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7화 (7/96)

#07

“얘가 내 룸메이트.”

“안녕하세요.”

“네가 성하구나. 반갑다. 난 임정우. 정신없지?”

그는 생긴 것도 그렇지만 지금껏 인사를 나눈 사람 중 제일 정상이었다.

“괜찮아요.”

“넌 기현이한테 얘기 들은 그대로네.”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괜찮아 보이는 후배 한 명 있다고. 쟤가 좀 모자라 보여도 사람은 잘 보거든.”

모두에게 좀 모자라 보이는 기현 형은 그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상했지만, 기현 형은 누굴 잘 챙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본인 나름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려 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그냥 본인이 놀기 바빴다.

다행히 나머지 사람들 역시 기현 형만큼이나 성격이 밝아 어색함 없이 대해 주었고 낯가림이 없는 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전공이 경영이라며. 나도 경영이야. 궁금한 거 있으면 앞으로 물어봐. 교수나 과제 같은 거.”

“이번 학기는 이미 늦은 것 같고, 다음에 꼭 물어볼게요.”

“큭큭, 그래. 가르쳐줘도 실패한 사람 저기 있다.”

정우 형은 기현 형을 보며 웃었지만, 따지고 보면 기현 형이 다른 강의 수강 신청에 실패하는 바람에 형을 알게 된 셈이어서 내겐 그게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다들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알았어요?”

“아. 기현이랑 저기 두 사람,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은 중학교 때부터 알았어. 제이슨은 하이스쿨 때 만났고 나머지는 대학 와서 친해진 거고.”

정우 형은 처음에 봤던 두 사람을 가리켰다.

“신기하네요. 대학까지 같이 오다니.”

“시카고에 쭉 산 사람한테는 제일 만만한 대학이기도 했고, 다들 SAT나 학교 성적도 고만고만했어. 똑같이 놀고 똑같이 공부하는 데 그게 어디 가냐.”

“그래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아무래도 쭉 친한 사람 있으면 학교 다니기 편하니까. 근데 그 와중에 좋은 대학 가겠다고 신청서 넣었다가 떨어진 사람도 있어.”

“누군데요?”

“누구겠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기현 형이 사람 좋은 얼굴로 헤실거리고 있었다.

“서기현 저거 완전 제 성격 믿고 자기는 어디를 가나 친구 사귈 수 있다고 깝쳤는데 결국 다른 대학 다 떨어져서 못 갔잖아.”

“그런데 기현 형이라면 그럴 것 같긴 해요. 사교성 좋으니까.”

나는 조금 전까지 기현 형을 의심했다는 말은 쏙 빼놓고 대답했다.

“그래. 그건 나도 인정. 아마 생판 모르는 데 던져놔도 한 달이면 친구 백 명은 만들걸.”

“맞아요.”

“하…. 문제는 정작 걱정되는 놈이 다른 대학 붙어서…….”

“네?”

“아. 여기 있는 애들 말고 또 한 명 있거든. 이렇게 자주 모이는 애. 혼자 다른 학교 다녀.”

“뭐야, 세현이 얘기하냐?”

“어? 세현이 왜.”

불과 몇 초 전까지 정신없이 떠들던 사람들이 대체 그 말은 어떻게 들은 건지 금세 정우 형과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 성하가 우리 다 원래 알던 사이냐고 묻길래 얘기하다가 말이 나왔어. 우리 다 같은 대학인데 혼자 다르잖아.”

“그래. 우리 버리고 혼자 좋은 대학 간 놈 있어. 나는 떨어진 곳.”

“안 그래도 차라리 네가 붙지, 제일 걱정되는 놈이 다른 대학 됐다는 얘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걔는…… 그래, 존나 걱정되긴 해. 내가 웬만해서 누굴 걱정 안 하는데 걔는 좀 걱정돼.”

“왜요?”

“그거거든. 맨날 혼자 노는 애.”

“야. 우리가 같이 놀아주는데 왜 혼자 놀아.”

“아니야. 걔는 우리랑 있는데도 혼자 놀아.”

“음, 존나…… 맞는 말이야.”

아웃사이더는 기현 형이 아니라 그 세현이란 사람이었나보다.

“우리끼리 졸업할 때도 버려진 강아지 같았는데 설마 다른 대학 가 버릴지 누가 알았냐.”

“졸업도 따로 했어요?”

“어? 어. 걘 우리보다 어려. 성하 너랑 동갑이야.”

“아. 그렇구나…….”

“어쨌든 곧 만나게 될 거니까 너도 보면 알 거야. 보면 좀 잘해 줘라. 걔 까탈스러워서 친한 사람 우리밖에 없거든. 아마 동갑은 네가 처음일걸? 친구 하면 되겠다.”

“다른 학교라면서요.”

“근데 자주 와.”

“우리랑 어울리다 보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거다.”

일단 내가 앞으로 자주 어울린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임을 깨닫고 그저 웃었다. 세현이라는 사람이 자주와도 내가 자주 오지 않으면 절대 볼 일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야, 서기현. 너 앞으로 성하한테 잘해. 쟤가 우리랑 안 어울려 줄 수도 있잖아.”

“왜 안 어울려줘?! 내가 얼마나 잘해 주는데.”

“잘해 주기는……. 안 봐도 뻔한데. 성하한테 잘해서 세현이 친구 만들기 동참해라. 알겠냐? 잘해, 좀. 성하야. 부탁한다.”

이번에도 나는 그저 대답 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대학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

“안녕하세요.”

“나 기억나지? 그때 기현이 방에서 봤는데.”

“네. 태진이 형…… 맞죠.”

