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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36)

<106화>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진지하게 말하기에, 어제 갔던 아쿠아리움처럼 좋은 곳을 데려가려는 건가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도겸이 가자고 한 곳은 그런 특이하고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

서원은 실내로 들어와 손을 씻고 나오면서도 정말 이거로 되겠냐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많이 와 보셨으면서 집들이를 꼭 해야겠어요? 명의 이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형네 집이었으면서…….”

도겸이 가자고 한 곳은 다름 아닌 서원이 이사한 아파트였다.

애초에 이 집은 도겸의 명의였고 그도 많이 와 본데다가 특별할 것도 없는데 굳이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오겠다고 하는 게 황당했다.

서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묻자, 도겸이 너스레를 떨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는 아니잖아. 근데 가구도 다 전이랑 그대로네?”

“멀쩡하게 잘 쓰고 있었는데 굳이 바꿀 필요 없잖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바꿔 줄게.”

“어휴, 됐어요…….”

서원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 집에서 오래 지낸 만큼 가구들도 연식이 좀 있긴 했지만, 가구가 다 좋은 것들이라 시간이 지나도 망가지거나 이상해지지 않았다. 심플해서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서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대꾸했으나, 도겸은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정말 뭐라도 사다 줄 기세라, 서원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근데 데이트 만회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음……. 집에서 영화 보는 거로 어떻게 안 될까?”

서원이 묻자, 도겸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제 몸 뒤로 찰싹 달라붙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그의 품에 안기면 따듯한데, 오늘은 그가 폭신한 니트까지 입어서 평소보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서원은 뒤에서 배 위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도겸의 손길에 살짝 고개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같이 골라 보자.”

도겸은 서원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종종걸음을 걸어 소파로 데려갔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서원을 무릎에 앉힌 도겸은, 소파에 올라와 있던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을 켜자, 새까맸던 화면에 흥미로워 보이는 다채로운 영화 포스터들이 화면에 늘어섰다. 도겸은 화면을 응시한 채로 서원의 어깨에 제 턱을 가볍게 기대며 물었다.

“넌 보고 싶은 거 없어?”

“전 딱히……, 요즘 인기 있는 게 뭔지도 몰라서요.”

서원은 요즘 유행하는 영화가 뭔지,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몰랐다. 평소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하고, 저번에 도망치듯 시골과 섬을 오갔을 땐 거의 문명과 단절되듯 했었다. 돌아오고 나서는 도겸과 하루가 멀다고 만나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 보니 영화를 볼 틈조차 없었고.

서원이 머쓱하게 대답하자, 도겸은 오히려 잘됐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도 고르고 온 거는 아니라. 같이 고를까?”

도겸은 그렇게 말하고는, 리모콘 버튼을 꾹꾹 눌러 최신 영화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창을 켰다.

요즘 포스터를 다들 예쁘고 흥미롭게 잘 만들어서 그런가, 웬만하면 다 재미있어 보이긴 했다. 평소 선호하지 않는 장르인 공포 스릴러, 19금 영화만 아니면 얼추 다 볼 수 있을 듯싶었다.

그런데 영화를 고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게 문제 같은데. 서원은 묘하게 영화 고르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영화 포스터보다 뒤에 닿는 도겸의 몸의 존재감이 더 커다랬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단순히 커다랗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우성 알파라서 골격 자체가 크기도 했지만, 운동을 성실히 해서 다부진 근육이 갑옷처럼 단단하게 덮여 있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복근이 하복부에 단단하게……. 저도 모르게 그의 맨몸을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의식해도 그렇지 이건 파렴치한 변태 같은 짓이었다. 멀쩡한 사람 헐벗은 몸을 상상하긴 왜 상상해?

역시 이런 자세는 부담스럽다. 저를 변태로 만들어 버리고 말이다. 서원은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에 몰래몰래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엉덩이가 그의 무릎에 걸쳐졌을 때쯤, 가만히 있던 도겸이 서원의 아랫배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며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어디 가려고?”

“가는 게 아니라……, 이 자세로 영화 보기는 좀 그래서요.”

“왜? 불편해?”

몸이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도겸이 뒤에 바싹 앉아있는 것이 신경이 쏠려서 그런 거였다. 그러나 도겸은 자세가 불편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허벅지를 벌려 서원이 제 다리 사이에 앉게 자세를 고쳐 줬다.

“지금은?”

“아니, 제가 불편한 게 아니라요. 형은 안 불편해요? 소파가 이렇게 넓은데…….”

“난 하나도. 이게 제일 편한데.”

“…….”

도겸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매번 단정하게 앉는 그가 다리를 쩍 벌리고 사람을 끼고 있는 게 편할 리가 없는데……. 조금이라도 닿아 있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것 같았으나, 그가 편하다는데 구태여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싫으면 싫다고 밀어낼 수 있었지만, 싫은 것도 아니긴 했다. 자세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단지……,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그렇지.

도겸을 돌아보고 있자니, 저만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원은 제가 너무 과하게 그를 의식하는 건가 싶어져, 더 무어라 따지지 않고 그의 몸에 등을 편히 기댔다. 안 그래도 단단한 몸이 더 딱딱하게 굳는 것이 등 너머로 느껴졌다.

