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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36)

<104화>

도겸은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 어머니의 시선을 온전히 마주했다.

그러자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맞대응하다가 먼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힘없이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일방 각인 때문에 단단히 미쳤어.”

“일방 각인이랑은 전혀 관련 없습니다.”

“아냐, 너 아픈 거야. 엄마랑 같이 병원 가 보자. 부작용 덜 하고 잘하는 곳으로 알아볼 테니까…….”

“하……. 그럼 백번 양보해서, 일방 각인 푸는 수술을 받고 난 후에도 제가 서원이를 좋아하면요? 그럼 그때는 저랑 서원이 관계 인정해 주실 건가요?”

“그럴 일 없어.”

“제 물음에 대답 먼저 하세요. 그럴 일 없다면 대답 못 할 거 없잖아요.”

도겸이 회피하지 말고 대답 똑바로 하라며 그녀를 붙잡았다.

도겸은 솔직히 말해서, 웬만하면 일방 각인을 푸는 수술은 피하고 싶었다. 부작용이 너무나도 커서 알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거나 뇌에 큰 영향을 줘서 기억을 잃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하니까.

그렇지만 각인을 푸는 것으로 가족들이 저와 서원이의 관계를 인정해 준다면 수술할 의향이 있었다.

물론 도겸은 가족들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서로의 마음만 통한다면 결혼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서원이는 가족의 허락을 받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서원이의 성격이 그러하기도 하고, 그에게는 저희 부모님이 고용주이기도 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을 받아준 은인이기도 한지라 미움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이해했다.

도겸이 그 점을 생각하며 묻자, 어머니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머뭇거렸다. 당황한 얼굴로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만 달싹거리던 그녀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다면…….”

“…….”

“……그래도 안 돼.”

어머니는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듯하더니 금방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부정하면서도, 장담해서 말했다가 혹여나 각인이 풀려도 서원을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할 때 몰아칠 후폭풍을 생각하기는 싫은 눈치였다.

허무한 대답에 도겸은 터트리듯 숨을 내뱉었다. 어떤 제안을 해도 다 싫다고만 하니, 더는 어머니와 옥신각신 이야기 나눌 이유가 없었다.

“하……. 그럼 수술할 이유 없어요.”

“도겸아. 엄마는…….”

“어머니, 저번에 저 병원에 누워 있는 거 기억나세요?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오셔서 점심 같이 먹었던 그날이요. 저 사실은 그때, 사실은 일방 각인하고 서원이를 며칠간 못 봐서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도겸이 그녀의 말을 제치고 제 할 말을 토해 내듯 짜증스럽게 쏟아냈다.

저번에 제가 일방 각인하고서 서원이를 만나지 못해 불면과 통증에 시달려 병원에 누워 링거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귀신같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왔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원이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지 못했던 터라, 물밑으로 일방 각인을 푸는 방법을 수색했다. 전문적으로 한다는 병원까지 몇몇 알아봤었다. 이제야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도겸은 그녀가 당황해서 움츠린 틈을 타서 마저 말을 이었다.

“저 그때만 해도 서원이에 대한 마음 인정 못 했었고, 각인통이 너무 괴로워서 별걸 다 알아봤어요. 어머니는 쉽게 말해도, 일방 각인 푸는 수술을 강행하다가 진짜 병신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병신이라니…….”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처럼 채연이가 지분 다 먹는 것도 가능해요. 아버지는 병신 된 자식한테 회사 지분 나눠줄 분 아니니까.”

“…….”

어머니는 수술 후 부작용이 엄청나게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지, 도겸이 극단적인 예를 들자 더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완전히 극단적인 예도 아니긴 했다. 그만큼 부작용이 잦은 수술이었으니까.

도겸은 계속해서 강경하게 나가려다가, 어머니의 상처받은 얼굴을 마주하고는 조금 마음이 여려졌다. 일방 각인을 억지로 푸는 것에 대해 저만큼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 이렇게까지 심각한 일을 초래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잠깐 망설이던 도겸은 그녀의 발치에 양쪽 무릎을 꿇고 앉고서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갑자기 제 발치에 앉는 도겸의 모습에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 어머. 갑자기 무릎은 왜……. 도겸아, 이러지 마. 얼른 일어나.”

“어머니가 절 많이 아끼시는 거 알아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큰 것도요.”

일어나라는 말에도 도겸은 무릎을 꿇은 채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정감 있는 투로 말하자, 어머니는 조금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엄마가 그래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 거야. 엄마 마음 알지?”

“알아요. 아는데……, 그렇지만 이건 아니에요. 전 다른 오메가를 만날 자신도, 어머니가 바라던 2세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아요.”

“……지금 협박하는 거니?”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전 서원이가 없어졌을 때, 폐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알았어요. 제가 무어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달려왔는지 의구심이 들고 다 내려놓고 싶었어요.”

도겸이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전에 서원이가 저와의 관계에서 지쳐 도망쳤을 때, 일방 각인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을 받았었다. 서원이와 함께 했던 인생이 전부였던 것처럼 그 부분을 다 도려낸 것만 같았다. 기업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힘들게 쌓아 왔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다 무너트린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서원이는 당연히 제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서원이를 잃고 나서야. 그제야 서원이가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찰떡이 정말 잘 키워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찰떡이가 누구니?”

