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약속장소는 이전에 그와 지냈던 저택이었다.
서원은 차에서 내려, 익숙한 저택을 바라봤다. 제가 그곳에서 지냈던 나이를 생각하면 저택은 꽤 연식이 있을 텐데도 관리를 잘해서인지 십여 년 전과 같이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저택 외관을 가만히 살피며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도겸이 호출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대문이 열렸다.
“들어가자.”
가만히 열린 문을 바라만 보고 있자, 도겸이 서원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서원은 앞장서는 도겸을 뒤따라, 마당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입구에는 사모님과 중년의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소개를 듣지 않았지만, 서원은 눈앞에 있는 중년의 남성이 회장님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어깨너머로 본 기억이 흐릿하게 나기도 했고, 도겸이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예전에 도겸을 보고 집안이 이리 대단하지 않았다면 연예인처럼 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든 뭐든 얼굴로도 먹고 살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출중한 외모는 회장님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나 보다. 외모만 보아도 특유의 중압감이 있고, 근사하셨다.
붕어빵이라고들 소개하는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닮은 건 처음 보는데……. 신기함에 회장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도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그래, 왔구나.”
회장님은 덤덤하게 도겸을 맞이했다. 회장님의 곁에 서 있는 사모님은 표정을 봐서는 무척이나 도겸이 반가운 눈치였지만, 회장님의 눈치를 보고 계시는 건지 가만히 계셨다.
도겸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회장님의 시선이 서원에게로 향했다. 서원은 회장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급히 허리를 깍듯하게 굽혔다.
“아, 안녕하세요…….”
“…….”
서원이 어색하게 인사하고 허리를 펴자, 회장님과 사모님의 시선이 제게로 모여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못마땅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하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도겸의 뒤로 슬그머니 숨고 싶은데, 부담감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도 않았다.
서원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굳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식사하자고 해서 당황했을 텐데, 먼 길 왔구나.”
회장님은 서원을 반기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적대하는 것 같지도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원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악수하자는 모양새였다.
안 그래도 회장님의 존재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한데, 속을 알 수 없기까지 하니 더 무서워졌다. 서원은 흠칫 떨면서도, 황급히 회장님의 손을 맞잡았다.
“아,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
손을 꽉 잡는데, 회장님이 빤한 시선으로 서원을 훑어봤다. 시선을 받고 있을 뿐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역시 회장님도 보통은 아니신 것 같아……. 손을 놓아주질 않으셔서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는데, 가만히 서 계시던 사모님이 자연스럽게 끼어드셨다.
“얘기는 식사하면서 나누게, 손부터 씻고 오렴.”
“네…….”
사모님의 말에 회장님은 그제야 손을 놓아주셨다.
사모님과 회장님은 돌아보지 않고 먼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서원은 도겸의 안내를 따라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향했다.
서원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면서도 회장님이 저를 바라보던 시선의 느낌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다.
왜 그러신 거지? 이유는 몰라도, 좋은 의미는 아닌 것만 같았다. 아직은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저를 파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 * *
빈손으로 오기 뭣해 저택을 오기 전 사 온 과일을 건넨 뒤, 서원과 도겸은 손을 씻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하얀 식탁에 갖가지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집인지 레스토랑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운 양식의 향연이었다.
저택에서 먹는다고 하기에 간단한 가정식을 생각했었는데, 요리 차림새를 보니 요리사를 초청해 차린 것 같았다. 그의 집안이 우리 집과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이 침을 꼴깍이며 호화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보는데, 사모님이 입을 열었다.
“들어요.”
“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서원은 감사 인사를 하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었다. 서원은 도겸의 부모님에게서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잘랐다.
예전에 그의 페로몬 파트너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스테이크도 잘 못 썰곤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질하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많지 않았으니까. 당시에 도겸이 일대일로 칼질하는 법을 알려 줬던 덕분에, 어설프지 않게 고기를 썰 수 있었다.
