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하루에도 몇 번씩 거론되는 주인공도 이번 주 토요일 모임에 오려는 모양인지 형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고, 참석하지 못하는 나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보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새 15분밖에 남지 않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기현 형이 담배나 한 대 같이 피우고 가라며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테리아 뒤쪽에 있는 흡연 구역은 처음인데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 너 일요일은 일 안 하네?”
기현 형이 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네.”
“그러면 일요일에 뭐해? 혹시 다른 약속 있어?”
갑자기 왜 일요일 일정을 묻나 했더니 형이 궁금해하는 건 일요일 저녁이 아니라 오전 일정이었다.
“아니요. 일요일엔 따로 약속 없어요.”
“그러면 토요일 날 어차피 좀 늦게 만날 거니까 괜찮으면 일 끝나고라도 와라.”
“기숙사로요?”
“아니, 기숙사는 아닌데 여기서 멀진 않아. 다운타운 안에 있는 데라서.”
“뭐 하는 건데요? 술 마셔요?”
아예 간다는 선택권이 없었을 때는 묻지 않았으나 이제는 갈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생겼기에 곧바로 물었다.
“왜? 술 마시고 싶어?”
“아니요. 저 나이 안 돼요.”
생일이 빠른 형들은 전부 올해 21살이 되었다고 했으니 마실 수 있는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1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형이 갑자기 입을 벌리는 바람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질 뻔했다.
“와, 내가 이런 말을 또 들을 줄이야. 너 그럼 지금까지 한 번도 마신 적 없어? ”
“네.”
“누가 사 준다고 한 적도 없었고?”
“있었는데 됐다고 했어요.”
“왜? 술 싫어해?”
“마셔보질 않아서 싫어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지금 마셔봤자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마셔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마시면 안 되는데 마시는 거니까 찝찝해요. 죄짓는 거잖아요.”
뉴욕에 있을 때도 술을 권하는 사람은 꽤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마셔볼 수 있지만, 그 누군가가 나는 아니었다. 한국으로 치면 마실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나 지금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술을 마시는 순간 죄짓는 기분이 밀려올 것 같았다. 설사 술이 엄청나게 맛있더라도 좋은 감정과 함께 찝찝한 기분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데 두 가지 감정은 절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나를 보며 답답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였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기현 형은 대뜸 ‘완전 똑같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요?”
“아니다. 어쨌든 술은 마시고 싶은 사람이나 마시고 안 마실 사람은 안 마셔도 돼. 꼭 마시라고 안 해. 딱히 뭘 하는 자리도 아니고 그냥 모여서 카드 게임이나 하고 그럴 거야. 게임 싫으면 영화 같은 거 봐도 되고.”
“영화를 본다고요? 그럴 수 있는 곳이에요?”
“어. 아, 말 안 했구나. 모이는 장소가 세현이 집이거든.”
하나 더 추가.
아직 만나지도 못한 내 친구는 다운타운 어딘가에 산다.
“근데 남의 집인데 저도 막 가도 돼요?”
“넌 괜찮아. 미리 말해 뒀어.”
형은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듯 뿌듯해했다. 아직 가겠다고 확실히 말한 것도 아닌데 이미 나를 데려간 사람처럼.
“일단 상황 좀 보고 말해줄게요. 그날 늦게 끝날 수도 있어서요. 주말이라.”
거절할 핑계로 한 말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예약 손님이 늦게 온다면 정말 늦게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알려줘.”
그렇게 말한 기현 형은 긴 장초를 껐다. 시끌시끌한 소리와 함께 학생 대여섯 명이 동시에 나오는 걸 보고 우리는 곧장 다시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갔다.
* * *
늦게 끝날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여느 다른 주말처럼 바쁜 건 여전했지만, 마지막 예약팀이 10시에 들어왔고 11시가 조금 지났을 때 모든 일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9월에 접어들고부터 확실히 더위가 한층 사라졌다. 중반에 들어서자 여전히 낮에는 조금 후덥지근하지만, 해가 떨어진 밤에는 그래도 선선함을 넘어 제법 쌀쌀했다. 그러고 보면 참 안 갈 것 같던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셈이었다.
시카고 겨울은 뉴욕보다 더 춥다던데.
눈 깜짝할 새 가을이 되었으니 또 갑자기 다가올 겨울이 문득 궁금해졌다.
시동을 걸어놓고 운전대를 잡기 전,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꽤 여러 번 신호가 가고 한참 후에야 상대는 전화를 받았다.
- 어, 끝났어?
평소보다 한 톤은 더 높아진 기현 형의 목소리 뒤로 시끌시끌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네. 지금 끝났어요.”
- 어떻게 할 거야? 우리도 온 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됐어.
“집에 들러야 하는데, 갔다가 가도 돼요?”
- 어. 되지 그럼. 문자로 주소 찍어줄게. 이따 보자.
통화가 끝나고 얼마 뒤,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영어로 된 긴 주소 아래 도착하면 입구에서 호수를 말하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서부터 옷을 주섬주섬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작은 욕조가 딸린 비좁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옷장 앞을 서성였다.
뭘 입어야 하지.
