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36)

<129화>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데, 윤철이 상황에 끼어들면서 가로막혔다.

“선물이라고요? 그러면 서원이랑 대표님은 그때도 알고 지내던 사이셨던 거예요?”

윤철은 가만히 듣고 있으려야 그럴 수가 없다는 듯, 호기심으로 두 눈을 반짝

거렸다.

왜 저렇게까지 흥미를 보이나 싶으면서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궁금해

할 만한 주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도겸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사이였으니까. 그리고 재벌가의 사람과 서민이 만나는, 일명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는 흥미가 가기 마련이지 않나.

“음…….”

서원이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다가, 작게 침음했다.

궁금증을 해소해 줄 정도로만 간단히 설명해 주고 싶은데, 워낙 어렸을 적부

터 엮여 있던 사이이다 보니 설명하기 난감했다.

저희 엄마가 도겸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제가 그 저택에 들어가 살았다는

이야기부터 풀어놓아야 하나? 말하려니 조금 꺼려지는 것이, 딱히 남들에게

털어놓지 않았던 가정사였다.

서원은 평소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도 아니고 가정부 일을 한 엄

마를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아빠 없이 자랐다는 걸 밝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막상 말하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 왠

지 모르게 그런 게 있었다. 자격지심인 걸까.

그 탓에 망설이고 있는데, 서원보다 도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게 된 지는 오래됐습니다. 그것보다 전 서원이가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네? 아, 학교 이야기요…….”

도겸이 은근히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궁금해할 필요 없으니 하던 말이나

더 이어 가라’고 말을 돌려 버렸다. 그 탓에 서원의 대답을 기다리던 윤철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어도, 도겸이 머지않은 미래의 대표이사님이

라 그런지 거절하지 못했다.

윤철은 이야기 듣기를 포기하고, 도겸이 원하는 대로 서원의 대학 생활에 관

해 마저 말을 이었다.

“서원이가 대학생 때 워낙 인기가 많았는데……. 모르는 건지 어쩐 건지. 철벽

이 엄청 심해서요. 웬만한 애들은 제대로 말도 못 걸어보고 포기했어요.”

“서원이가 철벽이 심하다고요?”

“예, 아까도 말했지만…… 동기들이 놀자고 해도 갈 곳 있다고 안 오고, 술자리

도 잘 안 오고 그랬으니까요.”

“…….”

말이 이어질수록 도겸은 점점 미간을 좁히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철벽이라는 단어가 서원에게 어울리기나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런 도겸의 반응에 서원은 왠지 모를 민망함을 느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의식적으로 벽을 치고 선을 긋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 거리감이 있었단 건 부

정할 수 없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니었는데, 대학 생활에

크게 집중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당시의 저는 수업이 끝나면 도겸을 만나러 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학과 술자

리가 생겨 가자고 하면 도겸을 만나러 가야 해서 안 된다고 거절했고, 어쩌다

학과 애들이랑 미팅 자리가 잡혀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참석하지 않았

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수업 외의 시간에는 만날 여지를 주지 않게 됐다.

그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철벽으로 보였구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

게 보였을 순 있겠다고 이해가 되긴 했다.

그랬던 학교에서와 달리 도겸에게는 완전히 마음이 열려 있었으니까. 오직 그

를 위해 제 시간을 맞추고 그런 생활을 했으니…… 철벽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

겠지.

서원이 고개를 푹 숙이는데, 윤철이 말을 이었다.

“당장 저만 해도 포기하려다가, 열심히 치근대서 친해진 거였는데…….”

“치근댔다고?”

윤철이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 가려다, 도겸의 싸늘한 목소리에 입을 꾹 다

물었다.

치근댄다는 말에 여러 의미가 있었으나, 도겸은 성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두 눈에 서늘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한 분위기에, 윤철은 황급히 오해라며 상황을 수습

했다.

“아,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친해지고 싶은 상대 있으면 인사도 하

고 말도 걸어 보고 그러잖아요.”

“…….”

윤철이 오해는 하지 말아 달라며, 두 손을 휘저으며 강력하게 해명했다.

그렇지만 도겸은 애초에 친해지고 싶어서 먼저 누군가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기

도 하고, 그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다들 그와 친해지고 싶어 안

달복달하는 편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윤철의 해명에도 도겸의 오해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오해의 골이 점

점 깊어져만 가자, 서원이 보다못해 대화에 끼어들며 주제를 돌렸다.