깔끔하게 고기를 썰어낸 서원은 한 입 크기의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질기지도 않고 육즙이 한가득 느껴지는, 일등급 요리장이 구워 준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서원은 쩝쩝거리는 소리 없이 오물거리다, 말끔하게 삼키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구나.”
사모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어쩐 건지, 덤덤하게 대답하시고는 식사를 이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식기가 조용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분명 맛있는 스테이크였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음식에 집중할 수가 없어졌다.
어색해……. 제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도겸에게 도움을 구하려 곁눈질로 바라보는데, 그는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듯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갑갑함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있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회장님이었다.
“사정은 들었다. 내세울 거 없는 집안에 가정 형편도 그다지 좋지 않고. 심지어 열성 오메가라지?”
처음부터 공격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있더라면 조심스럽게 물어봐야 할 내용이었으나, 회장님은 저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서원은 자신이 그들의 기준에 한참 모자랄 것이라고는 예상하였다. 사모님도 그러셨으니까. 그렇지만 무시가 기저에 깔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서원은 조금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나이가 몇이지?”
“스물여섯 살입니다.”
“어리군.”
회장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혀를 차는 소리에 서원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어린 게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걸까? 요즘 시대에 스물 중반이 결혼하는 경우가 흔하진 않으므로 이르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아니면 저와 도겸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상황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서원이 스테이크를 먹지도 못하고 깨작거리며 의기소침해 있는데, 회장님이 말을 이었다.
“어려서 생각이 짧다고 하더라도, 살갑게 받기 힘든 상황인 건 알고 있겠지.”
“아버지.”
“넌 가만히 있어.”
대놓고 낮잡아 보는 말에 도겸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가 한 소리를 들었다.
그에 도겸은 물러서지 않고 대꾸할 기세였으나, 서원이 먼저 입을 열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회장님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눈치였으니,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 건지 궁금했다.
“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좀 통하겠구나. 요 며칠 동안, 도겸이를 수술시켜야 할지, 임신했다는 아이는 또 어떻게 할지. 아내랑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봤다.”
회장님은 심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수술은 일방 각인을 푸는 수술을 말하는 듯했다.
일방 각인을 푸는 수술이야, 서원도 예전에 찾아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도겸이 그 수술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일방 각인이 풀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저를 사랑할 거라는 자신이 있기에 두렵지 않았다. 그저 뒤따를 부작용만 걱정될 뿐이었다.
그것보다도 아이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다니……. 설마 아이를 지우라거나 내놓으라고 하려는 걸까?
순간 긴장감으로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도겸의 일에 대해서는 이제 어떤 난관이든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는데, 아이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서원이 마른침을 꼴깍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회장님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각인을 푸는 수술을 하는 건 부작용이 있으니 도박이나 다름없고, 둘이 만나는 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혼은 안 돼. 너희들 관계는 딱 거기까지야.”
호감을 품고 만나는 건 봐줄 수 있어도, 결혼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서원은 아직 도겸과 결혼할 생각이 없긴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진지하게 만나 보기로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결혼을 논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최근 도겸과 함께하는 미래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제 차츰차츰 도겸과의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제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부모님에 의해 안 된다고 가로막혀 버렸다.
그 말을 들은 도겸이 확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도겸은 서원과의 결혼을 바라고 있었고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고 부탁까지 한 참이었다. 서원이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고 싶어 하는 듯해서 한 번 물러났었지만, 이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도겸은 딱딱한 목소리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결혼은 저희가 선택합니다.”
“지금은 일방 각인을 해 버렸으니까 저 녀석 없으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지만, 한순간일 뿐이야.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아버지 말 들어라.”
“아버지!”
도겸이 발끈하여 버럭 언성을 높였으나, 회장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회장님은 기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아이도 지우라고 하고 싶은데, 우리 가문에서 키우는 거로 할 테니까 그거로 끝내.”
“…….”
아이에 대한 말에 서원이 수저를 들고 있던 손을 움칠거리며 입 안쪽 살을 꾸욱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