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서원아.”
“네, 네……?”
“아까부터 멍한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도겸의 물음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서원이 운전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겸은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운전대에 팔을 살짝 기댄 채 걱정 어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멍하니 눈앞의 룸 미러를 보니, 제가 수심을 가득 떠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던 줄도 몰랐던 서원은 황급히 표정을 풀었다.
“아, 아니에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신경 쓰게 해 드려 죄송해요.”
“걱정돼서 물어본 거라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서원이 사과하자, 도겸은 난감하게 웃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사과하냐는 눈치였다.
사실은 서원은 근래 계속 마음이 복잡했다. 며칠 전 사모님을 만났던 것 때문이었다.
그날, 저 나름대로는 그게 최선이었고 잘 대응한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밤에 자려고 누울 때면 더 좋게 설득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그녀가 자신 나름대로 해결하겠다고 하던 말도 선전포고처럼 들려 신경 쓰였다.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어쩌지.’하고 이따금 생각나는 정도였는데, 도겸을 만나니 부담감은 배가 되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사모님 만났다는 거 들키지 않으려면 표정 관리 잘해야겠다……. 남몰래 마음 다짐을 하는데,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도겸이 시선을 전방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오늘은 어디 가는 거냐고 안 물어봐?”
그러고 보니 그가 차에 타라고 해서 멍하니 올라타기만 했을 뿐, 어딜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물어보는 게 늦은 감이 있지만,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어디 가는 건데요?”
“아쿠아리움.”
“아쿠아리움이요? 갑자기 거긴 왜요?”
그와 한 번도 아쿠아리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 함께 가 본 적도 없고.
예상외의 코스라 고개를 갸우뚱하자, 도겸이 조금 뿌듯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이사하느라 바빴잖아. 괜히 내가 이사하자고 고집을 부린 것 같아서 반성의 의미로.”
“네? 아녜요, 형이랑 엄마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리고 사람 붙여 주셔서 전 하나도 안 바빴어요. 큰 짐이 없기도 했고요.”
서원이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갑작스레 이사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가구는 그대로 두고 온 참이었다. 큰 가구를 옮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작은 짐들을 옮기는 건 도겸과 엄마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특히 도겸이 사람을 다 준비해 준 덕분에 서원이 힘쓰거나 스트레스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 이사할 때 알아보다 보면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많던데, 어찌 그렇게 전문가다운 사람들을 알아서 불러줬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제가 한 일은 별 것 없는데 그럼에도 피곤해 보였다면 아마…… 사모님을 만난 일 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 거겠지.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 보였나. 서원이 멋쩍게 눈 밑을 손으로 문지르는데, 도겸은 비단 그런 이유만 있어서 아쿠아리움에 가는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만날 때마다 먹고 자기만 했잖아. 파트너 때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연인다운 짓도 해 보고 싶어서.”
“아…….”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서원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는 그와 먹고 자기만 해도 좋아서 딱히 그렇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도겸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궁리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진짜 연인다운 짓이라니. 제가 이전에 애인을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앞서 해 왔던 것도 충분히 연인끼리 하는 데이트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보다 더 데이트다운 걸 하겠다고 하니 어떤 걸까 기대됐다.
사모님의 일 때문에 그와 만나서도 집중이 하나도 되지를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분이 달콤해져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가? 서원이 제 자신이 너무 단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도겸은 이미 제가 좋아하는 모습을 봤는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고기 좋아해?”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사실 몇 번 가 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학교 다닐 때 몇 번 가 본 게 전부라서요.”
갈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학생 때나 몇 번 가 봤지 성인이 된 후로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다. 어릴 때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몇 번 가 봤던 게 전부라, 그냥 좀 신기했었던 것 같다는 느낌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그때와 지금은 다를 거라는 거였다. 지금이 더 좋을 거라는 것도.
서원이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쑥스럽게 대답하자, 도겸이 긍정적인 반응을 읽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핸들을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내려 서원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저도요.”
서원은 작게 대답하며, 말갛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도겸이 너무나도 따듯해서 아닌 척하고 뭔가를 숨길 수가 없었다.
여전히 사모님의 일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은 순간의 소중한 시간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도착했다는 말에 서원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보고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곳이 있었어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파란 외벽에 물고기와 상어, 고래와 같은 그림이 다채롭게 그려져 있는 몇 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예 한 건물이 통째로 아쿠아리움인 것처럼 보였다.
