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36)

<120화>

차라리 이전에 살던 곳에 살림을 합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했다. 서원은 어리벙벙하게 집을 둘러보다가, 도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여, 여기는 너무 넓은 것 같은데……. 형이 사는 곳이나 제가 사는 곳으로 합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왜? 집이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넓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집은 관리하기도 힘들 텐데.”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내부가 깔끔하고, 벽 한 쪽이 통째로 서울의 탁 트인 전경이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제 기준에는 이곳에서 셋이 산다는 게 서원의 기준에는 말이 안 됐다. 이건 뭐, 사모님이랑 회장님이 머무는 저택만큼 넓은 것 같은데…….

집값이 비쌀 것 같다는 걱정은 그에게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서원이 부담스럽다는 식으로 말하며 눈썹을 늘어트리는데, 도겸이 그런 이유였냐는 듯 표정을 풀며 다정하게 말했다.

“관리? 어차피 사람 불러서 관리할 거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네가 지내던 아파트는 보안이 허술해서 신혼집으로는 부적절해.”

“네? 보안이 뭐 어떻다고……. 저 그 집에서 6년은 살았는데요? 그리고 형 사는 곳도 좋은 곳이잖아요.”

누가 들으면 서원이 사는 아파트가 보안이 아주 취약한 곳인 줄 알겠으나,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엄연히 경비 아저씨도 계시고 CCTV도 있고 주변에 범죄도 안 일어나고 그랬다.

서원이 6년간 살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점을 꼽았으나, 도겸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듯 심각하게 눈을 맞추며 서원을 설득했다.

“지금이야 그렇다지만, 나와 결혼했다고 알려지게 되면 분명 위협적인 일들이 생길 거야. 나야 우성 알파니까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너랑 도하는 힘들잖아.”

“음…….”

“돈을 더 내서라도 안전한 곳에서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기가 한국에서 보안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래. 여기 들어올 때 보안 잘되어 있는 거 느끼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들어오기까지 경비가 꽤 철저하다는 걸 느끼긴 했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도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제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사건 사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도겸과 결혼하고 나면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언론사 사람들이 붙을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서원이 조금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도겸은 이곳으로 이사하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는 듯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아니면 사람이라도 붙일까?”

“……사람이요?”

“보안 덜한 곳으로 가는 대신, 보디가드를 붙여도 괜찮을 것 같긴 해. 그쪽이 더 안전할 수도 있고.”

“아, 아뇨. 그건 싫어요…….”

보디가드라니. 제가 무슨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과하기도 했고, 어디를 가든 동행해야 하니 신경 쓰일 테고 사람들의 시선도 이상할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차라리 이렇게 과한 집에서 사는 게 더 나았다.

“그럼 이 집으로 하자. 아, 그리고…… 이것도 받아.”

서원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젓자, 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입꼬리를 올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갑자기 뭘 주는 건가 싶어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바닥 위에 고급스러운 재질의,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가 하나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서원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도겸이 보란 듯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두 개의 은색 반지가 나란히 꽂혀,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이 드러났다.

“이건…….”

“결혼반지야.”

이게…… 우리의 결혼반지라고?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서원이 놀란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겸이 머쓱하게 웃음을 흘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상황이 너무 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안 한 것 같더라고. 사실은 이 집도 네가 좋아할 줄 알고 서프라이즈로 준비했던 건데…….”

“…….”

“나랑 결혼해 줘, 서원아.”

도겸이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 서원을 응시하며 청혼했다.

사실, 이미 결혼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도겸은 진지하게 허락을 구하는 사람처럼 청혼하고 있었다.

저에게서 나올 대답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바싹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절당하지 않을 걸 알면서 왜 저렇게 떨고 있을까 싶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청혼을 받는 서원 또한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고 말문이 막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겸은 제게 제대로 된 청혼을 하지 않았었다고 말했지만,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크게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혼반지에 큰 의미를 두는 편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리며 뛰는 걸까.

어질어질하고 얼굴도 화끈거리고 전신에 긴장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만 꼴깍이며 서 있는데, 눈앞의 도겸의 얼굴이 점점 불안한 낯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제가 곧바로 받아들이질 않아서 그런 건지, ‘혹시나’하는 마음인지 조마조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대답을 망설인 건 아니었는데. 상황을 파악한 서원은 놀란 마음을 다스리기보다 대답을 먼저 했다.

