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136)

<136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원의 시야에서는 문 쪽이 보이지가 않아서

누가 왔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누가 온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해하는데, 멀리서 아

주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아!”

아침부터 불쑥 찾아온 손님은 도하였다.

아침부터 저와 도겸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

어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더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도하가 아침부터 아빠 보고 싶다고 난리라…….”

“괜찮습니다. 어젯밤은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서원의 엄마가 미안하다는 듯 하는 말에, 도겸이 은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시간에 봐 준 것만 해도 너무나도 감사하다는 반응이었다.

도하와 엄마가 와 있는데, 서원이 침대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원이

근육통을 견뎌 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나오자, 도하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서원을 바라봤다.

“아빠!”

“도하야.”

서원이 허리를 굽혀 도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를 안아 들어 올리니 허리가 찌르르 울렸지만, 도하와 엄마의 앞에서 정

사의 후유증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안아 주려고 했는데, 도겸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제 품에서 도하를 앗아갔다. 순식간에 빼앗기니, 솜사탕을 물에 씻어 버린 너

구리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안을게.”

서원이 도겸을 멀뚱멀뚱 쳐다보니, 그가 익숙하게 도하를 품에 안고 팔로 궁

둥이를 받치며 말했다. 그러자 도하가 익숙하게 한쪽 손으로 도겸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 도겸이 도하를 안는 경우가 더 많긴 한데, 오늘은 제 몸 상태가 더 신경

쓰여서 저러는 거겠지.

그렇게 걱정이 되면 어젯밤에 좀 봐주지. 서원은 황당하게 웃으며 도겸을 바

라보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도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하는 어린이라 그런지 볼살이 유난히 말랑말랑하고 통통했다. 만지면 촉감

이 몽실몽실한 찰떡이랑 비슷했다. 열이 많아서 동그란 뺨에 홍조가 올라온

것도 귀여웠다. 서원은 그런 도하의 뺨에 입술을 부드럽게 맞췄다 떨어트렸

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에 할머니랑 잘 잤어?”

“웅. 좋았어! 할머니가 동화책도 읽어 주셨어.”

“그랬어?”

“응!”

도하가 작은 얼굴을 열심히 끄덕이며 헤헤 웃었다. 워낙 할머니를 잘 따르는

아이라 걱정하지 않긴 했는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몰랐는데, 엄마는 도하 읽어 주겠다고 한국에서 동화책까지 가져

온 모양이었고.

서원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도하를 바라보다, 엄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는 어제 잘 잤어요?”

“나야 뭘 물어. 엄청나게 잘 잤지. 호텔 침대가 너무 좋아서 못 일어나는 줄

알았어.”

“그래도 엄마 혼자 도하 씻기고 재우고 하려면 힘들었을 텐데…….”

“도하는 혼자서도 잘하던데, 뭘. 너 어렸을 때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지 몰라.”

“네? 제가 뭘…….”

왜 갑자기 제 옛날 일을 들먹이는 건지……. 그래도 저 정도면 얌전한 편이지

않았나?

까마득한 옛날은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 어렸을 적은 도하와 비슷했

다고…… 나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살배기 때부터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라, 자신이 없었다.

서원이 머쓱한 얼굴로 말하자, 엄마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너 데리고 밖에 다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애가 이렇게 얌전하냐고, 천사

아니냐고 하면서 부러워하긴 했어. 근데 워낙 씻는 걸 싫어해서 그때 고생 많

이 했지.”

“서원이가 씻는 걸 싫어했습니까?”

엄마가 추억 회상을 하듯 말하자, 도겸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도겸의 물음에 그녀가 도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주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실감 나게 말했다.

“그땐 그랬어요. 씻자고 하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안 나왔다니까요.”

“지금이랑 사뭇 다르네요. 지금은 뭐만 하면 씻겠다고 하는데.”

도겸이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덧붙인 사족은 몸을 겹치기 전에 서원이 씻겠

다고 하는 것에 대해 묘하게 불만을 표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의미인지 알아들을 리 없는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서도 안 씻으면 어쩌나 했는데, 많이 달라졌죠. 애들이 그래요. 어떻게 자

랄지 전혀 가늠이 안 되고…….”

그녀는 여전히 육아 중이라는 듯 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인이 되고도 몇

년이 지났건만, 그녀의 눈에 서원은 아직도 아이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

서원은 엄마의 눈빛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읽고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결혼

식을 올릴 때도 감정이 복잡해져서 울음을 터트렸었는데, 지금 또 그런 기분

이었다.

그녀는 도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서원이를 낳길 잘했다고 자주 생각해요. 생전 해외

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서원이 덕분에 하와이도 오게 되고, 알게

되는 세상도 넓어지고.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는 어쩌나 싶었는데, 손주

까지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녀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서원이가 없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

강조했다.

서원 또한 도하를 낳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도하가 없었더라면

이 순간은 없었을 거라고 매번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이 순간이 더 소중했다.

