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4화 (14/96)

#14

3. 이유

권성하

다시 돌아온 수요일, 나는 지금 매우 궁금한 게 생겼다.

대체 이유가 뭘까.

“여기 좀 추운데.”

네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가.

“주문하고 올게.”

강세현은 이 밤에도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구는 퀭한 얼굴을 가리려고 모자를 쓰고도 그 위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혼자만 훤칠한 얼굴을 드러내며 도넛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떡하니 옆 테이블을 붙여 가방을 내려놓곤 물었다.

“커피 한 잔 더 마실래? 아니면 다른 거 뭐.”

슬쩍 내 자리를 쳐다본 강세현은 턱으로 한쪽에 놓여있는 트레이를 가리켰다. 이미 진즉에 내용물이 사라진 종잇조각에는 빵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커피랑 크루아상. 크루아상은 전자레인지에 10초만 돌려달라고 해.”

뻔뻔한 부탁을 했다. 다 식어버린 커피는 아직 1/3이나 남아 있었지만 뜨거운 게 마시고 싶었고,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조금 전 빵 하나를 다 먹고도 금세 배가 고팠다. 내가 가서 주문을 할 수도 있었지만, 겨우 탄력받아 집중력을 끌어올린 참에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바로 다음 주가 시험이었다. 기현 형의 말대로 이번 주가 되자 모두가 잠적했다. 하루에도 메시지가 몇백 개씩 올라오던 단체 채팅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점심을 함께 먹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기현 형에게서 도서관에 있을 거니까 공부할 거면 언제든지 오라는 메시지가 올라온 적 있으나 그것 말고는 없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캠퍼스 전체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하는 교수들도,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녁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이 많아졌고, 지난주부터 24시간 운영되는 도서관은 새벽까지 많은 학생으로 북적였다.

월요일에는 형들이 추천한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며 잠을 이겨냈다.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집중하기 좋았지만, 문제는 자리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먼저 자리 잡은 형들이 늦게 끝나는 나를 위해 자리를 맡아 주긴 했지만 잠깐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우는 것도 눈치가 보일 만큼 자리싸움이 치열한데 오늘도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학교 근처에 있는 이 도넛 가게였다.

학교 근처에 24시간 카페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새벽에도 음식이 제공되는 곳이 대부분이라 그런 곳에서는 오랫동안 있는 게 힘들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조금 괜찮다 싶은 곳은 이미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 군데서 퇴짜를 맞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운 좋게 발견한 곳이 이곳이었다. 피곤해서 마실 걸 사러 들어왔다가 생각보다 조용한 분위기와 깨끗한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실내가 조금 춥다는 점을 빼고는 다 괜찮아서 자리를 잡고 나니 밤늦게 찾아오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다. 비밀 같은 공간을 이전에도 이용한 적이 있는지 모두 두꺼운 전공 책을 끼고 들어와 조용히 공부했다.

탁.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자 강세현이 정확히 내 대각선에 앉았다. 커다란 손이 커피와 빵을 내 앞자리에 내려놓았다.

“땡큐.”

커피 한 모금을 홀짝였다. 고소한 버터 향이 코를 간질였지만 지금은 허기보다 공부가 우선이었다. 책에서 눈도 떼지 못하고 같은 페이지를 한참 동안 보고 있는데 앞에서 툭,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할 때 먹어.”

와.

고작 말 한마디에 겨우 끌어 올린 집중력이 여기저기로 흐트러져버렸다. 전에도 느꼈었지만 참 목소리 좋다. 저 좋은 목소리로 저런 다정한 말을 뱉는데 말투가 어떻든 무슨 상관일까.

살다 살다 이제는 남자한테도 설레는구나, 꽤 충격받을 만도 한데 그 상대가 강세현이라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결국, 책에서 눈을 떼고 따끈따끈한 크루아상을 손에 들었다. 내가 텅 빈 뱃속을 메우는 동안 강세현은 가지고 온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내 집중력은 다 망가트려 놓고.

앞에서 대놓고 잘난 얼굴을 구경했다. 옆에 앉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마주 본 적은 없었다. 턱을 괸 채 삐뚜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또 어찌나 얄미운지. 과연 강세현이 저 얼굴을 준 부모님께 감사하다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왜.”

