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쿠아리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놀라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해저터널이라고, 동그란 통로 벽과 천장이 전부 유리관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정말 바닷속에 터널이 생긴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방이 물고기 천지였다.
서원은 ‘우와, 우와!’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름 모를 물고기가 지나다니는 게 왜 이렇게 신기한지 모르겠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보는 것 같아서 서원이 열심히 둘러보는데, 저와 달리 여유롭게 구경하던 도겸이 서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일찍 데려왔을 텐데.”
“아…….”
도겸의 반응에 서원은 정신없이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방금까지의 제 행동을 돌아봤다. 아까부터 그와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물고기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고개를 휙휙 돌리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저는 제 모습을 보지 않으니 별생각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싶어졌다. 그의 눈에는 아쿠아리움 처음 와 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쓱하고 뻘쭘해졌다. 서원은 잔뜩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곤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너무 호들갑 떨었죠.”
“보기 좋은데, 왜.”
“…….”
보기 좋았을 리가 있나. 제 모습이 우습고 재밌었겠지…….
서원은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문득 저만 정신없이 봤지 도겸은 저를 따라오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즐기려고 하는 데이트인데, 어쩐지 저만을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형은 별로 감흥이 없으신 것 같아요.”
“나야 만들어질 때 몇 번 와 봤으니까 엄청 신기하진 않지.”
“그렇구나…….”
서원이 작게 탄식했다. 역시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도겸은 서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근데 나도 재밌어. 너 반응 보는 거.”
“아니, 저 말고 물고기를 구경하셔야죠…….”
내가 전시된 것도 아니고……. 역시 아까부터의 제 반응이 웃겨서 구경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젠 좀 차분하게 관람해야지. 들뜬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마저 관람을 이어 가려는데, 서원은 도겸에게서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고개를 돌리니, 하얗고 커다란 벨루가가 유리창에 붙을 듯 가까이 다가와서 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루가의 외형이 워낙 귀여워서 무섭진 않았는데, 도겸과 대화를 나누느라 방심하기도 했고 눈앞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존재에 깜짝 놀랐다.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에 서원아 저도 모르게 도겸에게 의지해서 바싹 손을 잡고 몸을 움츠렸다. 서원이 온몸으로 놀란 기색을 드러내자, 도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워할 때마다 예쁘게 굴면 놀래켜 주고 싶어지는데.”
“형…….”
“농담이야. 벨루가한테 인사해 주면 묘기 보여 주는데. 한번 해 볼래?”
“……묘기요?”
“응, 벨루가 보면서 손 흔들어 봐.”
손? 서커스도 아니고, 벨루가가 그런 훈련을 받았을 리가 있나…….
혹시 그가 저를 놀리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막상 손을 흔들면 이걸 속냐고 비웃을 것 같았다. 서원이 미심쩍은 눈으로 도겸을 바라봤으나, 그는 어서 해 보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진짜인가? 서원이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벨루가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흔들자, 벨루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서 묘기를 부리듯 빙글빙글 돌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임에도 CG를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서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도겸을 돌아보다 벨루가를 보기를 반복했다.
“뭐, 뭐예요? 어떻게 이래요?”
“저 녀석이 유난히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저런다고.”
“와……. 어떻게 그러지? 고래가 똑똑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서원이 놀라움에 중얼거리며 서커스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벨루가를 쳐다보는데, 안 그래도 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벨루가가 눈까지 웃더니 갑자기 빠르게 헤엄쳐 터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벨루가는 떠났지만, 서원은 여전히 벨루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운에 젖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현실이 꿈보다도 더 아름답고 환상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 *
“재미있었어?”
“네, 엄청나게요! 진짜 너무 예뻤어요. 특히 벨루가 본 거 너무 좋았어요.”
아쿠아리움을 나오며 묻자, 서원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서원과의 아쿠아리움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도겸은 솔직히 이렇게까지 좋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서원은 어린아이처럼 연신 감탄하며 수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도겸은 그런 서원의 모습에서 어릴 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제가 서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많이 커 버렸기 때문인지 서원이 제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벽을 만든 걸 느꼈었다.
그런데 오늘의 서원은 그러질 않았다. 어렸을 때처럼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순수하게 좋아했다. 도겸은 그런 서원의 모습이 마치 제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처럼 와닿아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이라도 일찍 서원이를 좋아하는 걸 인정하고 사랑을 누렸더라면 이런 모습도 많이 봤을 텐데…….’
