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나저나 배 비서님도 그렇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둘 다 제게 결혼 이야기를 하니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 배 비서님과 도겸이 ‘오늘 결혼 이야기로 몰아붙이자’ 하고 단합하지는 않았을 것을 아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당장 대답을 내놓기는 고민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나마 배 비서님의 앞에서는 말할 수 있었는데, 도겸의 앞에서 말하는 건 그를 거절하는 의미가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도겸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재촉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조급해지네. 미안.”
“…….”
도겸이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잔에 따른 스파클링 음료를 홀짝였다. 논알콜을 위해 투명한 과일 스파클링 음료를 사 온 것이었는데, 그가 입에 대니 마치 고급스러운 와인을 마시는 것처럼 우아하게 보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는 모습에 서원은 혹할 뻔하다가도,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결혼하면 좋기야 좋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페로몬을 받을 수 있을 거고, 저도 그를 좋아하니까……. 각인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저를 좋아했다는 걸 알아챈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내가 혼자 결정해도 되는 건가? 도겸은 오직 제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무척이나 많아 보였다.
서원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그릇 위로 내려놓고는, 그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형……. 그런데 만약에 제가 좋다고 하더라도, 허락을 못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 그것도 중요한 것 같은데…….”
“너희 어머님?”
“아뇨! 저희 집은 말고……. 사모님이랑 회장님이요.”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저희 엄마는 저와 도겸이 만나는 것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물론 왜 하필 도겸이냐며 묻기도 했고, 그간 마음고생을 지독하게 시킨 것에 대해선 언짢은 눈치를 보이기는 했지만, 서로가 좋다면 만나 보라는 주의였다.
그러니 만일 결혼해도 되냐고 묻는다면 엄마는 허락할 것 같은데……. 도겸의 부모님을 떠올리면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모님이 도겸에게 선 좀 보라고 데리고 오는 자제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서 한가락 한다는 집안의 사람이었으니, 저로서는 그녀의 눈에 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제가 고민하고 결혼하자고 결정한다고 한들, 도겸의 부모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서원이 그 점을 생각하며 묻자, 도겸이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수긍했다.
“쉽게 허락하실 분들은 아니긴 하지.”
“그럼…….”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네 마음이 어떤지만 생각해.”
서원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으나, 도겸은 부차적인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가벼이 대답했다.
당당하고 긍정적인 태도는 좋은 것이었으나, 오늘은 방법도 없으면서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져 조금 갑갑해졌다.
“전 이렇게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겁먹고 도망칠 필요 없다고 생각해.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우리한테만 집중하자.”
서원은 제 선택으로 일어나게 될 많은 일이 두려웠으나 그의 말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너무 많은 걱정을 하게 되면 한 발조차 나아갈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것이 일생일대의 선택이라면 두렵다는 이유로 도망쳐선 안 됐다.
제가 도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도 도망치는 바람에 도겸과의 인연을 완전히 망쳐 버릴 뻔하기도 했으니까. 이제는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알겠어요.”
서원이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의 진지하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식탁 위에 있던 집게를 들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고기 더 줄까. 모자란 것 같은데.”
“아직 많이 남았는데요…….”
“그런가. 그럼 파스타도 많이 먹어.”
그릇 위에 고기도 많이 남아 있고 파스타도 많이 먹었는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게 황당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은 분위기를 풀어내기에는 효과적이었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다른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나니, 서원은 슬금슬금 도겸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몸을 겹칠 때 외에는 딱히 여기에 올 일이 없기도 했고……. 그런 식으로 또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을까 의식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물만 홀짝이는데, 도겸이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정리하고는 서원에게 돌아왔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영화라도 볼까?”
“음…….”
도겸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쩌다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본 적은 있지만, 그의 집에서 오붓하게 본 적은 없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서원은 이전부터 그의 집에 갔을 때 궁금했던 점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거 말고. 혹시…… 앨범 봐도 돼요?”
“앨범? 봐도 되긴 하는데, 예전 모습 다 알잖아. 궁금해?”
도겸이 볼 이유가 딱히 없지 않냐는 듯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줄곧 봐 왔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은 익히 알고 있었다. 서원에게는 그의 어렸을 적 모습이 더 눈에 익고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원은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저희, 못 본 세월도 꽤 길잖아요. 그리고 형도 제 예전 사진 보고 사진 찍어갔으면서…….”
“그건 그렇네. 보여 줄게.”
