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도겸과 차를 타고 내린 곳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였다.
퇴근하자마자 장 보러 나온 사람이 많은지, 마트 안은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마트의 CM송과 저마다 떠드는 소리, 그리고 시식 코너에서 먹어 보고 가라는 등 떠들썩한 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겸은 오늘 살 것이 꽤 있는지, 근처에서 카트를 꺼내 왔다. 카트 끄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가 카트를 끌고 있으니 카트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해 보였다.
키가 큰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더 그렇네. 서원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자연스럽게 그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어떤 거 사야 해요? 적어 둔 거 있어요?”
“음……. 집에 소스는 있으니까, 스파게티 면이랑 고기만 사 가면 돼. 아, 술 못 마시니까 간단하게 마실 것도 사 갈까?”
“형은 술 마시고, 저는 물이면 돼요.”
“혼자는, 무슨 재미로 마셔.”
도겸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은 양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짐 챙기러 시골에 내려갔다가 송어회를 먹을 때도 그러더니, 못 먹는 사람 앞에서 마시는 게 눈치 보이는 모양이었다.
안 마시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기도 뭣해, 서원은 별수 없이 음료수를 사 가자고 타협을 봤다.
대충 살 것들을 추린 도겸과 서원은 마트를 돌아다니며 카트 안을 차곡차곡 담았다. 서원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느낀 건데, 도겸은 은근히 식자재를 고르는 것에 예민했다. 미국에서 자취할 때 빼고는 직접 요리할 일이 몇 없었을 텐데, 이리저리 본 게 많아 재료를 보는 경험치가 쌓인 듯했다.
서원도 덩달아 꼼꼼하게 재료를 엄선하여 골라 담는데, 순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골을 타고 올라올 만큼 오싹한 느낌이, 누군가가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서원이 이상함을 느끼고 빠르게 뒤를 돌아봤으나, 이상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도겸에게 보내 오는 감탄의 시선뿐이었다.
악의가 어린 시선이 느껴졌었는데……. 기분 탓이었나? 서원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자, 아스파라거스를 사던 도겸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서원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원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의미로 쳐다보는 건데 괜히 불길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도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의 덩치가 남들에 비해 워낙 크기도 하고 이목을 끄는 외모이기 때문인 듯했다. 몇 번 매체에 얼굴을 비춘 적도 있으니, 어쩌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연예인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시선을 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서원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겸이 주변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무화과도 사 갈까?”
“무화과요? 그건 요리할 때 안 들어가잖아요.”
“후식으로 먹게.”
도겸이 짧게 대답했다. 평소 후식 같은 걸 챙겨 먹는 스타일도 아니면서, 제가 워낙 단 걸 좋아하다 보니 신경을 쓰는 듯했다.
팔고 있는 무화과가 워낙 한 철만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긴 했다. 그런데 한두 개씩 파는 게 아니라 상자째로 팔아서 다 먹을 수 있을지 지레 걱정됐다. 먹고 남은 건 두고두고 먹어도 된다지만, 평소 그는 집보다는 바깥에서 식사하고 올 때가 많으니까 남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벌써 카트가 반이나 찼는데, 너무 많이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근데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에요? 이미 많이 산 것 같은데요…….”
“어차피 차도 가져왔잖으니까.”
“그렇긴 한데, 다 못 먹어서 상하면 어떡해요.”
“설마 먹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되면 매일 우리 집 와서 먹고 가도 되고.”
“제가요?”
“응.”
남으면 무화과를 싸 주면 되는 건데 굳이……? 무화과를 핑계로 수작 부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귀엽게 봐주고 모르는 척 매일 그의 집에 가서 먹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의 집에 갈 때마다 눈치 보이는 게 있어서 그렇게까진 못 갈 것 같았다. 서원은 잠시 생각하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저만 먹을 것 같으면 사지 말아요.”
“농담이야. 다 먹으라고 안 할 테니까 사자.”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게 훤히 보이는데, 도겸은 그냥 해 본 소리였다는 듯이 바로 무화과를 카트에 담았다.
살 것도 다 샀고 후식까지 샀으니 더 살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겸은 먹이고 싶은 게 많은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먹을래?”하고 물어봤다.
제가 그리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그러는 건지……. 마트에 더 있다가는 카트 안이 산처럼 쌓일 판이라, 서원은 억지로 도겸을 끌고 마트를 나와야만 했다.
