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36)

<127화>

“그랬어요? 전혀 몰랐는데.”

“응. 지금은 괜찮아서 얘기하는 거지만, 그때는 S 백화점에서 후원받는 걸 숨

겨야 한다는 비밀 조항이 있었거든.”

“그런 것도 있구나…….”

서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억거렸다.

근데 백화점에서 인재를 후원한다고 알려져선 안 될 이유가 뭐지? 좋은 일 하

는 거니까 회사 이미지도 좋아질 것 같은데……. 궁금했으나, 회사 측에서도 나

름의 생각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싶어졌다.

그나저나 도겸의 회사에서 지원해 준 거였다니. 그의 회사에서 유능한 인재에

게 후원을 많이 해 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선배일 줄은 꿈

에도 몰랐다.

“아무튼, 나도 유학 가고 싶어 했으니까 천운이었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

해. S 백화점에 취업해 보겠다고 자기소개서 냈을 땐 서류 전형에서부터 탈락

했었는데, 갑자기 날 좋게 봐주고 후원해 줬다는 게.”

윤철이 말을 이어 가며,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바라봤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연한지, 두 눈에 아른거리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내버려 두면 자신

이 얼마나 힘들었던 상황을 극복해 왔는지에 대한 자서전이라도 한 권 써 내

려갈 분위기였다.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물들어 가려는데, 도겸이 입을 열었다.

“그런 우연이 다 있군요.”

감동 스토리고 뭐고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분위기를 확 깨는 무미건조한 목소

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겸은 무척이나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는데, 말과 표정

을 저렇게 하니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 윤철은 조금 머쓱해졌는지, 촉촉하게 물들여 가던 눈가를 닦아냈다.

“크흠, 아무튼……. 제가 곧 S 백화점 해외지원팀으로 입사할 예정이거든요. 입

사 전에 잠시 하와이에 쉬러 온 거였는데, 이렇게 대표이사님을 만나게 될 줄

은 꿈에도 몰랐네요. 서원이도 마찬가지고.”

그는 S 백화점에 곧 입사하는 상황임을 밝히고는, 서원과 도겸을 바라보며 조

심스럽게 제안 하나를 했다.

“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시간 되시면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할까요? 오랫동안 안 봐서 서원이랑 나눌 이야기도 많을 것 같은데. 대표

이사님이랑도 대화 나눠 보고 싶고요.”

길 가다가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끝내기엔 아쉽다는 눈치였다.

술이라……. 윤철의 제안에 서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도겸의 눈치를 살폈다.

서원은 한때 윤철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몇 년 만에 만난 거였으니까 반갑

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왕이면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 있었던 일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서원에게는 도겸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한국에서 지나가다 마주한

것도 아니고, 무려 신혼여행 도중이었다. 그가 얼마나 결혼과 신혼여행을 기

다려 왔는지 아는데, 생판 남과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는 게……. 그가 싫어하지

않을까.

도겸의 의견에 따라야겠다. 서원이 도겸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그가

난처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살짝 웃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신혼여행 중이라서요.”

“……아!”

“서원이가 하와이 오는 게 처음이라, 좋은 데 가서 먹겠다고 저녁까지 다 예

약을 해 둔 참이라……. 인원을 바꾸기가 난감하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하죠.”

도겸은 아이를 강조하며 안고 있던 도하를 고쳐 안았다. 도하는 얌전히 도겸

의 품에 안겨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윤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특유

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였다.

윤철은 저도 모르게 도하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멋

쩍게 뺨을 긁적였다.

“신혼여행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제가 눈치도 없이 방해하려고 했네요.”

“아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죠.”

도겸이 이해한다며 너그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방해가 아니라고 부정

하지는 않았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있는 것이 서원의 눈에는 선

명하게 보였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기 싫다는 건 이해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이유라고 하기

에는 윤철을 훨씬 많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딱히 윤철 선배가 거슬리는 언행

을 했던 것 같진 않은데, 왜지?

서원이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도겸이 마무리 인사를 했다.

“다음에 인연이 닿아 다시 뵙게 됐으면 좋겠네요.”

“신혼여행 잘 즐기다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윤철은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돌아섰다.

그렇게 떠날 것 같았는데, 윤철은 걸음을 떼기도 전에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다시 몸을 돌렸다. 윤철은 중요한 걸 깜빡했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맞다. 서원아, 네 번호 좀 다시 알려 주라. 예전에 핸드폰 고장 나면서 네

번호 날아갔거든.”

“아, 네. 형 번호도 알려 주세요.”

