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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36)

<117화>

믿을 수 없는 말에 서원이 놀라 묻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믿기 힘들어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건가 싶은데 도겸이 그럴 리는 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몸살이 온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아프긴 하지만, 죽을 뻔했다는 말은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난 후의 기억이 없었다. 수술하느라 마취를 하고 정신이 든 게 지금이었으니까.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고 서원이 두 눈으로 묻자, 그가 벅찬 숨을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

“찰떡이는 잘 태어났는데, 네가 좀처럼 의식을 못 차렸어. 의사는 네가 수술하느라 체력을 다 써서 그런 것뿐이라고 하는데 나흘이나 깨어나지를 않아서…….”

“…….”

도겸은 울먹거리며 이야기하는데, 서원은 그 와중에 찰떡이는 잘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제가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겠는데, 사실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어서 그가 겪은 상황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서원이 멍하니 ‘그랬구나…….’ 하며 상황을 파악하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흘이나 지났는데 형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수술 전에 도겸이 오기는 했었으나, 사모님에게 허락을 구해 잠시 나온 거라고 들었다. 회장님이 나흘이나 제 간호를 하도록 봐줬을 것 같진 않은데?

“근데 형은 어떻게 여기 있어요? 그때, 저택에서 나오는 거 하루만 허락받았던 거 아니었어요?”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

도겸이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다는 듯이 진지하게 눈을 맞추며 답했다.

제가 수술 들어가기 전에 투정처럼 했던 말을 지킨 걸까.

수술이 끝난 뒤 도겸이 있기를 원하기는 했으나, 제가 나흘이나 정신을 못 차릴 줄은 모르고 했던 소리였다. 의식도 없는 저를 나흘이나 지켜보게 한 것이 미안해졌다. 더군다나 도겸이 회장님에게 얼마나 압박을 들었을지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래도……. 간호하는 거 허락 안 하셨을 텐데.”

“부모님께 허락받았어. 그리고…… 너랑 나 사이도.”

“……네?”

도겸의 말에 서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장님이랑 사모님이 저와 형 사이를 허락했다고? 사모님이야 도겸에게 워낙 마음이 약한 분이시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회장님이 허락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수술 후 누워서 사경을 헤맨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허락을 하셨다고? 그게 더 어렵지 않나? 특히나 회장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언쟁을 펼쳤던 터라, 돈도 없고 예의도 없는 오메가로 인식됐을 것 같은데…….

서원은 이리저리 회장님이 저를 허락할 만한 명분이 있었나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왜요? 제가 뭘 했다고 허락을 받아요?”

“……사실, 너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부모님이 오셨거든. 내가 복귀를 안 하니까 데리러 온 거였는데, 두 분이 찰떡이를 보신 거야.”

도겸은 천천히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겸의 말로는, 수술 후 의식을 잃은 서원을 간호하느라 집에 돌아오지 않는 도겸을 잡아 오기 위해 회장님은 사모님과 함께 병실을 찾아왔다고 했다.

당시 도겸은 탯줄을 자르고 있었는데, 수술실에서 나오는 즉시 도겸을 붙잡으려다가 찰떡이가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했다.

도겸은 그날, 수술실을 나오면서 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찰떡이를 빼앗아 갈까 봐 경계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사모님이 찰떡이를 바라보다 꺼낸 한마디에 회장님이 걸음을 돌렸다고 했다.

‘어쩜 도겸이 갓난아기 때랑 똑 닮았네……. 그렇지 않아요, 여보?’

찰떡이는 아들로 태어났는데, 갓 태어난 모습이 도겸의 어릴 적 모습과 판박이었다고 했다.

사모님이 추억에 젖은 얼굴로 묻자, 회장님이 잠잠한 눈으로 찰떡이를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섰다고 했다. 도겸에게 복귀하라는 말도, 찰떡이를 데려가려는 조치도 하지 않고 유유히.

도겸은 잠시 그날을 떠올리는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러고 이튿날에 아버지가 나랑 너 결혼하는 거 허락하셨다고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

“……찰떡이를 보고 무슨 생각이라도 하신 걸까요?”

“글쎄……. 난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나 태어났을 때 엄청나게 기뻐하셨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그때 생각이 난 거 아니냐고 하시던데.”

서원의 물음에 도겸이 다소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추측에 서원은 흠……, 하고 미간을 좁혔다. 정말 그런 이유인 걸까? 제가 보기에 회장님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는 부모라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이유라면 생각보다 인간적인 분이었던 걸지도……. 제가 본 회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셨지만, 고작 한 번밖에 본 적이 없기에 단언할 수 없기도 했다. 게다가 도겸과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해 놓고서는 서로 좋아하고 있던 것을 모르고 있었듯이, 몇 번을 봐도 모르는 게 사람 속이니 제가 회장님의 뜻을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도겸과의 사이를 허락해 주신 건 축배를 들 만큼 기쁜 일이었다. 다음에 회장님을 만나 뵙게 되면 그때는 신경전이 아닌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다만, 앞으로는 차근차근 관계가 개선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원이 내심 그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데, 도겸이 가만히 서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찰떡이가 공이 많네. 나랑 너 사이도 이어 주고, 결혼도 허락받게 해 주고.”

