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야수가 잡아먹는 듯한 시선에 오금이 다 저렸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조아리고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죄송하다고 말하면 그와 만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 만남을 가지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나.
서원은 인정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문 채, 애꿎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서원이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왔다는 듯 기세 그대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도겸이랑 뒹굴었을 생각을 하면 이런 대우 하고 싶지도 않아요.”
“…….”
“애까지 만들고 말이야.”
……저와 도겸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것까지 알고 계셨구나. 정식으로 자리를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싫었다.
실수로 생긴 아이라고 하더라도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도겸도 함께 저지른 건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저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딱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약을 먹인 새끼들 때문이긴 하지만, 히트사이클이 온 저를 구하려다가 휘말리게 된 거였으니까.
서원이 대꾸 대신 고개만 푹 숙이는데, 그녀가 더 뭐라 하는 것조차 시간이 아깝다는 듯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같은 오메가잖아요? 애 지우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인 거 아니까, 위로금 넉넉히 줄게요. 이건 신분이랑 여권이니까 해외로 나가 살아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미천한 천민에게 적선하듯 혀를 차며 테이블 위로 하얀 돈 봉투를 던졌다. 굳이 내용물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위조된 신분증과 여권, 그리고 돈이 들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유명한 드라마에서 지금과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제가 실제로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원은 무릎 위에 얹고 있던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차 물었다.
“이거 받고……, 아이를 지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낳을 생각이었나?”
그녀가 두 눈을 형형하게 뜨며 물었다.
이전부터 제가 임신했다는 걸 사모님이 알게 된다면 아이를 지우라고 할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 상황을 줄곧 두려워했고.
지금도 그녀가 무섭긴 하지만, 생각한 것만큼은 아니었다. 이건 너무 가볍지 않나 싶을 정도로 허무했다.
위조된 신분증과 여권을 바로 준비해 온 것을 보아 준비를 단단히 하신 것 같긴 한데……. 제가 궁핍한 상황이고 마음이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면 흔들릴 수도 있겠으나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도겸의 집안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 엄마의 집을 해 줄 정도였고……. 섬이나 시골로 도망치며 돈 없이 생활하긴 했지만,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였다. 게다가 도겸이 저더러 쓰라며 카드와 억대의 금액을 통장에 넣어준 상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도겸이 실수로 제게 각인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제가 열심히 도망 다닐 때 제게 돈을 줄 테니 도겸과 헤어지라고 했더라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 아이와 도겸 둘 다 지워 버리라는 건 어떤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말해야 예의 바르고,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됐다. 아직 결혼을 결정하진 않았어도 나쁘게 보여서 좋을 상대는 아니었다.
신중히 말을 고르는데, 그녀는 서원이 순순히 돈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탐나기야 하겠지. 도겸의 아이인데다가 우성 알파의 씨니까.”
“……저는 우성 알파의 아이라서 낳으려던 게 아니라, 제 아이라서 지키고 싶은 겁니다.”
“뻔한 말은 그만하죠. 냉정하게 생각해서, 우리 아들이랑 만난다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해요? 서원 씨가 잘난 점이 뭐가 있어요? 최소한 동등하기라도 해야지, 그런 게 하나도 없잖아요.”
사모님은 고상하게 대우하는 것도 싫어졌는지 노골적으로 약점을 후벼팠다.
저와 도겸의 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십여 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처받을 것도 없는데, 욱해서 그런 걸까? 그게 만나서 안 될 이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원은 마냥 듣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제가 사모님 눈에 차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반대하실 것도 예상했고요.”
“그래서?”
그녀가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줬다. 무슨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는 기색이 강했다.
어쩌면 이것 또한 사모님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도겸이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서원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도련님, 저한테 각인하셨습니다.”
“……각인?”
“네, 일방 각인이요.”
서원의 말에 사모님은 헛것을 들은 사람처럼 되묻더니, 재차 듣고는 놀란 얼굴을 하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일방 각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들은 눈치였다.