“오. 너 기억력 진짜 좋다. 맞아, 맞아. 여기는 인사해. 내 친구.”

기현 형 한 사람을 알았을 뿐인데 그를 통해 다른 몇몇 사람들을 소개받았고, 그 몇몇 사람들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또 자신과 함께 있는 지인을 소개하곤 했다. 단 2주 만에 캠퍼스에서 인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연히 감사해야 할 부분인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세현이 친구’라는 말이 떠올라 왠지 모를 책임감이 묵직하게 밀려왔다.

그리고…….

드르륵-

서기현: [어디냐]

서기현: [점심 안 먹???]

박준성: [카페테리아]

서기현: [ㅅㅂ]

서기현: [의리업ㄱ어]

장기재: [ㅋㅋㅋ]

장기재: [우리도 방금옴]

임정우: [나도 가는중 성하는]

이럴 때는 답장을 해야 하나.

전부 따로 연락처를 알려줬는데 어째서인지 그다음 날 연락하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단체 채팅창에 초대를 받았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던 네 명과 제이슨 형이 포함된 채팅창은 시도 때도 없이 글이 올라왔다.

다음 강의까지 정확히 50분이 남아있었다. 거기다 다음 강의실은 중앙 건물 바로 근처. 일부러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피해 먹으려 했지만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권성하: [지금 갈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몇 주 전 소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빨리 아는 사람이 생겨야 점심도 같이 먹고 그럴 텐데.’

그녀의 바람대로 이제 점심을 혼자 먹지 않아도 되는데 이게 과연 100% 자의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 * *

예상대로 카페테리아에는 사람이 많았다. 빨리 먹고 빨리 떠나가는 학생이 대부분이라서 한두 자리는 잘 비었지만, 테이블이 통째로 비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형들은 창가 쪽 넓은 테이블에 용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른 캠퍼스에 있는 제이슨 형을 빼면 나까지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데 열 명은 앉을 만큼 넓은 테이블이었다.

“왔냐.”

기현 형은 햄버거 두 개와 감자튀김을 쌓아놓고 손바닥만 한 치킨을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단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그게 다야? 뭔데, BLT?”

“그릴드 치킨이요.”

“헐. 너 운동하냐?”

“아니요.”

“근데 왜 그것밖에 안 먹어?”

“네가 너무 많이 먹는 거야, 미친놈아.”

나보다 한 박자 뒤늦게 도착한 정우 형은 호밀빵으로 된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앞에 내려놓았다.

“뭐야. 넌 또 관리하냐?”

“어. 다음 주 촬영이야.”

“불쌍한 새끼.”

“돈 버는 건데 뭐가 불쌍해.”

“저렇게 먹고 돈 받는 거면 난 절대 안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넌 못하는 거고.”

고작 일주일 만에 몇 가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정우 형이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브랜드 모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르고 키가 커서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꽤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전공을 경영으로 선택한 의미가 전혀 없어졌지만 일단 졸업은 하고 싶다며 그대로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제이슨 형이 고등학교 때 네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전혀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준성 형과 기재 형, 두 사람의 전공이 의학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단연 최고는 기현 형이 대학에 온 후 전보다 훨씬 얌전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아, 맞아. 성하 너 토요일에도 일하냐?”

“네.”

“몇 시까지 하는데?”

“똑같아요. 11시에 끝나요.”

“아씨……. 너무 늦네.”

뭐 하냐고 묻는 건 분명 상대가 나와 무언가 함께 하기 위함을 알고 있지만, 어떤 약속인지, 무슨 일인지 일부러 묻지 않았다.

“성하 너 무슨 일 하는데?”

마지막에 소스를 잘못 선택했는지 샌드위치 맛이 어딘지 모르게 오묘했다. 맛을 알 수 없는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기재 형이 대뜸 나를 보며 물었다. 기현 형이 그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도 한꺼번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일식당에서 서빙해요.”

“주중에도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주중에 이틀하고 금, 토. 이렇게 4일이요.”

“안 힘드냐?”

딱히 힘들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더니 딱 3주만 더 기다려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슬슬 과제도 많아질 텐데 중간고사 기간 되면 진짜 빡셀걸? 몇 주 안 남은 거 알지?”

“알고 있어요.”

“일하고, 공부하고, 그다음 날 그 먼 데서 학교까지 오는 것도 힘들겠다.”

“어쩔 수 없죠, 뭐.”

“정 힘들면 기숙사에서 자. 내 방에서 언제든지 재워줄게. 꼭 시험 기간 아니라도 아무 때나.”

“넌 방이나 치우고 그 소리를 해라.”

지난번에 슬쩍 보았던 기현 형의 방이 생각났다. 깨끗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심할 거라고는…… 어쩌면 형이 패션에 신경 못 쓰는 이유는 그냥 옷을 못 찾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토요일에 어차피 세현이도 좀 늦게 만나자고 하던데.”

“왜.”

“저녁에 과제 해야 한대.”

“낮엔 뭐하고?”

“걔 요즘 가끔 레이크 가잖아. 무슨 요트에서 일한다고.”

“아-아. 진짜 심심해서 일하는 미친놈도 있었네.”

이제는 세현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익숙했다. 거기다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하도 이야기를 들은 탓에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기억하게 됐다.

나와 동갑.

다른 대학.

말이 없고 무뚝뚝한 성격.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대할 때의 온도 차이가 큰 편.

지인조차 잘 만들지 않지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공부 잘함. 뉴욕에 사는 여자친구가 있음.

그리고 방금 알게 된 사실 하나 더.

- 심심해서 일하는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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