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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36)

<128화> 허, 허니문 베이비라니?

도겸의 제안에, 서원은 화들짝 놀라 침을 꼴깍 삼키며 주변을 돌아봤다. 다행

히 저희 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다들 자신들의 이야기에 심취해 들은 사람도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이런 건 밖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서원은 혹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타박했다.

“형은 여기가 바깥이라는 인식이 없어요?”

“어차피 한국말 못 알아들어.”

“허니문 베이비는 영어인데요.”

“아, 그렇네.”

만국공통어로 해 놓고선 뭘 못 알아듣기는……. 서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뭐라

했으나, 도겸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주변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오늘 보고 말 사람들이라고 해도, 부끄러움이 없나……. 민망함에 얼굴

에 후끈후끈 열이 올랐다. 서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열을 식히는데, 어디선

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서원아?”

“……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 와이키키 해변에서 마주쳤

던 윤철 선배가 서 있었다.

그는 해변에서 수영이라도 즐기고 왔는지, 아까와 달리 뺨이나 팔다리 부분이

울긋불긋하게 익어 있었다.

꽤 멋진 휴가를 즐긴 모양인데……. 아니, 근데 또 마주치다니. 서원은 당황해

서 눈만 깜빡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나야말로 묻고 싶다. 저녁 예약했다는 곳이 여기였구나? 나도 여기 예약했는

데,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냐?”

윤철이 이 넓은 땅에서 이렇게 겹칠 수가 있는 거냐며, 연신 신기하다는 기색

을 보였다.

서원도 신기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환히 반길 수 있는 상황

이 아니었다. 아까 도겸이 좋은 말로 예약 때문에 안 된다고 거절한 걸 뻔히

아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서원도 지금 도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귀하게 느껴져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서원은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고, 떼구르르 눈을 굴려 도겸을 살폈다.

역시나, 그는 돌이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방금까지 저와 허

니문 베이비 이야기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굴던 건 꿈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원에게는 그의 표정 변화가 확연하게 보였지만, 그걸 모르는 윤철은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합석할까요?”

“네? 선배는 하와이 혼자 왔어요? 일행분은요?”

“내가 아까 말 안 했나? 나 혼자 온 거야.”

“왜, 왜요?”

“왜냐니? 요즘 나 홀로 여행도 유행이고 애인도 없으니까 혼자 온 건데. 나

마음 아프다.”

서원이 묻자, 윤철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꼭 그렇게 들쑤셔야겠냐는 듯이 심

장 언저리에 손을 얹어 놓으며 아픈 척을 했다.

아니, 난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솔로한테 ‘애인

없어요? 헤어졌어요? 원래 없었다고요?’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이 되어 버

리고 말았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 왔을 수도 있으니 물어볼 법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철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의 심장에 비수를 찌른 건 변치 않았다. 서원이 난감

하게 입을 꾹 다무는데, 윤철이 도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껴도 괜찮을까요? 서원이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도 말해 드릴 수 있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서, 선배! 무슨 그런 얘기를. 저 인기 하나도 없었어요!”

“아녜요. 서원이한테 직접 말은 안 해도 한국대학교 다닐 때, 학우들한테 인

기 꽤 많았거든요.”

윤철이 구미가 당기지 않냐는 듯 은근히 도겸에게 눈짓을 줬다. 허락만 해 준

다면 이야기보따리를 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윤철의 가벼운 모습 때문일까. 도겸이 세게 이를 물었는지 턱 근육이 잠깐 움

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시선이며 근육을 움찔거리는 것이며, 도겸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우연에 우연이 겹친 상황이었으나, 서원은

제가 가운데에서 제대로 중재하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저, 선배. 다음에 한국 오면…….”

“들어 보고 싶네요.”

서원이 망설이다가 오늘은 안 되겠다고, 다음을 기약하며 윤철을 밀어내려고

할 때였다.

줄곧 입에 지퍼라도 단 것처럼 입도 벙긋하지 않던 도겸이 갑자기 긍정 의사

를 표했다.

당연히 합석하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오니 서원은 당

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원이 어리둥절하게 도겸을 바라보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서원이가 대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궁금한데. 얘기 좀 나눌까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직원분께는 제가 얘기하고 오겠습니다.”

도겸이 허락하자, 윤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웨이터에게로 갔다.

윤철이 잠시 자리를 떠나고, 덩그러니 남게 된 서원은 왜 그러냐는 얼굴로 도

겸에게 물었다.

“형……, 윤철 선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싫어.”

도겸이 즉답했다.

윤철의 합석 제안을 받아들일 때는 그래도 조금 표정을 푸는 듯하더니, 지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도겸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근데 왜…….”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궁금해서.”