최근에는 거의 매일이라고 할 만큼 자주 캠퍼스에서 보던 사람들이었다. 후줄근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계속 봐오던 사람들 앞에 대놓고 멋을 부린 것처럼 나타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가 아닌 곳에서 모인다는데 이미 봤던 차림으로 가기도 참 애매했다.
오랜 고민 끝에 엄마가 한국에서 사 주셨던 셔츠를 손에 쥐었다가, 결국 소라가 시카고에 오기 전 선물한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거기에 청바지를 입고 나니 나름 처음 입는 새 옷인데도 학교에 가는 차림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봤던 옷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더 고민하기 전에 덜 마른 머리를 털고 집에서 나왔다. 소매가 길어서 일부러 재킷을 걸치지 않았더니 살결에 찬 기운이 닿았다.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도 첫 외출이라는 이유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차가 전혀 막히지 않는 도로를 달렸다. 매일 한 시간이 넘던 거리가 고작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심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보내준 주소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건물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매일 아침 학교로 가는 길에 수십 번은 보았던 건물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여러 개의 고층 건물 중 외관이 무척 독특해서 수많은 오피스 건물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건물이었다.
매번 볼 때마다 저런 곳에 사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했었는데.
[실례합니다.]
주차 표시가 되어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하자 입구에서 관리인이 길을 막아섰다. 어디를 찾아왔냐는 물음에 형이 알려준 호수를 말하자 잠깐 기다리라 말하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뒤늦게 미리 형에게 전화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어 어쩔 수 없었다.
[차 열쇠 두시고 저쪽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통화를 마친 관리인은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시동을 걸어놓은 채 차에서 내렸지만 뒤늦게 얼떨떨한 기분이 밀려왔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좁은 땅에 건물을 높게 지으려다 보니 다운타운 안은 어딜 가나 주차 전쟁이었다. 하물며 같은 오피스텔이라도 차가 있다는 이유로 주차비만 한 달에 400불을 더 내야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 금액을 내고도 지하 여러 층까지 연결된 주차장을 구석구석 헤집으며 빈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아예 발렛 주차을 제공한다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놀라웠다.
입구에서 다시 한번 기현 형의 번호를 눌렀다.
- 도착했어?
“네. 지금 1층 입구에 있어요.”
- 안으로 들어와도 돼. 엘리베이터 있는 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금방 내려갈게.
그렇게 말한 상대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 세현아- 하고 집주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난 것은 오 분쯤 지나서였다.
“성하야!”
두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타고 있던 기현 형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히죽대고 있었다. 양쪽 볼과 목 주위가 벌게져 있었다.
“얼른 타.”
기현 형이 너무 눈에 띄어 옆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뒤늦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기재 형이었다.
“형은 술 안 마셨어요?”
“누구? 나?”
“네.”
“어. 나도 막 왔어. 원래 많이 마시지도 않고.”
“형은 왜 지금 왔어요?”
“여자친구 만나느라.”
“여자친구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없을 거라 믿었던 건지 형의 대답은 매우 의외였다.
“어. 나만 있어. 우리 중에.”
“아니야. 세현이도 있어.”
“아, 맞다. 맨날 까먹네.”
띵-.
몇 마디 말이 오간 사이 엘리베이터가 24층에 도착했다. 특이했던 건물의 외관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여느 다른 오피스텔처럼 긴 복도가 늘어진 형태였는데, 그나마 다른 것은 이 넓은 층에 문이 고작 4개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기현 형이 그중 하나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라 제이슨 형이었다.
“요-”
나는 발을 내딛는 순간 속으로 평범하다는 말을 취소했다. 오히려 밖보다 안이 훨씬 더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도심지 중심에 이렇게 넓은 오피스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한쪽 벽이 전부 뻥 뚫린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을 통해 다운타운의 화려한 야경과 조명이 한눈에 보였다. 아찔한 아래가 훤히 보이는데도 무섭긴커녕 아름답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내가 잠깐이나마 찾아보았던 좁아터진 오피스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세현이는 어딨어?”
기현 형은 들어가자마자 거실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세현이? 세현아. 잠깐 와 봐라. 네 친구 왔다.”
친구 왔다는 소리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매일 이야기를 듣던 나야 그렇다 치고 상대는 나에 대해 들은 것도 없을 텐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랑 친구 하라는 소리가 얼마나 황당할까.
“뭐야, 왜 안 와. 얘 어디 있는데?”
“응? 좀 전에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 통화 중일 거야. 또 시작하는 듯.”
“대단하다. 지겹지도 않나.”
형들은 저들끼리 아는 말을 주고받았다. 정확히 뭘 시작하고 지겨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집주인이 지금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거실 바닥에 앉아 게임기를 두드리던 준성 형과 정우 형이 동시에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지만, 주인에게 인사도 없이 함부로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다들 괜찮다고 해도 그건 내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한쪽 벽에 엉성하게 기댄 채 형들이 하는 게임을 멀뚱히 구경하고 있는데 몇 분쯤 지났을까, 안쪽 문이 열렸다. 불편하게 서 있는 나보다 더 불편하게 눈치를 보던 기현 형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강세현.”
“아. 미안. 통화하느라-”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름 세글자와 목소리.
고개를 드는 순간, 머릿속으로만 간직해야 할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 300불이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