맛있어.”

“잘 먹을게. 고마워.”

그저 툭 내뱉은 말에 권성하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의외라서.”

“뭐가?”

“고맙다고 할 줄은 몰랐거든.”

이번에 놀란 사람은 나였다. 점심을 사 왔으니 잘 먹겠다고 하는 것도,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데 어째서 의외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인사를 쉽게 하는 성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대체 나를 어떻게 봤길래.

어이가 없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권성하는 민망한 듯 일부러 말을 돌렸다.

“튀김가루 눅눅해지기 전에 얼른 먹자.”

아침엔 간단히 셰이크만 먹고 운동까지 하는 바람에 마침 배가 고파올 때였다. 허기 앞에서 따질 마음이 들지 않아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은 전부 다 맛있었다. 솔직히 놀랄 만큼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번 식당에서 먹었던 초밥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만큼 평범했는데 롤은 상당히 괜찮았다. 내 반응을 살피던 권성하는 내가 잘 먹는 걸 보고서야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설마 이걸로 신세 갚았다고 하는 건 아니지?”

우리 나이에 실제로 신세 진다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처음 권성하가 신세 진 걸 갚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웃었었다. 사실 진지하게 받아칠 마음이 없어 계속 말을 돌렸는데 권성하는 꿋꿋이 신세 진 걸 갚겠다고 했었다.

“맞는데.”

“그럼 술은?”

“그건 그때 가서 또 갚을게. 아무래도 오늘도 신세 져야 할 것 같은데.”

어젯밤 먼저 문자를 보내 오늘 오라고 제안을 한 사람은 나였다. 그렇기에 신세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또 빚을 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카고에 오자마자 여기서 일한 거야?”

“어.”

“그럼 진짜 얼마 안 됐네.”

“이제 두 달 좀 넘었어.”

“집이 그 근처?”

“맞아.”

“학교가 다운타운인데 꽤 먼 데 구했네.”

별 뜻 없이 건넨 말에 선명했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무심한 듯 툭, 말을 뱉었다.

“복잡한 거 싫어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권성하는 거짓말을 잘한다.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의외인 부분을 드디어 찾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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