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외전*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하와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곳이었다. 빠져들고만 싶은 푸른 바
다며 높디높은 하늘까지 모든 것이 청량하고 아름다웠다. 도겸과 놀러 먼 타
지까지 온 것이 처음이라 더 꿈만 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페로몬 파트너로 지낼 적에 그와 해외를 나온 적은 숱하게 많았지만, 그때와
는 달랐다. 당시에는 파트너 일 때문에 갔던 터라, 저는 호텔에 박혀 언제 올
지도 모를 그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지금은 오로지 저와의 시간을 위해 온 거
였다. 온종일 함께 좋은 곳을 돌아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원과 도겸에게는 예식을 올리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투어 겸 데이트를 즐
길 시간이 주어졌다.
지금은 와이키키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간식거리를 먹고 있었다. 간식은
파인애플 안쪽을 동그랗게 파고, 노란 속살을 갈아 넣은 파인애플 생과일주스
였다. 빨대와 함께 파라솔 모양 장식을 꽂아 주는데, 왜 그게 그렇게 낭만적
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서원은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달콤한 음료를 쪽쪽 빨았다. 생과일주스는 설탕
을 타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콤하고 상큼했다. 엔돌핀이 치솟
는 기분이었다.
입꼬리를 싱그럽게 올리며 마시고 있는데, 도겸이 도하를 품에 안은 채 물었다.
“서원아, 맛있어?”
“네, 엄청 시원하고 설탕 탄 것처럼 달아요. 형도 먹어 볼래요?”
서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빨대에서 입술을 떼고 파인애플 주스를 도겸에게 내
밀었다. 그러자 도겸은 눈앞에 있는 파인애플 주스를 바라보다 난감하게 웃었다.
“난 단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하면서도, 고개를 기울이더니 빨대를 입에 물었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붉은 입술을 벌리는 도겸의 모습에, 서원은 자기도 모르
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작 과일 주스를 나눠 먹는 것뿐인데, 제가 방금까지 물고 있던 빨대를 자연
스럽게 무는 입술이 왜 이렇게 색정적으로 보이는 건지. 욕구불만도 아닌데, 일상시의 모습에 왜 동하는지 모르겠다.
서원이 침을 꼴깍이며 그를 바라보는데, 목젖을 출렁이며 주스를 몇 모금 마
시던 그가 금방 입술을 떼어냈다.
“너무 달다.”
“으음……. 형이 너무 단 걸 싫어하는 거예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급히 정신을 차리곤 자연스럽게 핀잔을 줬다.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지만, 여기는 많은 사람이 돌아다
니는 와이키키 해변이었다. 미국이라서 스킨십에 좀 개방적이지 않나 생각하
면서도, 내재한 마음은 한국인이다 보니 야외에서 입을 맞춘다는 것이 민망하
게 느껴졌다.
예의 없는 외국 관광객이 되긴 싫으니까 자중하자. 도겸도 요즘 매스컴에 얼
굴을 비쳐서 나름 좀 알려지지 않았나.
연예인처럼 얼굴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도겸이 대표이사로 승진하면서
매스컴을 탈 일이 더 많아졌다. 한두 번 봤다고 사람들이 다 도겸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만, 도겸은 연예인 뺨 치도록 미남이기도 했으니 기억에 남을 법
도 했다. 서원의 눈에는 도겸이 그 누구보다 잘생기기도 해서 더 기억에 남을
거라고 굳게 믿는 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야릇한 생각을 지워내는데, 갑자기 도겸의 품에 안겨
있던 도하가 버둥거렸다.
“으으응.”
도하가 고사리처럼 작고 통통한 손으로 서원의 옷깃을 붙잡았다.
불편한가? 서원이 왜 그러냐며 도하를 내려다보자, 도하가 작은 입을 오물거
리다 목소리를 냈다.
“아빠, 나도…….”
“주스 마시고 싶어서 그래?”
“우웅.”
서원이 묻자, 도하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워서 그런 건지, 부끄
러워서 그런 건지 통통한 뺨을 발그스레 물들이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사
랑스러웠다.
서원은 도하가 뭔가를 부탁하면 약한 편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서원은 제가 아이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크게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하를 낳고 난 후론 달라졌다.
도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제 아이라서 그런가 뭔가를
해 달라고 하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의 별도 따다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도하가 부탁해 올 때면 주고 싶었는데, 번번이 도겸에게
가로막혔다. 너무 어린아이라 화학첨가물이 든 음식을 먹이면 안 된다거나 좋
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서원은 도하에게 주스를 주려다가, 그 점을 떠올리고 도겸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하한테 먹여도 될까요? 생과일주스라 괜찮을 것 같긴 한데…….”
“한 입이면 괜찮아. 내가 양치질 잘 시킬게.”
웬일인지, 도겸은 너그러운 반응을 보이며 허락했다. 자극적인 맛은 물들이지
않는 게 좋다고 했으면서. 이건 인공감미료가 아니라 생과일주스라서 괜찮은
건가?
어떤 기준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허락을 알아들은 도하가 두 눈을 반짝거리
며 어서 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저 커다란 눈망울에 눈
물을 그렁그렁 매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먹고 싶은가. 서원은 피식 웃으며 도하에게 빨대를 물려 줬다. 도하
는 작은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며 빨대를 빨더니,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맛있어?”
