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서원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즐거웠습니다.”
윤철의 말에 도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녁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그럭저럭 괜찮게 흘러갔다. 합석을 제안할 때는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윤철이 저의 대학생 시절 이야기를 해 준 이후로부터
는 분위기가 너그러워졌다.
그런데 문제는 서원이었다. 부끄러움에 술을 시키고 들이켠 것이 화근이었을
까. 술기운이 훅 하고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주량을 파악하고 나서는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알아서 자제해 왔었는데,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들을 이것저것 마시니 속에서 섞였는지 취해 버리고
말았다. 아까 분명 이런 술에 취하기 쉬우니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
려가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원아, 다음에 보자. 한국 가면 꼭 연락할게.”
“선배도…… 잘 지내세요.”
취기가 올라오면서 몸이 흐느적거렸다. 그 탓에 서원이 반쯤 도겸에게 몸을
기댄 채 인사하자, 윤철이 한참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다가 세워 둔 택시에 올
라탔다.
윤철을 태운 택시가 떠나고, 서원과 도겸은 잠시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떠나
는 택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국에 가면 만나자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서
원은 어쩌면 이번이 윤철 선배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처럼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술에 취해서 더 애틋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는데, 도겸이 반쯤 안겨 있는 서원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원아, 업어 줄까.”
“아뇨……. 걸을 수 있어요.”
“부축해 줄게.”
도겸은 알아서 걷겠다고 해도 못미더운지, 제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결국, 반쯤은 안긴 채로 호텔로 돌아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숙박하던 고
층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축하는 손길이 묘하게 느껴지기 시
작했다. 분명 부축하는 것일 텐데, 커다란 손이 허리를 붙잡고 쓸어내리는 손
길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평소 민감한 편이긴 해도, 단순히 이런 스킨십에 흥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
다. 제가 술에 취해 괜히 민감하게 느끼는 걸까?
서원은 제가 과하게 의식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렇지만 도겸의 품에서 묻어난 페로몬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성감은
진해져만 갔다.
이러다가는 제 페로몬이 훅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도겸과 거리를 벌
려야 할 듯했다.
서원은 힐끗힐끗 도겸을 보며 타이밍을 재다가, 뒤늦게 도겸에게 속삭이듯 말
했다.
“저…… 허리에 손 좀.”
“응? 왜?”
꾸물거리며 말하자, 도겸이 왜 그러냐며 제게 눈짓을 줬다.
서원은 이러다가 페로몬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페로몬도 엄연히
영어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제 상태를 알아차릴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다.
“저 이제 부축…… 필요 없어요. 저 혼자 걸을게요.”
분명 제대로 된 말을 하려고 했는데, 술에 취해서 그런가. 말하고 나니 혼자
걷겠다고 떼쓰는 아기가 된 느낌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단도직입적으로 손 치우라고 말하자니 매정하게 보일 것
같았다. 어떻게 말해야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하며 말을 고르는데, 도겸이 갑
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것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제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던 걸까. 서원이 몽롱한 머리로 잠시 생각하는데, 도겸이 눈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부축하는 거 아닌데.”
“……네?”
그럼 뭐하는 건데? 서원이 그런 눈빛으로 도겸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도겸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서원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
리로 은밀하게 말했다.
“누가 부축하는데 이렇게 만져. 사심 있는 거지.”
“혀, 형……!”
서원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외국인들
이 서원을 돌아봤다. 한국말로 대화를 나눠 내용을 알아들은 것 같진 않고, 큰 소리에 돌아본 듯했다.
그렇대도 민망한 건 여전했다. 서원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합 다물
고 도겸에게 날카로운 눈짓을 주자,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능청
을 부렸다.
지금 나만 이상한 사람 된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먼저 엘리베
이터에서 내려 버리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서원과 도겸이 묵는 룸은 호텔 최
상층에 있었다. 결국, 사람들이 다 내릴 때까지 서원은 꼼짝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난 뒤, 서원은 도겸의 부축을 뿌리치고 찌릿 그를 쏘
아봤다.
“밖에서는 이러지 좀 마요…….”
“내가 뭘 했다고.”
“사람들이 저희보고 예의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우리더러 잉꼬부부라던데.”
도겸이 그런 걱정 할 필요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매스컴에서는 서원과 도겸
을 보고 잉꼬부부라고 칭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좋게 봐 준다는 건 알지만, 서원은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서원이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자, 도겸이 말을 이었다.
“서원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아는데,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이상
하게 보지 않아.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기업 이미지도 좋아졌어.”