“그럴 리가…….”
“믿기 힘드시면 확인하셔도 됩니다.”
“…….”
그녀는 당장 도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전화하면 그녀가 저와 만났다는 것을 알리게 되는 셈이라 그런지 행동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저와 도겸은 처음에 그가 실수해서 각인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실수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사랑과 믿음이 단단하게 있어야만 이뤄지는 행위였다.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노력할수록 그의 각인통의 지옥으로 넣어 버리는 셈이 되니,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그녀로서는 힘들 것이다. 서원은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다, 이전의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전 도련님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현실의 벽이 무서워서 도망쳤었습니다.”
“…….”
“그런데 도련님이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실수로 제게 각인한 게 아닐까 싶어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도련님이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아이를 지켜주겠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를 낳겠다고요?”
“네.”
서원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찰떡이를 지키려고 하는 이상 되바라진 이미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원의 단호한 대답에 잠시 카페에 적막이 흘렀다. 그녀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방 각인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것처럼 보였다.
카페 직원이 커피를 내리는 잔잔한 소음만이 둘 사이를 채우고 있을 때쯤, 그녀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도겸이가 각인한 건 그렇다 치고, 내가 너희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요?”
“음……. 아직 결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해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원 씨는 당연히 우리 도겸이와 결혼을 원하는 거 아니었어요? 결혼하지 않으면 그 아이, 사생아가 되는 건데. 사생아면 아무리 우성이고 도겸의 아이라고 해도 혜택 못 받아요.”
결혼은 정말로 아직 결정하지 못한 건데, 그녀는 서원이 당연히 결혼을 최종적으로 노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서원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싶은 게 당연한 욕구라고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은 제가 아이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도겸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확신이 있는 것만 같았다.
“저보다 결혼을 원하는 건 도련님이고…….”
“…….”
“그리고 전 도련님과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아이는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거고요. 아이는 어떠한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도 없습니다.”
도겸과 만나는 것으로서 얻을 부귀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거라면 그의 곁을 이렇게 오랜 시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고생 끝에도 함께 했던 것이었다.
서원이 단호하게 대답했으나, 그녀는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이유가 있나? 단순히 아이가 가지고 싶은 거라면, 다른 사람과도 충분히 얻을 수 있잖아요?”
“사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열성 오메가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는 게 거의 기적인데…… 이번이 마지막 아이일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습니다.”
“…….”
다음이라는 말이 없다는 말에, 사모님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냉정한 그녀라고 한들, 같은 오메가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원한다면 인생 전반에 있어 큰 의미이니까.
무어라 더 몰아붙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이제 대화는 됐다는 듯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녀는 자리에 내려놓았던 체인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충분히 좋은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는데, 안 받아들이면 제 방식대로 해야겠죠.”
오늘은 그만 가시려는 걸까? 생각한 것보다 순순히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에 서원도 덩달아 일어나자,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난 바빠서 가 볼 테니까 따라 나오지 마세요. 같이 나오면 어색하기만 하지, 좋을 거 없잖아요? 아, 그리고 오늘 일은 도겸이에겐 비밀로 해 주고.”
“……알겠습니다.”
서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사모님은 미심쩍은 눈으로 서원을 잠시 바라보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카페에서 빠져나갔다. 통창으로 그녀가 고급스러운 세단을 타고 떠나는 게 보였다.
차가 실루엣으로도 보이지 않을 때쯤 서원은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입에 댔다. 그녀와 대화하는 동안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는데, 그사이에 차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하…….”
서원은 다 비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어머니를 독대하게 된 것이 어젯밤 벌벌 떨며 두려워했던 것보다 대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기운에 눌리는 듯했다.
그나저나 사모님이 마지막으로 말한, 제 방식대로 해결하겠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도겸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마음에 걸려, 서원은 한참을 더 카페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