내 시선을 느낀 강세현이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눈을 추켜올렸다.

“뭐 공부하나 해서.”

“너랑 비슷할걸.”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강세현의 전공이 경영 쪽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갑자기 왜 보냐는 질문에 너는 왜 뜬금없이 이리로 온 거냐고 물을 수 없어 순간 떠오르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대체 강세현은 밤 11시 반에 왜 여기까지 온 걸까.

쉽게 생각하면 공부를 하기 위해 왔겠지. 그런데 굳이?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이 자동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연락을 했을 때만 해도 강세현은 분명 학교에 있었으니까.

강세현: [어디?]

나: [학교 근처. 너는?]

강세현: [학교]

나: [설마 아직 안 끝났을 리는 없고. 너도 시험공부?]

강세현: [어]

강세현: [형들은 도서관이라던데]

나: [사람 많아서 그냥 학교 근처 카페로 왔어]

강세현: [그쪽으로 갈게]

강세현: [주소]

강세현은 내가 주소를 보낸 지 40분 만에 왔다.

우리 대학에서 강세현의 집까지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거기서 강세현의 대학까지 또 15분이 걸렸다. 도합 30분은 걸리는 거니까 내게 주소를 받고 거의 바로 출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도 아니고, 본인이 다니는 학교에서 정반대 방향에 있는 여기까지 굳이 왜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귀찮지도 않나. 같이 공부할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위장이 차는 대신 두 손이 텅 비었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제는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시 모아야 할 때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새벽이 되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월요일에 밤을 새우고 어제는 일까지 했으니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였다. 멍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어떻게든 지금은 잠을 좀 쫓아야 할 것 같았다. 담배라도 피우고 올까.

“한 대 피울래?”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강세현이었다. 순간 내가 말한 줄로만 알았다.

“잠도 깰 겸 나갔다 오자. 어차피 밖에서 보이니까 중요한 것만 챙겨. 하던 건 그냥 두고.”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너네도 시험 다음 주야?”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늘 형들과 함께 있었더니 강세현이 다른 대학이라는 걸 간혹 잊어버렸다.

“어. 다음 주부터 시작해서 그다음 주에 끝나.”

“기네. 보통 한 주에 다 끝나잖아.”

“하나가 그다음 주 화요일에 있어.”

“그렇구나.”

“너는.”

언제 끝나는지를 묻는 건가.

“난 다음 주 금요일. 다른 수업은 월요일이랑 화요일에 몰려 있는데 하나가 금요일이야.”

“주말에 고생하겠네.”

지금 문제는 주말이 아니라 당장 내일과 금요일이었다. 주말엔 그나마 수업이 없어 다행이지만 내일은 수업과 일이 동시에 있는 날이었다. 이틀만 버티면 토요일 오전엔 잠을 좀 잘 수 있고 일요일엔 종일 공부를 할 수 있는데 그 전 이틀이 걱정이었다.

역시 밤을 새우는 건 오버였나.

잠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자신했는데, 고작 월요일 하룻밤을 새운 것 가지고 오늘까지 힘들었다.

‘슬슬 과제도 많아지고 좀 있으면 중간고사 기간 오는 거 알지?’

‘알고 있어요.’

‘일하고, 공부하고, 그다음 날 그 먼 데서 학교까지 오는 것도 힘들겠다.’

‘어쩔 수 없죠, 뭐.’

‘정 힘들면 기숙사에서 자. 내 방에서 언제든지 재워 줄게. 꼭 시험 기간 아니라도 아무 때나.’

미리 재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왠지 이 상태라면 오늘까지 밤을 새우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길어봤자 두세 시간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출발해서 새벽 4, 5시에 집에 도착해봤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현 형이 했던 달콤한 제안이 더 생각났다.

뒤늦게 형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시계가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늦어서 도저히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선택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끝까지 버티거나, 혹은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자는 것.

“언제까지 할 거야?”

그렇게 묻는 강세현은 나와는 달리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일단 두세 시간은 더 해야지.”

“그럼 자리 옮겨.”

“어디로?”

고생스럽게 돌아다니다 겨우 찾은 곳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 근처는 나보다 강세현이 더 잘 알 것 같아서 그가 가자는 곳으로 옮겨도 상관없었다. 분명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세현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가 나왔다.

“우리 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