“웅! 맛있어!”
서원이 묻자, 도하가 빨대에서 입을 떼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세
차게 끄덕이는지,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귀여워. 서원이 고개를 숙여 도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가 떨어트리자, 도하가
헤헤 웃었다.
주스 좀 더 마시라고 하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겸이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서원아, 나는?”
“네? 뭐가요?”
“나는 뽀뽀 안 해 주냐고.”
도겸이 도하를 안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검지로 뺨을 가볍게 톡톡 쳤다. 어
서 여기에 입을 맞추라고 시키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웬 뽀뽀? 설마…… 도하한테 질투해서 저러는 건가?
유난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막 불타오르는 신혼이라 그런지 귀엽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게다가 저 역시 뽀뽀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참이라 더 끌렸다.
예의 없는 관광객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키스가 아니라 뽀뽀 정도는 봐주겠
지……. 아주 잠깐이니까.
스스로 합리화한 서원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뺨에 입을 맞추려고 할 때였다.
“어, 서원아?”
“……?”
어디선가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원이 도겸에게 뽀뽀하려던 걸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이내, 낯
선 듯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저 얼굴은 분명, 한국대학교를 재학 중이던 때 친하게 지내던 윤철 선배였다.
윤철 선배는 같은 학과에 같은 동아리를 들게 되면서 한 학기를 거의 함께 보
낸 선배였다. 같은 수업을 듣기도 했고 조별 과제를 진행하면서 유독 친해진
선배였다. 술자리가 생기면 저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아쉽다고 칭얼거리던
선배였는데…….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됐다고 한 이후로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
다 자연스럽게 연이 끊기게 됐다.
이번에 식을 올릴 때 윤철 선배도 하객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는 연락처도 몰라서 아쉽게 지나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철을 반가워하면서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선배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는데…….”
“얼굴 때깔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하다.”
윤철은 빙긋 웃으며, 손을 뻗더니 서원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뺨이 눌
리면서 자연스럽게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붕어 같아서 윤철이 키득키득 웃는데, 순간 서늘한 눈길이 느껴졌
다. 윤철이 힐끗 눈동자를 굴리자, 서원의 옆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남성이
살벌한 눈빛으로 윤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해도 믿을
만큼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윤철은 도겸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셔? 네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아.”
윤철의 물음에 서원이 힐끗 옆을 바라봤다. 도겸은 제 옆에 서서, 무척이나
경계하는 얼굴로 윤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시선을 하고 있으니 친구처럼 안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도겸은
딱 봐도 뭔가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곤 했으니까.
서원은 그런 도겸을 바라보다 조금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편인데…….”
“뭐?! 남편? 너 결혼했어?”
“네…….”
서원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 아직 신혼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눈앞의 윤철 선배가 엄청나게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여서 더
부끄러운 것 같았다.
서원이 귓가를 발그스레 물들인 채 고개를 숙이는데, 윤철이 놀란 감정을 가
라앉히기 힘들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반응했다.
“와……. 네가 그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 먼
저 올라간다는 게 이런 건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래서 뭐하시는 분이셔? 소개 좀 해 주라.”
서원이 몹쓸 말을 들은 사람처럼 가자미눈을 떴으나, 윤철은 자연스럽게 넘어
갔다.
그에 서원은 조금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가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선배였지만, 미워할 수 없도록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었다.
“S 백화점 대표이사님이세요. 그리고 형, 이분은 나랑 한국대학교에서 친했던
선배예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서원은 둘을 번갈아 보며 소개해 줬다.
그러자 윤철은 S 백화점 대표이사라는 직책에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급히 오른
손을 뻗어 도겸에게 악수를 청했다.
“허억, S 백화점……! 아, 저, 저는 최윤철입니다. 반갑습니다.”
“…….”
손을 뻗은 것이 무색하게, 도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겸이 도하를 품에 안고 있기는 하다만, 그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아이를 안
을 수 있었다. 잠깐 손을 잡는 것뿐인데 도하 때문에 악수조차 못 하는 건 말
이 안 됐다.
도겸에게 눈짓을 주려는데, 윤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일부러 대꾸를 안 하는 건가? 윤철 선배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나? 생각
해 보지만,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이유든 간에 이렇게 굴면 저도 선배도 무안해지지 않나. 서원이
다급하게 ‘손이 모자라서 그런가 봐요.’ 하며 자연스럽게 둘 사이를 중재하려
던 때였다. 도겸이 도하를 한 손으로 바꿔 안더니,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도겸입니다.”
도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윤철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도겸의 손등에 굵직
한 핏줄이 선명하게 섰다.
윤철은 잡힌 손이 아픈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악수를 끝내고도 손이 얼얼
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던 그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리며 도겸에게 말을 걸었다.
“저랑 인연이 있으시네요. 저도 S 백화점이랑 인연이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도겸은 인연이라는 말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서원은 윤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S 백화점과 인연
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윤철 선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그때 내가 너한테 말 안 했었지? 대학생 때, 갑자기 한국대학교에서 전
화가 오더니 S 백화점에서 날 마음에 들어 한다고. 지원해 주겠다고 해서 유
학 떠나게 된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