서원은 윤철에게 핸드폰을 받으며, 자신의 핸드폰도 그에게 넘겼다.

그렇게 핸드폰을 주고받고 메신저를 켜자, 새로운 친구로 윤철이 업데이트되

었다. 윤철 선배의 프로필 사진에는 그 혼자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기회 되면 꼭 한잔하자. 잘 지내고.”

“선배도 잘 지내세요.”

“오냐.”

아쉽지만, 만남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때 이후로 끊어지는 인연인 줄 알았는데, 하와이에서 다 만나게 됐으니. 인

연이라면 앞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서원은 윤철이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가 되

어서야 도겸을 바라봤다. 도겸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삐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철을 주시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고 서원에게 물었다.

“점심 먹을 때 됐는데, 이제 슬슬 일어날까?”

도겸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곧 점심때가 되어 가기는 한데……. 윤철을

만난 직후에 갑자기 그러니 타이밍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급히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인 걸까? 잠시 생각하는데, 서원에게서 반응이 없자 도겸이 재차 물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예약 시간 안 늦을 것 같은데. 배 안 고파?”

“……아뇨. 배고파요. 가요.”

서원은 도겸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윤철 선배와는 당분간 만날 일은 없

을 것이다. 다음에 한잔하자, 그런 건 의례적으로들 하는 말이었으니까.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해변에 깔아 뒀던 비치타월을 정리하고,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점심은 하와이에서 꼭 먹어 봐야 한다는 포케를 먹고 놀다가, 해가 질 때쯤

호텔에 가서 서원의 엄마에게 도하를 잠시 맡겼다.

서원과 도겸은 도하와 함께 하와이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즐거웠지만, 엄

마가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기 때

문이었다.

그렇게 단둘이,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 간 곳은 와이키키 해변이 한눈

에 보이는 해산물 음식점이었다. 킹크랩이 유명한 곳이라 그것과 함께 샴페인

을 주문했다.

여기가 로컬맛집이라고 유명하다더니. 먹어 보니 왜 소문난 건지 알 것 같았

다. 킹크랩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기도 했고, 간도 적절하게 배어 있었다. 특

히나 바다가 보이는 명당에서 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맛있고 음식도 풍족하게 나와 부지런히 먹고 있는데, 샴페인을 가볍게 홀짝이

던 도겸이 흐뭇하게 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입에 잘 맞아?”

“네! 진짜 맛있어요. 형도 좀 먹어 봐요.”

“안 그래도 잘 먹고 있어. 건배할까?”

도겸은 굳이 그렇게 챙기지 않아도 잘 먹고 있다며 슬며시 웃었다. 가느다랗

게 접힌 눈이 휘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도겸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서원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가볍게 잔을 부딪

히자, 챙 하고 투명한 유리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가 났다.

식당에서 추천해 주는 샴페인으로 주문했는데, 달콤하면서도 끝맛이 은근히

묵직했다. 이런 술이 은근히 취하기 쉬웠다. 많이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잠시

생각한 서원은, 잔을 내려놓고 도겸에게 말했다.

“도하랑 같이 다니는 것도 좋긴 했는데, 형이랑만 있는 것도 좋네요.”

“그러게. 이제야 진짜 신혼여행 온 것 같은데.”

서원의 감상에 도겸이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와 함께 이렇게 좋은 곳에 올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었지만, 어린아

이와 함께이다 보니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이 바빴다.

도하를 맡기고 나니 여유가 생기면서, 도겸은 온전히 서원에게 온 신경을 집

중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신혼여행의 분위기를 이제야 되찾은 느낌이었다.

만족스럽게 말하던 도겸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어머님이 아침까지 도하 맡아 주겠다고 오늘은 둘이서만 자

라던데.”

“네? 갑자기요? 그렇게까진 안 해 줘도 괜찮은데…….”

“우리 챙겨 주는 것도 있는데, 어머님이 도하를 워낙 좋아하시니까 같이 자고

싶으신가 봐. 도하도 어머님을 엄청나게 잘 따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긴 한데…….”

서원의 엄마는 도하가 태어난 뒤 거의 손자 바라기가 됐다. 제 아들인 서원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손자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완전히 접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도하도 워낙 조용하고 의젓한 성격이라 엄마를 아주 힘들게 하진 않을 것 같

긴 한데……. 그렇다 해도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골 아프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도겸이 테이블에 두 팔을 기대어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도겸이 서

원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은밀하게 말했다.

“허니문 베이비를 원하시는 걸 수도 있고.”

“네?”

“오늘 둘째 만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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