마음을 바꿔먹은 이유가 뭔가 했더니만, 방금 윤철이 했던 말에 낚인 모양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어? 서원은 왠지 조금 허탈해져 힘 빠진 목소리로 그에게 말

했다.

“그건 제가 말해 줘도 되잖아요.”

“넌 인기 없었다고만 말할 거잖아. 어떤 날파리 같은 새끼가 꼬였었나 궁금해

서 그래.”

“안 꼬였는데…….”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학교엔 날파리 같은 사람도 없었다. 서원이 대

꾸했으나, 도겸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방금 윤철이 인기 많았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탓인 듯했다.

도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한 거지……. 정말 인기가 있지도 않았고, 저에게는 의

미도 없는 지난 일일 뿐인데.

서원은 퉁명스러워하면서도, 반갑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윤철을 쫓아낼

깜냥이 없었다.

* * *

결국, 합석이 성사되고 말았다.

레스토랑에 허락을 구한 윤철은 근처에 의자를 끌고 와 합석했다. 다행히 테

이블이 넓어서 한 명이 더 왔다고 비좁지 않았다.

그 점은 다행이긴 했으나, 문제는 도겸과 윤철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에 있었

다. 둘은 서원을 앞에 두고 제 예전에 관한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나누고 있

었다.

윤철은 추가로 주문한 샴페인을 홀짝이더니, 친근하게 도겸에게 예전 이야기

를 털어놓았다.

“서원이가 다른 애들이랑 분위기가 좀 다르기도 하고, 그래서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윤철은 도겸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함인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를 했다.

곧 S 백화점의 팀원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대표이사님에게 귀염받으려는 의도

는 알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황당해서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던 서원은 곧바로 윤철에게 대꾸했다.

“제 분위기가 뭐가 남다른데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그냥 생긴 게 다르잖아.”

“그게 무슨……. 같은 사람인데 뭐가 다르게 생겼다고…….”

“안 그래도 튀는 외모면서, 매번 술자리도 빼먹으니까 신비주의란 말도 돌고.

맞다, 너 재벌가라는 소문도 있었어, 난 너랑 친하니까, 아닌 거 알았지만.”

“네? 재벌가요? 제가요?”

저에 대한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데.

도겸의 앞이라고 괜히 부풀려서 말하는 건가? 서원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자, 윤철은 진짜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래. 일이 있다고 매번 일찍 돌아가는데 걸치는 옷은 명품이고. 어디서 후

원받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돌고 그랬어.”

“네? 제가 언제 명품을 입었다고요?”

“너 매번 입고 다니는 옷이 다 명품이었는데?”

“그럴 리가요. 전 명품을 산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 너 손목시계 진짜 비싼 거 차고 다녔잖아. 애들이

그 시계 가격이면 전셋값 내겠다고 얘기했었어.”

“그런 적이 없…….”

정말 그런 적이 없는데. 언제 그랬냐고 되물으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

나가는 게 있었다.

당시, 도겸이 협력사에서 받았다든지, 자기 취향이 아니라든지 하는 이유로

제게 옷이나 악세사리를 떠넘겨 주던 때가 종종 있었다.

도겸이 주는 것이니 비싸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브랜드를 봐도 어디인

지 모르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아주 비싼 것은 아니겠거니 하고 그냥 받

았었는데……. 그게 명품이었나?

대학생 때 차고 다니던 시계도 도겸이 준 거였다. 디자인이 깔끔하고 멋있기

도 했고, 성능이 좋아 고장도 안 나서 오래 차고 다녔으니까 확실히 기억했

다. 그런데…… 그게 남들 전셋값 정도 되는 비싼 물건이었던 걸까?

제가 의도적으로 위조품을 사거나 명품을 샀던 적이 없으니 그쪽으로밖에 생

각이 흐르질 않았다. 서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휙, 도겸을 바라보니 그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진짜였구나……. 의도적으로 피하는 시선에 확신할 수밖에 없어졌다. 서원은 눈

썹을 찌푸리고는 곧장 도겸에게 캐물었다.

“그때 형이 줬던 게 그렇게 비싼 거였어요?”

“난 가격도 모르는 물건이라 잘 모르겠는데.”

도겸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능청을 떨었다.

당시에도 웬만한 건 선물 받았는데 자신은 안 쓸 것 같다든지 사이즈가 안 맞

는다며 넘기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정말 가격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

식적으로 거래처에서 전셋값 정도 되는 물건을 받나? 그 정도면 비리 아닌가?

게당시의 도겸은 대표도 아니었으니 그런 물건을 받았을 것 같지도 않았을 것

이다. 제가 아는 그는 뇌물을 받을 정도로 뒤가 구린 사람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기도 했고 페로몬 파트너로 지내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의

다 알았으니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겸이 사서 선물한 것 같았다.

하아, 비싼 건 줄도 모르고 막 쓰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봤을

지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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