아예 몸을 기대니 아까보단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좀 안정감도 느껴지는 것 같고. 서원은 입술을 삐쭉이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에 익은 포스터 하나를 발견했다. 서원은 도겸이 들고 있는 리모컨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어? 이거 어때요?”

“……이거?”

도겸이 침을 꼴깍이곤 되물었다. 영화 한 편 골랐을 뿐인데 묘하게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반응이 좀 이상했다.

고전 명작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로맨스 영화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혹시 이거 보셨어요?”

“아냐, 안 봤어. 이거 보자.”

서원이 그의 반응을 이상하게 느끼고 물었으나, 도겸은 다시 평소처럼 대답하더니 재생 버튼을 눌렀다. 뒤를 돌아볼 틈 없이 금방 화면에 영화 인트로가 틀어졌다.

제작사 로고가 웅장하게 올라오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희대의 미남 알파로 회자되는 주인공이 담배를 물고 나오면서 확 집중됐다.

취향을 떠나 객관적으로 잘생긴 배우라, 사람이 아니라 CG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우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잘생겼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배우를 빤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도겸이 제 손을 잡아 왔다. 깍지 사이에 손가락을 꼭꼭 끼워 가며 꽈악.

갑자기 손은 왜……. 서원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가 마치 영화관에 온 것처럼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너무 빤히 보지 마.”

“……저 배우 보지 말라고요?”

“응. 질투나.”

도겸이 조금 삐친 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질투가 난다고? 배우를 보고 시기 질투한다는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도 그런데, 먼저 영화 보자고 제안할 땐 언제고 남자 주인공을 보지 말라는 듯 구니 황당했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린 후에 물었다.

“그럼 영화는 어떻게 보라고요?”

“그러게. 잘못 골랐다.”

도겸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무슨 영화를 고르든 남자 주인공은 있었을 텐데……. 너무 잘생긴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고른 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꼭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워낙 평이 좋은 영화라서 봐 보고 싶었을 뿐이지. 조금 머뭇거리던 서원은 힐끗 고개를 돌려 도겸을 보며 물었다.

“그럼 다른 영화 고를까요? 음, 영화 보는 거 말고 다른 거 해도 되는데.”

“아냐, 그냥 손만 잡아 줘.”

도겸은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문득 손을 잡고 싶어서 질투라는 핑계를 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질투가 심해도 영화 속 주인공 조금 봤다고 질투할 것 같진 않으니까.

솔직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절 좋아하고 있었던 걸 한참 후에 알아챈 것처럼 제 마음을 잘 모르는 건지. 서원은 그가 조금 귀엽게 보여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영화 감상에 집중했다.

* * *

영화는 왜 명성이 자자한지 알 만큼 흥미로웠다.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앞둔 여자 주인공이 마음이 흔들릴 만큼 멋있고 다정한 남자를 마주하게 되고 불장난처럼 순식간에 깊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작위적인 듯했으나 두 주인공 모두 세기의 미인으로 칭송받기에 이상한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얼굴이 개연성이지.

한참 클라이맥스로 달려가고 있는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왔다. 곧바로 침대로 직행하는데……. 거기까진 괜찮았다. 정사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장면쯤이야 외국 로맨스 영화 보다 보면 흔하게 나오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영화…… 19금 딱지가 붙어 있었던가?

이 정도 보여 줬으면 아침 해가 뜨고 새가 짹짹 우는 장면으로 넘어갈 법도 한데, 잠자리를 연상시키는 노골적인 장면이 꽤 길게 이어졌다. 이상야릇한 소리도 덤이었다. 명성이 이런 쪽으로도 뛰어난 건지 직접적인 노출은 없어도 은밀했다.

낯뜨거운 장면에 서원의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원은 평소 엄마와 텔레비전을 볼 때 키스 장면만 떠도 민망해하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문제는 도겸에게 안겨 있어서 그러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서원아.”

“네, 네?”

빨리 이 장면이 지나가기를 깊이 소망하는데, 영화 보던 내내 말이 없던 도겸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이런 장면일 때……. 힐끗 고개를 뒤로 돌리는데, 도겸이 뜨거우면서도 미묘한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친 두 눈 사이로 야릇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 판이라,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니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외모에 모난 부분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입술만 봐도 참…… 아름다웠다.

무의식적으로 그와의 키스하던 때를 떠올리는데, 도겸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나 화장실 좀.”

아, 화장실…….

무슨 말을 할까 긴장했는데, 다행히 생리적인 현상 이야기였다. 서원이 급히 비켜 주려는데,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순간 뒤로 단단한 것이 닿았다.

이건……. 위치상 그의 성기 같은데…….

얼른 비켜 줘야 하는데, 머릿속이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혹시 그런 의도로 화장실에 가는 건가? 야한 장면이 나와서? 이렇게 묵직해질 정도로 엄청난 장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리현상을 참고 참다 보니 단단해진 걸 수도 있건만, 야릇한 장면을 본 직후라 그런지 서원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말았다.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쁜 짓이라는 걸 아는데,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쉽사리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만일 제가 생각하는 이유라면 굳이 화장실에서 처리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저도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는데…….

서원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비켜 주질 않자, 도겸이 의아하게 물었다.

“서원아?”

“…….”

그에게 마음을 온전히 다 넘겨 버려서 그런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고 서원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저, 형.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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