도겸은 금방 수긍하다니, 딱히 걸리는 일은 없다는 듯 서원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 봤던 그의 방이지만,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저택에서 보았던 그의 방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저택을 벗어나 혼자 지내는 그의 방은 심플하고 모던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전에 저택에서 봤던 그의 방은 노숙해 보이는 느낌이 강했었던 걸 떠올리면, 아마 그의 부모님이 꾸며 준 그의 방과 도겸이 제 취향을 담아 꾸민 것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서원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구경하는 사이, 도겸은 책장을 뒤적거리다 두꺼운 앨범을 꺼냈다. 그는 묵직한 앨범을 침대 위에 올리며 서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쪽으로 와.”
그는 자연스럽게 함께 나란히 누워서 보도록 이끌었다. 그 말에 서원은 방을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엎드리다가 순간 배 속의 아이를 누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의사에게 엎드리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던 것도 같았다. 배가 좀 부른 이후로 엎드려 눕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편했다.
제가 눕고 난 뒤에 도겸이 옆에 눕는데, 매트리스가 눌리는 것을 느끼고 아차 싶어졌다. 앨범과 찰떡이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함께 침대에 누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혹여나 이상야릇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게 아닌지 내심 긴장했는데, 다행히 도겸은 그런 생각이 없는 듯 바로 앨범을 펼쳤다.
“근데 네 사진만큼 재밌는 건 없을 거야.”
“재미있으려고 보는 건 아닌데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소심하게 대답했다. 도겸에게 우스꽝스럽거나 웃긴 모습을 기대하고 앨범을 보자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제가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그렇게 대꾸했지만, 막상 앨범을 펼치고 나니 도겸이 ‘재밌는 것’이라고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앨범 속 사진은 서원이 기대했던 어리숙하고 새로운 모습의 도겸이 아니었다. 분명 사진 속 도겸은 어리고 앳되기만 한데, 부모님이 비즈니스적인 자리에 데리고 가서 모르는 이들과 억지로 찍은 듯한 분위기가 짙었다.
서원이 앨범의 흐름을 알아챈 걸 눈치챘는지, 도겸은 조금 어색하게 몇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그래도 유학 갔을 때 찍은 건 좀 괜찮을걸.”
“엇, 보고 싶어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급히 화색을 보였다. 앨범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이런 느낌이었다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넘어갔을 것 같은데, 유학 때라면 달랐다.
도겸이 갑작스레 유학을 떠나면서, 6년이라는 공백이 생겼었다. 그간 아예 본 적도 없고, 그의 파트너로 지낼 때도 그때 어떤 식으로 지냈는지 감히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었다. 고작 페로몬 파트너면서, 보지 않았던 세월을 궁금해한다는 건 명백한 월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원의 반응에 도겸이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겼다. 정말 어느 순간부터 배경도, 정적인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다. 그가 말했던 유학 시절의 모습이었다.
“이때부터인가 봐요.”
“맞아.”
크게 오래 세월이 지나지 않아 외모가 크게 다르거나 앳되어 보이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달리 보이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공적인 자리에 많이 참여해서 정장 스타일을 많이 입는데, 당시에는 품이 큰 맨투맨이나 후드티도 많이 입었다. 교복이나 정장을 많이 입었던 서원으로서는 흥미가 가는 부분이었다.
특히나 눈이 가는 사진은 도겸이 회색 후드에 청바지, 그리고 농구공을 팔에 낀 사진이었다. 머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지 내린 머리도, 바람에 흩날린 것도 자연스러웠다.
지금의 도겸과는 다른 의미로 멋있었다. 같은 사람이건만 한눈에 반한 사람처럼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반응하는 것도 잊고 빤히 바라보는데, 도겸이 슬쩍 서원을 보더니 가볍게 물었다.
“저 때가 더 마음에 들어?”
“네?”
“시선을 떼질 못하길래.”
마음에 들긴 하는데……. 저때가 더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도, 이전의 그의 모습도 좋았다. 다섯 살에 봐왔던 도겸의 모습부터 지금까지, 멋있지 않게 보였던 적이 없었다.
“아뇨……. 더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좀 신선해서요.”
“저렇게 입을까?”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던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도겸은 적극적으로 어필해 왔다. 네가 좋다면 이렇게 입은 모습도 보여 주겠다는 듯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런 이유로 본 게 아니었는데…….
바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맞는 건데, 문제는 좀…… 혹해서 멈칫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