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부, 부모님? 갑자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겸의 부모님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상황이었다.
서원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조금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혀, 형네 부모님이 갑자기 왜 저를 찾으세요?”
“어제 데이트하다가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잖아.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돌아가니까, 어머니가 네 얘기를 하더라고.”
“…….”
어제 사모님이 도겸에게 전화하기에 제 얘기하실 걸 좀 예상하긴 했었다. 며칠 전 그녀를 독대했고 ‘제 방식대로 해결하겠다’라는 선전포고를 들었으니까. 어제도 일부러 데이트를 방해하려고 전화를 하고 도겸에게 저를 만나지 말라고 한소리 하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적중했다.
근데 어제 도겸과 사모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다 같이 보자고 하시는 거지? 혹시 셋이 마주 보고 앉아서 헤어지라는 말을 듣게 되는 걸까?
서원이 바싹 긴장한 채로 허리에 힘을 줬으나, 도겸은 무섭지도 않은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사귀는 것도 그렇고 너 임신한 것도, 내가 너한테 일방 각인한 것도 다 알고 계시더라.”
“그런가요……?”
제게 일방 각인했다는 이야기는 제가 말한 거였다. 서원이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손끝만 만지작거리는데, 도겸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결론을 지었다.
“다행히 좋은 식으로 이야기가 끝나긴 했어. 그래서인지 한 번 식사 자리 만들어 달라고 하시던데.”
“네? 좋게 이야기가 끝났다고요? 어, 어떻게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좋게 끝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며칠 전, 사모님을 독대했을 때 흐르던 분위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저는 사모님의 기세에 밀리지 않긴 했지만, 그렇대도 그녀는 쉽게 포기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고작 며칠 사이에 마음이 바뀌셨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서원이 이해할 수 없어 물었으나, 도겸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든든하게 대답했다.
“내가 잘 설득했지.”
“뭘 어떻게 하셨길래……. 쉽게 허락하실 분 아니잖아요.”
“뭐, 사실대로 얘기했지. 일방 각인 풀더라도 너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할 거고, 찰떡이도 잘 키우고 싶고……. 그런 정도.”
도겸이 말하면서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말끝을 조금 뭉뚱그리는 걸 보면 단순히 저것만 말한 것 같지만은 않았다. 사모님이 저 정도의 말로 설득당할 분도 아니시기도 하고…….
서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게 도겸을 바라보자, 그 시선을 눈치챈 도겸은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상황을 넘겼다.
“거짓말이나 협박 같은 건 안 했어.”
“…….”
그런 의미로 쳐다본 건 아니었는데…….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나?
어쨌거나 좋게 해결되면 서원에게도 좋은 거였다. 서원이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자, 도겸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마저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런 얘기하게 돼서 미안해. 네가 아직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껜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찰떡이가 있다 보니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아, 아뇨. 부모님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죠. 저희가 평범한 경우도 아니고…….”
서원이 사과할 필요 없다며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순서를 밟았으면 모를까, 저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관계였다. 그의 부모님도, 저희 엄마도 저와 도겸의 관계를 진지하게 보는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좋게 생각하시고 만남을 제안하는 건 맞나? 일부러 찬물을 끼얹으려고 만남을 주도하는 게 아닌지 불안하면서도, 도겸이 그런 면으로는 눈치 없는 편도 아니니 그런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다.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도겸이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몸을 살짝 기대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시간 괜찮아? 너 맞는 시간에 조정해 보시겠다던데.”
“저요? 전 아무 때나 괜찮아서 형이랑 사모님 시간에 맞추면 될 것 같은데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도 아니고. 제일 한가한 제가 시간을 잡는 게 좀 이상했다. 도겸과 사모님이 훨씬 바쁘지 않나…….
딱히 스케줄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 민망하게 대답하는데, 서원은 순간 도겸의 말에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서원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도겸에게 하나 질문했다.
“그런데…… 부모님이라면, 혹시 회장님도 오시는 거예요?”
“응.”
와…….
도겸의 대답을 듣자마자 서원은 넋 놓은 사람처럼 입술을 살짝 벌렸다.
도겸은 계속해서 ‘부모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자연스레 사모님만 떠올리고 있었다. 회장님을 마주한 적이 별로 없기도 해서였다.