서울에 이렇게 큰 아쿠아리움이 있다면 유명하지 않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겸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설명했다.
“아직 정식 개장은 안 했어.”
“네? 그럼 왜 왔어요? 아, 혹시 형네 계열사인가 뭔가, 그런 거예요?”
“비슷한 건데, 다음 주부터 개장이라서 내부는 다 준비됐다고 하더라고. 사람 많아지기 전에 둘이 와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아하…….”
도겸의 설명에 서원이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정식 개장 전에 들어가서 점검하거나 감상할 권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회사와는 완전히 관련이 없는 제가 와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가 데리고 온 거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그를 따라 들어가자, 입구에 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문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직원들은 도겸을 알아봤는지, 저와 도겸이 입구에 다가설 때쯤 깍듯하게 인사했다.
“좋은 관람 되십시오.”
이전에 도겸의 페로몬 파트너로 지내면서 덩달아 VIP가 된 것 같은 취급을 받곤 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서원에게도 방긋방긋 웃어 주며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막아서지 않았다.
아쿠아리움은 들어가자마자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푸른 조명이 감도는 통로를 지나가야 나오는 구조였다. 바깥의 흰 빛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하얀 조명과 멀어지면서 점점 어두워지고 주변이 깊은 물 속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시선을 내리니 바닥에도 물이 수면에 비치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서원은 빨려 들어가듯 아래를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근데…… 개장 전이라면 안에 아무도 없겠네요?”
“가드랑 관리하는 최소한의 인원만 있어. 왜? 사람 좀 있었으면 좋겠어?”
“좀…… 무서워서요.”
실내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아쿠아리움을 가서 무서워했던 기억은 없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너무나도 물속처럼 구조를 짜 놔서 그런 것 같았다. 다른 곳보다 잘해 놓은 건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겁이 났다.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덜 무서웠을 텐데.
서원이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도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몸을 붙이자, 그가 서원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서원이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손잡고 다니자.”
“손…… 이요?”
“어차피 볼 사람도 없잖아. 그리고 여기 안내하는 직원도 없어서 길 잃어버리면 큰일나.”
“…….”
성인이나 된 마당에 길치도 아니고 길 잃어버릴 일이 생길까 싶은데…….
그렇지만 어둡고 파란 조명만 있는 아쿠아리움에서 혼자 남게 되면 무섭긴 할 것 같았다. 서원은 머뭇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도겸의 손을 맞잡았다.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을 꽉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통로가 끝이 났다. 이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서원이 두 눈을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와아……!”
서원은 유리관 안쪽으로 헤엄치는 오색빛깔의 물고기를 보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분명 예전에 아쿠아리움을 왔던 적이 있는데도 오랜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곳이 그때 가 봤던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스케일이 크고 멋져서 그런 건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 소풍을 오는 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물고기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져서 유리관 가까이 다가가는데, 어디선가 가오리가 불쑥 나타나 서원의 눈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가오리는 방긋방긋 웃는 듯한 모습으로, 짧고 뭉툭한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폴짝거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얘 진짜 귀엽다…….”
“가오리에 대해서 뭐 하나 알려 줄까?”
“어떤 거요?”
“얘, 성기 두 개래.”
“……예?”
서원이 가오리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대답하다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듣고는 고물 장난감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도겸에게로 돌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진짜로? 충격받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도겸이 보란 듯이 가오리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다리처럼 달려 있는 거가 그거래.”
“…….”
……내가 저걸 다리라고 생각한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 보면 가오리에게 다리가 달려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긴 하다. 성기가 두 개나 달렸단 말은 더더욱 들은 적 없지만.
서원은 당황스러움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기하네요? 아니, 그것보다…….
“형은…… 그런 걸 왜 알고 있는 거예요?”
“어쩌다 보니.”
지식의 출처가 궁금해져 물었으나, 도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쿠아리움에 들어서고 무섭다가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느꼈었는데, 이젠 또 충격적이네……. 아직 입구밖에 들어서지 않았는데 도대체 몇 가지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데이트는 원래 이렇게 버라이어티한 거구나……. 서원은 그렇게 잘못된 지식을 습득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