“당연하죠…….”

“하……. 마음 바뀐 줄 알았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서원이 거절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서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요. 그렇게 단순한 마음이었으면 사모님이랑 회장님 앞에서 그런 말도 안 했겠죠.”

“그래도. 손 이리 줘 봐. 반지 끼워 줄게.”

도겸은 완전히 마음이 풀렸는지, 빙긋 웃으며 케이스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반지를 끼워 주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조금 민망했다. 서원이 머뭇머뭇 손을 내밀자, 도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얇고 반짝거리는 은색 링이 손가락에 딱 맞춰 들어갔다. 어떻게 사이즈를 알아 온 건지 신기했다.

평소 반지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끼고 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손에 딱 맞게 끼워진 채 빛을 내는 반지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절대로 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저도 형 손에 끼워 줄게요.”

“그래 줄래?”

서원이 말하자, 도겸은 제가 끼워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놀라더니, 남은 반지 하나를 서원에게 건넸다.

떨어트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반지를 받아든 서원은 신중한 눈빛으로 도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이번에도 반지는 딱 맞춘 것처럼 빈틈없이 들어갔다.

도겸과 제 손에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운명의 짝은 붉은 명주실로 이어져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반지를 끼니 정말로 서로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이 커플링을 맞추고 결혼반지를 끼는지 알 것 같았다.

서원이 반지를 낀 도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데, 도겸도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형이 준비해 준 건데요, 뭘…….”

고맙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반지를 준비해 온 사람이 고맙다고 하니까 기분이 미묘했다.

서원은 민망한 기분으로 대답하며 반지를 바라보다,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형이 다 준비해 주니까 좀…… 그렇네요.”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다른 거로 맞출까?”

“아뇨!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예쁘고요. 그런데…… 같이 골라도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너무 받기만 하는 기분이라서요.”

서원은 도겸이 본업 일만 해도 바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같이 골랐더라면 저도 알아봤을 테니 고생을 덜 수 있었을 텐데……. 도겸에게 모든 걸 떠넘긴 것 같아서 미안했다. 보통 신혼집이나 결혼반지 같은 건 같이 맞추는 거 아닌가.

서원이 이유를 설명하자, 도겸이 그런 이유였냐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집 보러 다니는 건 네가 힘들어 할 것 같아서 그랬고. 반지는 서프라이즈로 하면 네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하……. 진짜.”

허탈함에 서원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서프라이즈를 좋아했었다고…….

어쨌든 결과가 성공적이긴 했다. 신혼집이 과분하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반지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값을 들으면 왠지 맥이 빠질 것 같긴 하지만, 그와 저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절대로 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서원이 제 손에 정갈하게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도겸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조만간 결혼식도 올리자.”

“결혼식이요……?”

“응, 늦은 감이 있지만 할 건 다 해야지. 결혼식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고.”

“…….”

결혼식과 신혼여행이라니. 남들은 다 할 법한 이야기였는데, 어째서인지 서원은 남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그와의 미래를 결심하고 나서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억지로 도겸과 떨어져 지내게 되기도 했었고, 이후에는 제 몸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바람에 그저 도하를 건강하게 낳는 것에만 급급해서 다른 건 신경 쓸 여력이 안 되기도 했었다.

나도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고 그러는구나……. 서원이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도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넌 어떤 결혼식이 좋아?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결혼식이라도 있어?”

“그,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생각해 둔 것도 있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한번 생각해 봐.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어요.”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는 잘 모르겠으니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 신혼집처럼 어마무시한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여유롭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서원은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반지와 신혼집을 바라봤다.

너무 급작스럽고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가 저를 위해,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는 것이 제 마음을 울렸다.

저는 아파서 누워 있느라 아무것도 그에게 해 준 게 없는데……. 저도 그에게 보답을 해 주고 싶은데, 집이나 반지 같은 건 그가 다 준비한 느낌이었다.

저만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없을까?

잠시 생각해 보자니, 딱 하나.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도겸도 좋아할 만한 일이 있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서원은 도겸의 눈치를 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형. 저……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뭔데?”

“저, 형한테 각인하고 싶어요.”

각인.

여태까지는 도겸이 저에게만 일방 각인을 한 상태였지만, 이제는 저도 그에게 각인을 하고 싶었다.

하고 싶다고 해서 의지대로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이라면 그에게 각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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