회장님이 오신다니……. 놀라우면서도 부담감이 배가 됐다. 사모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회장님까지 오신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피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회장님의 성격을 아예 모른다는 것이 한몫하는 듯했다.
이전에 보았던 풍채를 떠올리면 사모님보다 훨씬 무서울 것 같은데……. 벌써 두려움이 엄습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에 마른침을 꼴깍이는데, 도겸은 서원이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한다는 듯 저도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사실 나도 어머니가 부르실 줄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오신다고 할 줄은 몰랐어.”
“……어떡하죠?”
“어떻게 할 게 뭐 있어. 평소대로 하면 되지. 뭐 대단한 거라도 준비하려고? 뇌물 준비?”
도겸이 뭐가 걱정이냐는 듯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학부모가 학예회 준비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뭐 그리 대단한 걸 준비하려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반응이었다.
“그, 그런 건 아닌데……. 회장님이랑은 한 번도 마주해 본 적 없으니까요…….”
“괜찮아. 나도 이야기 몇 번 안 나눠봤어.”
“……그거 괜찮은 이유 맞아요?”
“나도 사실 아버지가 어떻게 보실지 잘 모르겠긴 해. 근데 뭐……. 나한테 뭐라고 하실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도 할 말은 많아.”
서원이 미심쩍게 묻자, 도겸은 농담이었다는 듯 제대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만일 회장님이 관계를 반대한다면 반박할 거리가 많은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한 것 같긴 한데……. 그의 반응에 서원은 다른 의미로 불안해졌다.
“형……. 저희 싸우러 나가는 거 아니고, 소개하는 자리인 거 잊은 거 아니죠?”
“응. 안 싸울 거야. 애 앞에서 싸우면 안 되지.”
“…….”
도겸은 언제 싸울 기세로 말했냐는 듯 능청스레 대답했다.
아니, 애 앞에서도 싸우면 안 되는 건데……. 상식적인 척 대답하는 게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개념도 없이 막 나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서원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긴장됐던 분위기가 푸스스 풀리자, 서원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는 걸 눈치챈 도겸은 자연스럽게 아까 하던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로 얘기해 볼까?”
“전 좋아요.”
“그럼 시간이랑 약속장소 구체적으로 잡히면 알려 줄게.”
“네.”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사모님과 회장님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지만, 그를 계속 만나고 혹…… 결혼까지 한다면 최소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요즘은 부쩍 도겸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도 하니까……. 가 보자. 혼자 마주하는 것도 아니고 도겸도 함께하니까.
어렸을 적부터 제 세상에 가장 대단하고 멋진 사람은 도겸이라, 그와 함께라면 어떤 풍파가 닥쳐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원이 따스한 용기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아메리카노에 첫입을 댔다.
서원은 그제야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커피를 시켜놓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시골에 디카페인 커피가 없어 못 마신 게 그리 한이 됐었는데, 지금은 디카페인 라테를 눈앞에 두고도 깜빡 잊고 있었다.
라테 특유의 부드러운 맛으로 긴장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겸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맞다, 서원아. 오늘 있잖아…….”
“네?”
갑자기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모님과 만남을 제안했을 때보다 긴장한 모습이라 또 뭐가 있나 싶어졌다.
서원이 조금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도겸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데이트 망친 거, 만회할 기회를 줄래?”
“…….”
뭘 하려고 분위기를 잡나 했더니만……. 데이트 얘기하려고 저런 거였다니. 이상한 얘기를 꺼낸 것도 아니지만, 허무하고 절 놀린 것처럼 느껴졌다.
놀리려고 일부러 진지한 척 얘기한 건가 싶어 황당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이게 아까 얘기보다 긴장할 건가? 제가 거절하기라도 할까 봐? 도무지 기준을 모르겠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괜히 긴장하게 만든 건 얄미워서, 서원은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음……. 이거 다 마시고요.”
“얼마든지. 케이크도 시켜 줄까?”
서원이 허락하자, 도겸은 언제 긴장한 태도를 비쳤냐는 듯 평소와 같이 여유만만한 얼굴이 됐다.
점심 먹고 나왔다고, 안 먹어도 된다고 했으나 도겸은 기어코 조각 케이크를 추가 주문했고 그것까지 다 먹고 나서야 카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