“아, 서원이가 임신한 아이 태명이에요.”

“무슨 그런 이름까지 지었대……. 촌티 못 버린다니까.”

어머니는 찰떡이라는 태명을 듣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태명을 뭐 그런 촌스러운 이름으로 짓냐는 반응이었다.

찰떡이 이름이 뭐 어때서……. 도겸은 순간 반박하고 싶은 충동이 울컥 일었지만, 그녀의 반응이 좀 전보다 누그러진 것을 느끼고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어쩐지 조금 희망이 보였다.

일순간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으나, 예민하게 곤두세워져 있던 분위기는 차분하게 풀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제 발치에 무릎 꿇고 앉은 도겸을 바라보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진심이라는 거 알겠어. 우리 집안에 그 가난한 녀석 하나 들인다고 타격이 클 것도 아니고.”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

도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 좋았던 것 같은데, 또 뭐가 문제였던 건지…….

힘 빠지네. 또 무슨 이유로 가로막으려는 건가 싶어 미심쩍게 어머니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도겸에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식사 자리 한번 만들 테니까, 그때 다시 얘기해. 그리고 네 아빠 의견도 들어야 하니까.”

그렇다는 건…… 무작정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인가?

도겸은 어머니를 설득하고 있긴 했으나, 오늘 안에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솔직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일방 각인을 풀다가 쌓아 왔던 모든 탑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말에, 제 아들을 수술로 망치는 것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오메가 하나 허락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걸지도…….

도겸이 놀라움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야겠다.”

“이렇게 갑자기요?”

“엄마 이제 피곤해. 더 나눌 이야기도 없고.”

어머니는 의견을 굽히면서도 싫은 마음은 여전한지, 이 주제로 더는 이야기 나누기 싫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걸음을 신발장 쪽으로 옮겼다.

도겸이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키며 그녀를 졸졸 쫓아가자, 그녀가 새까만 구두에 발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완전히 허락한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아까우니까.”

“……서원이랑 이야기 나눠 보시면 생각 바뀌실 거예요.”

“그건 그때 되어봐야 알겠지. 나오지 말렴.”

어머니는 웬일인지 배웅 나올 필요도 없다고 한사코 거절하더니 집을 나갔다.

탁, 띠리릭!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도겸은 멍하니 닫힌 현관문을 바라봤다.

그녀를 설득하고 나름대로 희망적인 결과를 얻어낸 것이 회사에서 어떠한 실적을 냈을 때보다 비현실적이었다. 가족의 허락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허락 비슷한 것을 받으니 기분이 고양됐다.

“서원이가 알면 좋아하겠지.”

퍼뜩 서원의 생각이 든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로 소식을 전하려고 걸었는데, 기쁜 소식을 들은 서원이 맑게 웃을 얼굴이 연상되며 두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도겸은 자연스레 약속을 잡고 내일을 기약했다.

* * *

다음날, 서원은 도겸이 만나자고 한 집 근처의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번 저만 보면 어디 데리고 가기 바쁘더니만, 오늘은 웬일로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는지……. 어쩌다 보니 십 분이나 일찍 도착해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제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서원아.”

“……어? 형?”

불시에 잡힌 어깨에 서원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도겸이 입꼬리를 올리곤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휴일이라 그런지 딱딱하기보다는, 캐주얼한 베이지색 니트에 핏이 살짝 붙는 검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벼운 복장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좋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서원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그가 물었다.

“일찍 왔네?”

“아……. 어쩌다 보니까요…….”

서원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일찍 나왔다고 해도 되는데, 왠지 데이트에 기대해서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나온 것처럼 보일까 봐 어물쩍 대답하게 됐다.

다행히 도겸은 대답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슬쩍 메뉴판을 살펴보며 서원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

“아, 전 디카페인 라테 마실까 해요.”

“그래. 내가 주문할 테니까 먼저 앉아 있어.”

아직 자리 많아서 먼저 자리 잡을 필요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만 창가 자리에는 딱 한 자리만이 비어 있어서 서원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잠시 기다리자, 도겸이 제조된 음료까지 받아와 자리에 돌아왔다. 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디카페인 라테를 서원에게 내밀었다. 힐끗 보니 그의 것은 아메리카노였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서원아, 나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

디카페인 라테를 양손으로 잡고 끌고 오는데, 도겸이 평소보다 조금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할 말을 하려고 전화나 메시지로 안 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까지 하나 긴장했겠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쁜 말을 하려는 건 아닌 듯했다.

묘하게 들뜬 느낌인데……. 혹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걸까? 아니면 요즘 그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데이트를 하니까 오늘도 그런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나?

“할 말이요? 어떤 거요?”

“부모님이 너 좀 만나 보고 싶다는데, 다음 주에 시간 괜찮아?”

서원이 반짝반짝한 기대감을 품고 물었으나, 도겸에게서 나온 말은 폭탄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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