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6)

<99화>

이러려던 게 아닌데, 무언의 긍정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도겸으로서는 정말 저를 위해 스타일까지 바꿀 것처럼 보였다. 진심으로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서원은 황급히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왜? 좋아할 것 같은데.”

도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좋아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 굳이 왜 거절하냐는 반응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좋아한 티를 냈나……. 서원은 목덜미가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부정했다.

“제가 만나고 싶은 건 과거의 형이 아니라, 지금이니까요…….”

“…….”

“굳이 저렇게 입으실 필요는 없고요. 저런 옷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보여 주세요.”

“……그래, 다음에.”

도겸은 서원의 말에 수긍했는지, 미소 지으며 몸을 서원에게 기댔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이후로 서원은 앨범을 팔락거리며 뒷부분까지 함께 봤다. 유학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이후로는 다시금 밋밋하고 공적인 사진으로 돌아와 아쉽긴 했지만, 그의 유학 세월을 사진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원에게는 너무나도 값진 시간이었다.

도겸이 차려 준 저녁만 기대하고 왔을 뿐이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조심히 들어가.”

앨범을 보고 난 뒤, 서원과 도겸은 침대에 누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무리했다.

솔직히 서원은 침대에 성인 알파와 오메가가 나란히 누워 있으면 할 만한 일이 있지 않나 하고 의식했지만, 의외로 도겸은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신체 일부분이 맞닿아 있긴 했지만, 제 어깨에 그가 몸을 기대거나, 손을 잡고 가벼운 장난질을 치거나, 태동을 느끼거나.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와 섹스할 때마다 지치기도 하지만, 잘하기도 하고 또 사랑받는 기분이 좋기도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간 게 아쉽긴 했다. 그러나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감정싸움도 하지 않고, 서로에게만 온전히 집중한 시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서 반대로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점점 도겸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제 페로몬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저 자체를 원하는 그의 마음이 점점 와닿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그리도 원하던 결혼도 머지않아 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고.

아직 사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른 감이 있지만, 만난 기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와 함께한 세월이 길다 보니 그가 오직 각인 때문에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만 있다면 결혼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도겸이 안다면 좋아할 만한 생각을 꾹꾹 숨기며,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잘 자.”

도겸의 저녁 인사를 마지막으로, 서원이 차에서 내렸다.

그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려고 가만히 서 있는데, 도겸이 창문을 내리고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아무래도 제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 것 같은 낌새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문을 열고 마당을 들어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돌아선 지 일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도겸이 바로 전화한 것 같았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극성 연인 같지 않나 싶으면서도, ‘운전 중에 전화하면 위험할 텐데’하는 더 극성인 생각을 하게 됐다.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핸드폰을 들었으나, 액정을 본 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운을 깨트리는 발신인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모님]

“…….”

도겸이 손수 차린 요리를 대접해 주겠다며 집으로 초대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연락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왜냐하면 파트너로 지낼 때도 그의 집에 들를 때마다 사모님에게서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도겸이 저를 위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기쁘고 어떤 요리를 해 줄지 궁금해서 따라갔던 것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상상했던 순간이 펼쳐지니 손에 땀이 쥐어졌다. 서원은 마당에서 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서원 씨? 나예요.

사모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원이 숨을 삼켰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감정이 다 묻어나고 있었다.

서원은 떨리는 숨을 작게 내뱉고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죠?

“…….”

안다고 말하면 저와 도겸의 만남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감히 급도 맞지 않는 그의 고귀한 아들을 건드렸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서원이 대답을 망설이는데, 그녀는 정적이 흐르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닙니다.”

불합리한 만남이 아니기에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녀의 호랑이 같은 기에 눌리고 말았다.

가만히 보면 도겸도 그녀의 기세를 닮아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긴 했다. 그러나 도겸이 호랑이라면 그녀는 호랑이의 수장 같은 느낌이었다.

