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생각하지도 못했던 서원의 요청에, 도겸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멋있고 예쁜 말을 해 주는 것보다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 주는 것이 더 와닿을 수 있었다.
도겸은 조금 당황하여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두 팔을 벌려 서원을 끌어안았다. 도겸이 서원의 등허리를 끌어안자, 서원이 힘없이 제 어깨에 턱을 기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이런 탓인지 도겸은 그게 서원이 제 페로몬을 깊숙한 곳까지 삼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 도겸도 숨을 깊게 들이 삼키며 서원의 페로몬을 가슴 한가득 품었다. 서원도 제 페로몬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도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원에게 일방 각인을 해 놓고서는 오랜 시간 보지 못해 그의 페로몬을 그 누구보다 그리워했고 갈망하고 있었다.
익숙하기도 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콤하고 은은한 페로몬을 폐부까지 들이켜자 답답하게 억눌려 있던 것처럼 죄이던 두통이 개안하는 것처럼 맑아졌다. 그에 도겸은 새삼 서원의 존재가 제게 얼마나 커다란지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내가 사랑하는 서원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다.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서원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자 서원이 자그마하게 말했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인데도 그간 서원이 얼마나 저를 그리워했는지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서, 도겸은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었다. 제가 더 노력해서 아버지의 사람들에게서 도망쳐야 했는데. 그 전에 식사 자리에 서원이를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함정에 걸릴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임신시키지만 않았어도 서원이가 이렇게 괴로워할 일이 없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알지만, 제가 ‘더 잘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안해.”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회장님이 그러신 건데.”
“그래도…….”
“자꾸 형답지 않게 그러면 내쫓을 거예요.”
서원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꽤 엄한 목소리로 했다.
도겸은 서원이 저를 절대로 쫓아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서원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도겸은 서원이 제가 부탁하는 것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좀 봐줘. 좋아해서 그래.”
“……진짜 형은.”
이런 순간에마저도 도겸이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부탁하자, 서원이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도겸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을 힘도 없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타이밍 나쁘게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도겸이 힐끗 고개를 돌아보자, 서원의 어머니와 간호사가 이동식 침대를 복도에 세워 놓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서원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서원은 씁쓸한 시선으로 도겸을 바라보더니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도겸에게 물었다.
“저 수술 다녀오면…… 형이 없을 수도 있겠죠?”
서원은 수술이 끝난 뒤에 도겸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술실로 떠나기가 무거운 듯했다.
도겸이 잠시 나온 것이기도 했고, 단순히 하루 헤어지는 게 아니라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라리 기다림에 기약이 있었더라면 서원도 이렇게까지 수술실에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금방 끝날 수술이 아니긴 했지만, 오늘 안에 끝날 거였다. 하루 허락을 받았으니 충분히 서원이 수술을 받고 나오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거였다. 저도 최대한 그러고 싶었고.
도겸은 서원의 손을 꽉 붙잡으며 단언했다.
“있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고마워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수술 후에 도겸이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어서가 아니라, 도겸이 마치 전쟁터를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대답하는 것이 조금 웃긴 눈치였다.
“윤서원 씨. 수술실로 이동할게요.”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수술 시간은 서원과 도겸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듯 재촉하는 말에, 도겸은 어쩔 수 없이 서원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간이 침대로 이동하는 것을 부축했다.
서원이 간신히 간이 침대에 눕고, 도겸은 그런 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 잘 받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고마워요.”
“사랑해.”
주변에 간호사도, 서원의 어머니도 계셨지만, 도겸은 개의치 않고 사랑 고백을 한 뒤 서원의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맞췄다.
기력이 없는 와중에도 서원은 그게 좋은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생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며, 도겸은 조금 안심했다.
어디서 들은 바로는 수술도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다. 마음가짐도 중요하고. 그러한 면에서 서원이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기력을 조금이나마 되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고백을 마지막 인사로, 서원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실 앞, ‘수술 중’이라는 글자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도겸은 참고 있던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서원의 앞에서는 두려운 걸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 덤덤한 척하고 위로했지만, 사실은 저도 마음이 굉장히 복잡했다.
예전만 해도, 도겸은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고, 꼭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느니 그런 강박증에 시달려 본 적도 없다. 자연스럽게 생기면 생기겠지, 그런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찰떡이가 제 아이라는 걸 알고 태아 사진을 봤던 그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좋아서, 찰떡이가 부디 태어나 우리의 가족 구성원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특히나 서원이는 열성 오메가라 다음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더욱이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도 있었다.
서원이도, 찰떡이도 강한 아이니까 잘 버틸 수 있으리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서원이와 함께 할 미래는 변치 않겠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도겸은 굳세게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어머니와 함께 수술실 앞을 지켰다.
* * *
똑, 똑…….
흐릿하게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추를 단 것처럼 눈 뜨기가 무거웠다.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저번에 제가 누워 있던 병실 천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뒤에 수면 마취를 했었는데……. 시야가 까맣고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하고, 으슬으슬해질 정도로 추웠다가 등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뜨거워지기를 반복한 게 전부였는데, 수술이 끝난 모양이었다.
수술의 후유증인지 몸은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때만큼 기력이 없진 않았다. 확실히 상태가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차 되찾고 있는데, 이윽고 먹먹한 귀 너머로 놀란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서원아.”
“서원아!”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도겸과 엄마가 놀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 다 과할 정도로 많이 놀라 있긴 했지만,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수술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서원이 왜 둘 다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냐며 물으려는데, 저를 보던 엄마가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가, 간호사 불러 올게요. 도련님이 잠시 지켜 주고 있어요.”
“네, 다녀오세요.”
정신이 들면 간호사를 부르라고라도 했나? 서원이 급히 병실을 나가는 엄마를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도겸이 서원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서원아. 정신이 좀 들어? 몸은 좀, 괜찮아?”
“네. 그런데…….”
서원은 분명, 입을 열 때까지만 해도 왜들 그렇게 놀라는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었다. 수술을 끝냈으니 찰떡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그런데 막상 입을 열고 나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왜 울고 있어요?”
도겸이 갑자기, 저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에서 제게 고백했을 때보다 더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수술 전에 입고 있던 옷과 지금 입은 옷이 다르고 그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잠시 봤을 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뭐지? 혹시……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수술을 잡기 전, 서원은 수술에 관한 주의사항을 들었다. 의사는 참담한 어조로 제가 하혈을 너무 많이 해서 상태가 너무나도 좋지 않다고, 조산할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면 아이와 자신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도 가정했었다.
그때 함께 설명을 듣던 엄마는 찰떡이보다는 무조건 저를 살려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을 했었는데……. 혹, 그런 상황이 온 건 아닐까?
찰떡이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정말 그렇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서원이 복잡한 시선으로 도겸을 바라보는데, 제가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죽을 뻔했어. 나흘이나 정신을 못 차렸다고.”
“……제가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죽을 뻔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