“그러게요. 아, 그런데 찰떡이는 어디 있어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찰떡이를 보고 싶어졌다. 회장님도, 사모님도 다 봤다는데, 제 눈에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당장이라도 보고 싶은 기색을 내비치는데, 도겸이 조금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아직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있어서…….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보고 싶으면 면회 얘기해 볼게.”

왜 난감해하는 건가 했더니만, 조산으로 태어난지라 상태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찰떡이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있다는 게 희소식은 아니었지만, 서원은 제가 수술을 하고 아이를 잃을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남들은 절망적으로 받아들일지 몰라도 서원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느낌이었다.

서원은 슬퍼하기는커녕, 잔뜩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요.”

“알겠어. 금방 가능할 거야.”

서원의 순수하게 반짝거리는 눈에, 도겸은 서원이 혹여나 찰떡이의 상태에 슬퍼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것도 잊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엄마가 간호사와 의사를 대동하고 돌아왔다.

도겸은 곧바로 병실 침대 등받이 각도를 조절해 서원이 편하게 침대에 등을 기대앉게 도왔다. 서원이 제대로 앉자, 의사와 간호사가 서원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며 이것저것 확인했다.

의료진들은 서원이 의식을 나흘이나 찾지 못했기에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꼼꼼하게 살폈는데, 다행히 그런 문제는 없었다.

의사는 이렇게까지 차도가 좋다는 것에 놀란 듯 차트를 보며 조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젊어서 그런가. 회복이 빠르네요. 이대로라면 금방 괜찮아지시겠는데요. 별달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아! 저…….”

의사는 용건은 끝났다는 듯이 돌아가려다가, 서원의 말에 발걸음을 붙잡혔다.

“더 궁금한 거라도 있으세요?”

한참 회진을 돌아야 하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빨리 용건을 말해 주길 원하는 것이 의사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서원은 조금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이를 보러 가도 괜찮을까요?”

좀 전에 도겸이 얘기해 보겠다고 했지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서원은 지금 당장 찰떡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

서원이 기대를 품은 눈으로 묻자, 의사가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 아직 상처가 다 아문 게 아니라서, 그 몸으로 거동하기 힘드실 텐데요.”

“저는 괜찮아요.”

서원이 눈을 반짝거리며 의욕을 철철 드러냈다. 아픈 건 뒷전이고, 허락만 해 주면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었다.

서원이 열의에 가득 찬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자,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의사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주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최대한 안 움직이시는 게 상처 회복에 좋긴 한데……. 휠체어 타고 가셔서 보는 건 가능해요. 팔에 힘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 안아 보지는 마시고요.”

“네, 그럴게요.”

“그럼 시간 맞춰서 보러 오시면 되는데……. 마침 삼십 분 뒤에 보실 수 있네요. 그때로 시간 맞춰 드릴까요?”

“네? 네! 좋아요.”

서원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휠체어든 뭐든 볼 수만 있다면 삼십 분은 무슨, 몇 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서원이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자, 의사 역시 사르르 표정을 풀었다. 그는 잠시간 서원을 바라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도겸의 존재를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의사는 언제 표정을 누그러트렸냐는 듯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러면 말 전해 놓을 테니, 쉬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서원이 인사하자, 의사가 걸음을 돌렸다. 앞장서는 의사를 따라 진찰을 보기 위해 우르르 들어왔던 사람들이 쭉 빠져나가고, 병실에 남은 서원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서원의 얼굴에서 좀처럼 웃음기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자, 곁에 앉아 있던 도겸이 덩달아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서원이 물어 뭐하냐는 듯 대답했다. 그 누구보다 가장 아이를 보고 싶었을 사람이 저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남들보다 가장 늦게 보게 됐으니 얼마나 애가 끓는지 모르겠다.

서원이 평소와 달리 한껏 들떠 말하자, 도겸은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휠체어 가져올 테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고마워요.”

도겸은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서원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더니, 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만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도록 입맞춤을 한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휠체어를 가지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은 휠체어를 끌고 일인실로 돌아왔다. 도겸은 서원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어 휠체어에 앉는 것을 도와줬다.

걸려 있던 링거를 휠체어에 달고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도겸이 겉옷을 챙겨 입더니 깜빡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뭐하려고요?”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으나, 병원에서 시간 약속은 금과 같았다. 미적거리다가 늦어서 오늘 찰떡이를 못 보게 될까 봐 마음이 조급했다. 여차해서 오늘 못 보더라도 다음에 볼 기회가 충분히 있겠지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서원이 재촉하듯 묻는데, 도겸이 사물함에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챙겼다. 뭘 챙기는 건가 빤히 바라보는데,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남색의 두꺼운 점퍼였다.

“밖에 추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서원이 어깨에 점퍼를 걸쳐 줬다. 팔에 링거를 꽂은 탓에 옷을 입는 것까지는 힘들었다.

건조하고 쌀쌀한 겨울이긴 했지만, 병원 안은 하나도 안 추운데……. 그래도 그가 챙겨 주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아 고마워 받아들이는데, 도겸이 대뜸 제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고 앉는 도겸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가 제게 청혼했던 날이 떠올랐다. 민망함에 화닥닥 얼굴을 붉히는데, 이어진 도겸의 행동은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신고 벗기 편하라고 도겸이 가져다 둔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슬리퍼를 벗기더니 제 맨발을 만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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