분위기도 그러한데, 그녀와는 자주 마주할 일도 없고 저를 싫어하는 눈빛, 태도가 노골적이라 훨씬 더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번에도 행동을 조심하라고, 도겸의 집에 막 드나들지 말라고 할 것 같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그녀에게서 생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 내일 시간 있어요? 좀 봤으면 하는데.

“시간……이요?”

- 지금 딱히 별다른 일 안 하는 거로 아는데. 점심에 잠깐 봐요.

무슨 말을 하려고 직접 만나자고까지…….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되냐고, 시간이 안 된다고 둘러대며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것을 보아, 제 일정을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뚫고 있는 듯했다.

이유 없이 보지 않겠다고 하면 그녀에게 정면승부를 거는 셈이고,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둘러대면 시간만 벌 뿐 만남을 온전히 피할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서원이 힘없이 대답했다. 도겸의 집에서 그의 부모님이 저와의 결혼을 허락해 주실 것 같냐고, 그렇게 말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제게 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실상은 결혼의 ‘결’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노골적으로 가로막히고 있었다.

- 그럼 시간이랑 장소 정해서 보낼 테니까, 그때 봐요. 도겸이한테는 말하지 말고요.

“…….”

그녀의 말에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바래지는 감각에, 서원은 전화를 끊은 후에도 한참을 마당에 서 있었다. 스치우는 바람이 꽤나 쌀쌀했다.

* * *

어젯밤에는 잠을 어떻게 잤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임신 탓에 종일 나른해 하루의 반절을 잠으로 보내는 날이 많았는데, 어젯밤은 유난히 잠이 오지를 않았다.

눈만 감으면 냉랭히 가라앉은 사모님의 목소리와 이전에 봤던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실제로 그녀를 마주할 일은 별로 없다 보니,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 됐는데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밤잠을 설쳐 두통으로 시달리는데, 오전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두 시쯤 한 카페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만일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다면 무조건 체했을 것 같은데, 그나마 카페에서 보는 거라 다행이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따듯한 차를 주문하고 기다리자, 딸랑거리며 카페 문이 열렸다.

모락모락 차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올리자, 포근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 들어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에 검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사모님이었다.

제가 사모님을 과하게 의식하고 있어서인지, 그녀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카페 내부의 분위기가 뒤바뀌는 듯했다. 기껏 따듯한 차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서원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쯤, 서원은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앉아요.”

그녀는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턱짓했다. 인사 정도는 모르는 사이에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눈에 저는 흉악범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사람을 써 감시하면서 저와 도겸이 사귀기로 했다는 것까지 알아채신 걸까?

사귀기로 한 것도 제집에서부터이고 그의 집에서 데이트했으니 뭔가를 봤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제 배 비서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저와 도겸이 이전부터 사귀었던 줄 알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저와 도겸이 오랜 시간 만남을 가져 왔다고 생각해 화가 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찰떡이의 존재를 알았거나.

이러나저러나 도겸과 저와의 사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신 것 같다는 거였다. 사모님이 무슨 말을 하실지 긴장한 채 앉는데, 그녀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 아줌마가 아이를 데려왔을 때, 충분히 잘해 줬다고 생각해요.”

“…….”

만나지 말라는 말이나 도겸의 이야기부터 꺼낼 줄 알았는데, 대화의 서문은 예전의 이야기였다. 제가 저택의 좁은 숙직실에서 지냈던 때의 이야기.

예상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긴장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다. 서원이 허리에 힘을 주는데 그녀가 숨을 조금 고르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애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서 애도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준 거고.”

“……그때의 일은 여전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서원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때의 상황에서 사모님은 엄마의 고용주였고 가족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은인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데, 그녀가 한쪽 입술 끝을 씰룩였다.

마치 가소로운 이야기를 들은 양 고개를 까딱인 그녀는 두 눈을 형형하게 뜨며 서원을 노려보듯 했다.

“고마운데 등에 칼을 찌르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예요?”

말에 칼날이라도 달린 것처럼 서슬 퍼런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