“그건…….”
서원이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와 결혼
하고 나서 기업 이미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니까
서원은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제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저와 결혼한 게 뭐라고 이미지가 좋아지나 싶었다.
그렇지만 제 생각과 달리, 사람들이 원한 게 바로 그런 거였다.
재벌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게 정략결혼이었고, 도겸 정도의 재력을 가졌으면
거의 당연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도겸이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제 전문가들은 그가 어느 집안의 자제와
결혼해 재력을 합칠지 주시하며 자주 입방아에 올리곤 했었다. 그 탓에, 이전
에 사모님이 억지로 만든 선 자리에 도겸이 포착되는 날이면 주가에 영향이
갈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대뜸 도겸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며 일반인과의 결혼 소식을
전하니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평을 하기도 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 도겸의 이미지는 좋아졌다. 극우성 알파 체질을 가진 재벌
가 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했다는 게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좋
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주변의 시선을 알기야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밖에서 스킨십하고 그러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건 정말
안 좋게 본다고요.”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서원이 타박하자, 도겸이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져 줬다.
……이러고 나중에 또 그럴 것 같은데. 의심이 들었지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뭐라 할 순 없으니 그만뒀다.
그렇게 룸 앞에 도착해 카드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룸 안으로 들어서
기가 무섭게 도겸이 뒤에서 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예고도 없이 단단한 가슴팍에 가둬지다시피 안겨졌다. 조금 놀란 서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힐끗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이제 실내잖아.”
“네? 그게 무슨…….”
“너 대학교 얘기 들었을 때부터 좆 터지는 줄 알았어…….”
도겸이 그렇게 말하며, 하반신을 바싹 밀착했다. 엉덩이 뒤로 그의 사타구니
가 문질러졌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데도 성기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저를 만지는 손길도 그렇고 사심 있다고 말한 것도 그렇
고. 그때부터 뭔가 흥분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서원은 그저 술을 마
시기도 했고 오늘 밤은 도하 없이 단둘이 보내기로 해서 들뜬 건가 했었다.
그런데 대학생 때의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거였다니……. 도대체 그럴 만한 포
인트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럴 만한 얘기는…… 안 했었는데요.”
“귀여워서.”
“…….”
귀엽다니…….
서원도 당시의 일은 꽤 시간이 흘렀어도 어수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
놓고 귀엽다고 말하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서원이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 있는데, 도겸이 자조적으로 중얼거
렸다.
“씨발……, 그때 나는 귀한 건 줄도 모르고 너랑 잤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가 귀하다고.”
“너랑 대학생 때도 잤었던 게 거짓말 같아. 딴 놈이랑 잔 것 같아서 짜증 나.”
아까부터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건가 했더니만……. 잘 들어보니, 제가 대
학생일 때 페로몬 파트너로 지내며 별생각 없이 몸을 겹쳤던 게 후회되는 모
양이었다.
이전에도 도겸은 수시로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깨달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
데.’하고 밥 먹듯이 과거를 후회하곤 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도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문제는 달랐다. 제가 대학생 때
다른 사람과 잤던 것도 아니고 오직 그와 잠자리를 나눴는데 뭐가 후회된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형도, 같은 형이었잖아요.”
“파트너일 때랑 잔 거랑 마음을 깨닫고 난 뒤에 잔 거랑은 달라.”
“뭐가 다른데요?”
“더 소중히 했을 거야.”
“…….”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도록 예뻐해 줬겠지.”
도겸이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전처럼 너를 안지는 않
을 거라고 굳게 다짐하는 얼굴이었다.
서원은 그런 도겸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도겸은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저는 그때도 많이…… 좋았다. 짝사
랑을 너무 지독하게 하는 바람에 그와 몸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도 있
었고……. 또 파트너로 지냈다고 해서 그가 저를 막 대한 것도 아니었다. 차라
리 막 대했더라면 마음을 포기하기 쉬웠을 텐데, 그렇지도 않아서 힘들어했었지.
충분히 잘해 줬다고 말하고 싶지만, 도겸이 제 말을 수긍할 리가 만무했다.
도겸의 후회를 잠재울 방법이 없을까, 잠시 생각하던 서원은 그를 똑바로 바
라보며 말했다.
“못한 만큼 지금 저한테 잘해 주시면 되잖아요.”
타임머신이 있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일을 없었던 일
로 덮어 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현재에 몇 배는 더 노력해 과거의 업보
를 조금 덮어내는 건 가능했다.
미래에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
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