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도겸은 서원을 이사한 아파트까지 바래다준 후, 서둘러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빠져나오자, 집 앞에 있는 찻집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것이 통창 너머로 보였다.
어머니는 고상하게 차를 드시며 책을 읽고 계셨다. 서원과의 저녁도 파투 내고 급하게 달려온 저만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감상이 들 만큼 우아한 광경이었다.
……잘 계시면 좋은 거겠지. 도겸은 애써 허무한 마음을 지워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왔니?”
어머니는 도겸을 발견하자마자 책을 덮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반겼다.
좋은 모습이었지만 도겸은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다. 도겸은 덩달아 미소 짓기보다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이러지 말라며 그녀를 타박했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저도 생활이 있는데.”
“알아, 아는데. 엄마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뭔데요?”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밖에서 할 만한 이야기 아니야.”
어머니가 책을 가방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자는 행동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시간을 끄는 건지……. 솔직히 데이트를 망쳤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를 않아서, 그냥 여기서 얘기하고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집안의 중대사 이야기를 하려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그런 일이 있곤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도겸은 어쩔 수 없겠다 싶어, 일단 그녀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머니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넓어서 옆에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도겸은 앉지도 않고 맞은편 자리에 서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진짜 무슨 일인데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너, 가정부 아주머니 아들이랑 만난다더라?”
“…….”
여태까지 관철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담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겨서 다급하게 저를 찾아온 게 아닌가 했는데……. 완전히 헛발 짚었다. 저와 서원의 관계를 캐묻기 위해 찾아온 거였다니. 어쩌면 오늘 막무가내로 기다리겠다고 한 것도 제가 데이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었다. 도겸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냐는 듯이 일단 가볍게 대꾸했다.
“자주 만나는 거 알고 계셨으면서 뭘 새삼스럽게요.”
“그런 의미로 만나는 거 아니잖니.”
“…….”
도겸이 아닌 척 자연스럽게 회피했으나, 역시 그녀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서원이와 만나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된다면 까다로운 일이 생길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전에 서원이와도 만일 우리가 결혼한다면, 저희 부모님이 허락해 주실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빠르게 사실이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만남만을 가지는 상황이었다면 아니라고 잡아뗐겠지만, 도겸은 진지하게 서원과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도겸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수해야겠다 싶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무슨 말 하실지 알 것 같으니까,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저희 진지하게 만나고 있고, 헤어질 생각 없습니다.”
“도겸아. 너 지금 큰 착각하고 있는 거야. 엄마가 말했었지? 우성 알파는 열성 오메가한테 끌리지 않는다고. 너도 안다고 그랬었잖아.”
“그럼 제가 비정상이었나 보죠. 전 서원이한테 끌립니다.”
도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 때에 저 말을 들었더라면 지레 겁먹고 물러났을 것이다. 저 또한 그 문제로 오래 고민했고, 제가 비정상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드니까. 그렇지만 제 마음이 이미 서원이에게 가 버렸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비정상이면 뭐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재벌 우성 알파들 사이에만 도는 말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제가 열성을 만나든 베타를 만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들 사이에서만 비정상이 될 뿐이었다. 비정상들 사이에서 정상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제 눈에는 마음도 없으면서 집안이 맞는다는 이유로 결혼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소신껏 행동해야지.
도겸이 그런 생각으로 대꾸하는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측은한 것을 보듯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마치 저를 위해 진심으로 조언하는 것이라는 듯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리며 설득했다.
“네가 지금 잠깐 아파서 그래. 일방 각인만 풀리면 다 해결될 일이야.”
“일방 각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 그건 병원 진료 기록 뒤져보면 알잖니?”
“…….”
미심쩍은 대답에 도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번에 제가 시도해 본 바로, 병원 진료 기록을 파헤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어머니가 해냈다는 것도 그렇고, 말하던 태도 또한 묘하게 자신감이 흐려지는 것이 좀 수상쩍게 느껴졌다.
제가 일방 각인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저와 서원이, 배 비서. 그리고 진단을 내려준 의사밖에 없는데……. 잠시 생각하던 도겸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원이 만난 건 아니죠?”
“아니, 아니야. 아무튼 일방 각인만 풀리면 될 일이잖아. 각인 잘 푸는 병원 알아볼 테니까 헤어지자. 응?”
어머니는 손을 휘저으며 황급히 부정하더니, 양손을 뻗어 도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간곡히 부탁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왠지 어머니가 서원이를 만난 것 같은데……. 의심스러웠지만, 서원이가 말한 것도 아니고 심증일 뿐이라서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도겸은 냉소적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저 일방 각인 때문에 서원이 좋아하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저라고 일방 각인 풀려고 안 해 봤을 것 같아요? 억지로 각인 풀어내면 부작용 엄청나게 크다는 거 모르시죠?”
제가 서원을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동안 일방 각인을 풀지 못한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부작용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우성 알파이기에 누려 왔던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 그래서 진단했던 병원에서도 단념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던 것이고.
도겸이 쓸모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으나,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하는 병원 알아보겠다는 거야.”
“어머니. 제발, 현실을 부정하지 마시죠. 저 좀 놔두시고요.”
“현실 부정하는 건 너야. 너, 그 아이랑 결혼하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가만 보기만 할 것 같아? 안 그래도 채연이가 그 자리 넘보고 있어서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알아?”
“채연이가 제 자리를 넘본다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네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 그 녀석도 핏줄이라고, 하나라도 주워 먹을 거 있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도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어머니가 경계를 잔뜩 세운 채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채연이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유산을 나눠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듯했다.
“채연이, 그런 아이 아니에요. 하물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아이니까 뭐라도 받아가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요.”
“뭐? 이상하지 않다고? 네 자리를 넘본다고 해도?”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혹시 백화점 말하는 거예요? 그걸 원한다고 하면 차질이 생기긴 하겠지만, 능력도 없는 애한테 무슨 수로 기업을 넘겨요.”
채연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가 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왔고 그녀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습만 봐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도겸은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채연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파악했다.
원래는 저 또한 그녀가 제 이복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감이 있었지만, 백화점 모델로 내세우게 되면서 이야기를 종종 나눴고 이제는 생각나면 가끔 술을 기울일 정도의 사이였다.
술을 마시며 진솔하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채연이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도 확실하게 하고 있고. 저를 경쟁자로 여기는 면모는 전혀 보지 못했다.
눈이 먼 기업가들이 가끔 엉뚱한 사람에게 후계자를 넘기는 일도 있으나, 그런 경우 꼭두각시가 되거나 파멸의 길을 걷는 게 대부분이었다. 제가 아버지를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하더라도 회사를 그런 식으로 굴러가게 둘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일궈낸 기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시니까. 그리고…….
“설령 채연이한테 넘겨준다고 해도, 전 서원이 포기할 마음 없어요.”
만일 제가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면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도겸은 후계자가 되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잘 살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원이 없는 생활을 지냈던 게 제게는 지옥 같았다. 여태까지 아등바등 노력해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을 알았다.
다시는……. 그런 끔찍한 경험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도겸이 어머니를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하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입을 열었다.
“진심이니?”
“네.”
도겸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이를 반려로 들일 수 있다면. 찰떡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만 있다면 저는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었다.
모든 걸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서원이를 탓하지 않을 만큼.
서원이를 영원히, 열렬히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