도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게 미소를 띠며 자연스럽게 화제

를 돌렸다.

“그럼 오늘 아침은 다 같이 먹을까요?”

“다 같이?”

“네, 어머님이랑 저희 부모님이랑. 다 같이요. 신혼여행 즐기겠답시고 너무

못 챙겨드렸던 것 같아요.”

도겸이 난데없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부터 신혼여행까지는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강조했었다. 그렇게 양가에 협조를 구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매정해 보일 수 있었지만, 도겸에게는 몇여 년 만에 주어진 긴

휴가였고 그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휴가를 즐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을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도겸이 먼저 저런 제안을 한다는 게 의외였다. 저희 엄마가 하는 말

에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며 부모님을 더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한 걸까?

도겸과 그의 부모님은 사이가 좀 데면데면하기도 했던 터라, 이런 기회로 관

계가 더 돈독해지면 좋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아무리 신혼여행이라지만 부

모님들을 너무 등한시한 게 아닌가 신경이 쓰이던 참이기도 했고.

서원은 아직 도겸의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고, 그분들도 저를 불편

해하긴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두 분은 예전처럼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시

지는 않으셨다. 차츰차츰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게 생기면 서원이 좀 챙

겨 먹이라고 보내시기도 했다. 특히 도하한테는 더 애정을 쏟아부으셨다. 어

렸을 적의 도겸과 똑 닮았다더니, 손자 사랑이 지극하셨다.

이런 게 가족이라는 거겠지. 이전까지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가족의 형태였지

만, 서원은 가슴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복작복작할수록 좋았다.

서원이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를 바라보자, 그녀가 조금 고민하는 듯하

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래. 뜻이 그렇다면.”

“그럼 삼십 분 뒤에 모일까요. 저희 부모님껜 제가 연락 드릴게요.”

도겸이 그럼 나머지는 다 자신이 준비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에 서원의 엄

마는 알겠다고 하며, 준비하겠다고 룸을 빠져나갔다.

룸 안에 서원과 도겸, 도하 셋이 남자, 도겸이 서원에게 말했다.

“어제 어머님이 도하 봐 주신 것도 고맙고 해서 같이 먹자고 했는데……. 괜찮아?”

그는 먼저 약속을 잡긴 했는데, 뒤늦게 서원의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제가 반기지 않는 상황이었다면 싸움이 날 수도 있었지만, 서원은 그 반대였

다. 오히려 좋았다.

“아, 저는 좋아요. 계속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고요.”

“그래? 다행이네. 그럼 슬슬 준비하자.”

서원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겸이 안도한 듯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도겸은 일찌감치 일어나서 다 씻고 옷만 갈아입으면 됐기 때문에, 서원만 부

지런히 움직이면 됐다.

서원이 일단 씻어야겠다 싶어 수건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째

서인지 그가 저만 졸졸 쫓아다녔다.

“무슨 할 말 있어요?”

뭐하는 거지. 장난치는 건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서원이 의아한 눈빛으

로 도겸과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도겸이 품에 안고 있던 도하의 눈치를 보듯 잠시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혀 서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는 입술을 서원의 귓가에 가져다 대더니,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이, 도

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씻는 거 도와줄까?”

“…….”

무슨 말을 하려고 계속 저를 졸졸 쫓아다니나 했더니만…….

순수한 호의로 씻는 걸 도와준다면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몸살 걸린 것처럼

아팠으니까. 그런데 그냥 나올 자신은 있나? 씻겨 준답시고 성욕을 건드리지

않으면 다행인데.

평소라면 고민을 좀 해 보겠지만, 오늘은 어젯밤의 일 때문에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요. 씻는 동안 도하 좀 봐 주세요.”

“어제는 셋이 씻고 싶다고 했잖아.”

“형은 씻었잖아요.”

도하를 빌미로 같이 욕실에 들어가고 싶은 눈치기에, 서원은 에둘러 거절하고

욕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서원이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고, 남은 도겸은 도하와 함께 침대에 앉았다.

도하를 침대에서 놀게 두고 커피를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침대 위

에 널브러져 있던 서원의 핸드폰이 반짝였다.

도겸은 별생각 없이 화면을 힐끗 봤다가, 미리 보기로 뜬 메시지 내용에 표정

을 굳혔다.

[윤철 선배: 서원아. 잘 잤어?]

[윤철 선배: 내가 너 만나고 추억 회상한다고 예전 메일함 좀 뒤져 봤는데]

[윤철 선배: 예전에 유학 제안 주셨던 거, 너희 남편분이셨더라?]

[윤철 선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냐?]

“……쓸데없는 걸 말하네.”

도겸은 작게 혀를 차고는, 서원의 핸드폰을 들었다.

서원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도겸은, 감정 하나 읽히지 않는 얼굴로 윤철에

게서 온 메시지를 삭제했다.

서원이가 안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만, 괜히 분란을 일으키기는 싫

으니까.

도겸은 서원의 핸드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화로운 신혼여행지에서의 아침이었다.

*- 외전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