도겸은 그게 못내 아쉬워서, 서원과 데이트하는 날이면 매일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뿐이랴, 과도하게 기억력이 좋은 탓에 서원이에게 페로몬 파트너라는 이유로 벽을 치고 모질게 굴었던 것들이 생각나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을 수준이었다. 이런 후회를 해 봐야 감정만 소모될 뿐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아는데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앞으로 열렬히 사랑해서 채우면 되지 않을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고, 이전의 일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서원이가 싫어할 만한 것들을 피하면 되지 않을까.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아리처럼 조잘거리는 서원의 말에 반응했다.
“다음에 또 오자.”
“좋아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서원이 배시시 웃으며 끄덕였다.
도겸이 서원에게 멋진 저녁 식사까지 대접하고 끝까지 데이트를 완벽하게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타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 올 상대가 없는데. 배 비서인가? 급한 업무일까 싶어 운전대를 잡기 전에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화면에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쯧.”
하필 서원이와 있을 때……. 도겸이 침잠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단순히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제가 지금 서원이와 함께 있다는 걸 아시면 싫어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전화할 때의 반절 이상은 선 자리 이야기이기도 했고. 혼자 있을 때도 굳이 받고 싶은 전화는 아니었다.
도겸은 어쩔 수 없이 반대쪽 손으로 운전석 손잡이를 잡으며, 조수석에 있는 서원을 향해 말했다.
“서원아, 나 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 잠깐 받고 올게.”
“아……, 다녀오세요.”
서원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뭔가…… 껄끄러웠다.
서원이 받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표정도 평소와 같은데 왠지 떨떠름하고 벽이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지? 내가 뭘 또 잘못했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손에 들린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일단 전화 좀 받고 와서 물어봐야겠다. 도겸은 전화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니.”
- 도겸아. 지금 어디니? 벨 눌렀는데 반응도 없고……. 도어락 비밀번호도 바뀌었더라?
듣자 하니, 집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저번에도 말도 없이 찾아오시더니, 이번에는 또 왜. 도겸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지금 볼 일 있어서 밖입니다. 그리고 제가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 내가 아들 집 가겠다는데 허락을 받아야 하니?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대답했다. 가족 사이에, 엄마가 아들의 집에 찾아오는 게 뭐가 어떻냐는 물음이었다.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 또한 저를 이해해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예 찾아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기 전에 연락 좀 달라고 한 부탁이 그렇게나 어려운가?
오늘처럼 멋대로 찾아오다가 바람맞을 수도 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오늘 늦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다음에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 아냐, 기다릴게.
“제가 언제 집에 갈지도 모르는데 기다리시겠다고요?”
- 엄마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집 앞에 카페 있더라. 차 마시면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와.
“…….”
그녀가 고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오라는 듯이.
그러나 당장 오라는 속내가 훤히 읽혔다. 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는데 마음 편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저 오래 걸려요. 급한 일이면 그냥 전화로 말하세요.”
- 중요한 일이라 안 돼. 기다릴게.
“어머니…….”
도겸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시면 저녁 늦게라도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전화는 거기서 끊겨 버렸다.
도겸은 캄캄해진 핸드폰 화면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어머니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원래 막무가내이신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강도가 더 심했다. 메시지를 남겨도 막무가내로 남아 있을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서원이와 급한 일이 있던 건 아니지만, 오늘 데이트는 감히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분위기를 이어 가 멋진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서원이의 마음을 완전히 얻어내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다, 뒤늦게 차에 올라탔다. 도겸은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서원을 보고는, 아쉬움을 배로 더 느끼며 사죄하듯 말했다.
“서원아. 정말 미안한데…….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네? 저녁 못 먹는 건 괜찮은데,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하아, 그게…… 어머니가 말도 없이 집에 오셔서는, 기다리겠다고 하시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신가 봐.”
도겸이 난처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서원이 아까 발신자를 확인했을 때처럼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금방 수긍했다.
“아……. 그런 일이면 어쩔 수 없죠……. 알겠어요.”
“미안.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전 택시 타도 돼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집에 들어가 보세요.”
“아냐,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안전벨트 매.”
완전히 가는 길이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택시를 태워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데이트는 망쳤지만, 마지막까지 책임은 지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오늘의 기억을 좋게 남겨 주고 싶으니까.
도겸이 말하자, 서원이 머뭇거리다 안전벨트를 찼다. 그때서야 도겸이 굳은 표정을 풀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서, 오늘이야말로 서원이에게 완벽하게 점수를 따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겸은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쓴맛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