“서, 선배. 제가 어, 언제 철벽을 치고 다녔다고 그래요? 일이 있어서 술자리

나 행사에는 좀 빠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 냉정하게 굴고 그러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진행하려고 하는 것도 있었지만, 철벽치고 다녔다는 말에

오해할 여지가 있어 풀어 줄까 했다. 누가 보면 도겸 외에 쌀쌀맞게 대하고

다닌 사람 같지 않나.

서원이 ‘그렇죠?’ 하며 묻자, 윤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애들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긴 했지. 근데 내가 말한 철벽은 행사에 빠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티가 너무 많이 나서 말이야.”

“……제가요?”

“그래. 누구한테 연락만 오면 헤실헤실 웃고 얼굴 발그레 물들이고 그랬잖아.

학교 끝나면 일 있다고 바로 뛰쳐나가고.”

“…….”

“뭐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티를 그렇게 내 놓고서는……. 자각 없었어?”

윤철의 물음에 서원은 망연해졌다.

전혀 몰랐다. 제가 그러고 다녔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단순히 동기들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던 이유만으로 철벽을 치는 것처럼 보인 건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었다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절실한 짝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민망해서 낯이 뜨거워졌다.

서원이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자, 윤철이 황당하다는 듯 서원을 바라봤

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 도겸이 신경 쓰였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근데 남편분 앞에서 이런 얘기해도 되는 건가……? 서원이 대학교 다닐 때

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말하긴 했는데…….”

누군가를 그렇게 절실히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게 배우자로서는 민감하게 와닿

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윤철은 분명 처음에만 해도 서원이가 그만큼 대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신

비주의였던 아이였는데 어떻게 벌써 배우자를 만났는지 신기하다고. 그러니

잘해 주라는 말을 하려던 의도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까 서원이가 대학생 때 절실하게 누군가를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제가 치근댔다는 말 한마디에 꽂

혀 반감을 산 것 같은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것이 뒤늦게 눈치가 보인 윤철이 힐끗, 도겸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의외로

도겸은 평온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윤철이 당황스러워하는데, 도겸이 나긋하게 입

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이 나니까.”

도겸이 타격을 받지 않은 건 딱, 그 이유였다.

그때 서원이가 신비주의라는 이미지가 생길 만큼 벽을 치던 게 다 저를 좋아

하기 때문에 그랬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라는 걸 아니까. 그러니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오…….”

“…….”

윤철이 입을 동그랗게 모아 감탄하더니, 눈을 굴려 서원을 바라봤다.

신기하다는 윤철의 시선과 만족감 어린 도겸의 시선을 동시에 받고 있자니, 서원은 안 그래도 뜨겁던 낯이 터질 것만 같아졌다.

서원이 오랜 시간 도겸을 좋아해 왔다는 건, 이제 그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

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었지만, 현생보다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걸 들키니 민망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 버리고 싶을 지경

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모르는 건지, 도겸은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는 기색을 보였다.

“어땠는지 더 자세히…….”

“아, 그, 그때 얘기는 이제 그만하죠.”

도겸이 윤철을 더 쥐어 짜내고 싶어 하는 기세에, 서원은 후다닥 가로막았다.

더 들었다가는 이대로 뛰쳐나가고 싶어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좀 그런 기

분이었다.

서원이 울상을 지으며 도겸을 바라봤으나,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

지 얄밉게 굴었다.

“왜, 한창 재미있는데.”

“뭐가 재밌다고……. 우리 이제 술이나 더 시킬까요?”

“아직 술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정도는 금방 마시니까요. 아, 이거 샴페인 좀 더 시켜요. 아까 그거 맛있

던데…….”

서원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주절주절 아무 말이나 했다.

직접 웨이터까지 불러와서 샴페인을 더 시키기까지 하자, 다행히 제 간절함이

와닿은 건지 대학 시절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원은 괜히 민망해서, 제 잔에 따라져 있던 샴페인을 단번에 들이

켰다. 도수가 꽤 있어 술이 넘어갈 때마다 목이 뜨거운 느낌이 들었지만, 얼

굴만큼 뜨겁진 않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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