* * *
차에 장 본 것을 한가득 싣고 난 후, 도겸의 집에 도착했다.
양손을 묵직하게 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자, 도겸이 손을 씻고는 주방에 있는 남색 앞치마를 걸쳤다.
“금방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심심하면 집 구경하고 있어도 되고.”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도겸은 마치 서원이 괜히 도와주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더 그르치는 아이를 자제시키듯 말했다.
아니, 내가 언제 문제 일으킨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서라도 가만히 있기가 싫었다. 서원은 가지고 온 것 중에 아스파라거스와 같이 한 번은 씻어 먹어야 하는 것들을 꺼냈다.
“그럼 씻는 거라도 할게요.”
“내가 해도 된다니까.”
“가만히 있는 것도 심심해요. 형네 집, 몇 번 와 봐서 새로울 것도 없고요.”
도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진 않았지만, 새로이 구경할 것도 없었다. 인테리어가 바뀐 것도 아니고.
도겸이 싱크대 앞에 선 서원의 옆에 바짝 붙으며 제가 하겠다고 앗아가겠다는 것을, 서원은 겨우 지켜내며 말했다.
“배도 고픈데, 빨리빨리 해서 먹으면 좋잖아요.”
“……그럼 딱 그것만 씻고 쉬어.”
도겸은 배가 고프다는 말이 신경 쓰이는지, 더는 건드리지 않고 빠르게 파스타 면부터 삶기 시작했다.
서원은 그가 허락한 대로 채소만 씻고 들어가려다, 로제 파스타 재료에 손이 많이 가는 것을 알아채고 그의 곁에 서서 재료 손질을 도왔다. 다행히 다른 집보다 주방이 넓은 편이라서 성인 남성 둘이 서 있어도 비좁지 않았다.
양파를 씻고 소시지를 통통 자르고……. 부지런히 움직이니 금방 집 안에 그럴싸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파스타가 다 되어갈 때쯤 도겸이 고기를 팬에 올리기까지 하니, 속전속결로 음식이 완성됐다.
서원이 먼저 식탁에 앉자, 도겸이 도마처럼 생긴 그릇에 핏기 어린 소고기를 올린 다음, 얇고 넓적한 그릇을 꺼내 파스타를 담아 돌아왔다.
“다 됐다. 먼저 먹어 봐.”
“잘 먹겠습니다.”
도겸의 말에 서원이 가볍게 인사하며 수저를 들었다.
스테이크도 로제 파스타도, 둘 다 좋아하지만 먼저 손이 가는 건 역시 고기였다. 고기를 나이프로 썰어 입에 쏙 넣자 단전으로부터 감탄이 나왔다.
“음……!”
핏기가 살짝 돌도록 구워진 스테이크는 질기지 않고 딱 부드럽고 입에 맞았다. 그와 함께 오갔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스테이크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역시 고기는 실패하기가 힘든 요리인가? 배도 고팠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그다음으로 서원의 손이 향한 곳은 로제 파스타였다.
앞서 먹었던 스테이크가 워낙 성공적이라,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입에 넣는데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뻑뻑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맛이 없는 건 아닌지라 말없이 오물오물 먹는데, 도겸이 그런 서원의 반응을 보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곧바로 파스타를 떠서 한 입 먹었다. 그는 음미하다가 낭패스러운 얼굴을 했다.
“파스타는……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요리는 아니라서. 잘 안 된 것 같네.”
“네? 아뇨, 맛있기만 한데요.”
“고기 위주로 많이 먹어.”
서원이 신경 쓸 필요 없다며 기운을 북돋아 줬지만, 도겸은 그래도 파스타가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저렇게 말할 정도는 아닌데……. 오히려 맛있는 편이건만 도겸의 입맛도 워낙 까다롭다 보니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아까 제게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게 민망해서 저러거나.
서원은 그의 말에, 오히려 더 로제 파스타 면발을 포크에 돌돌 말며 말했다.
“저는 요리사가 해 준 전문적인 요리가 아니라, 형이 해 준 요리 먹고 싶어서 온 거예요.”
“…….”
“그리고 충분히 맛있어요. 같이 만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전 형이랑 먹었던 식사 중에 오늘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정작 제가 한 건 별거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와주긴 했으니 같이 요리를 한 느낌이었다. 뿌듯해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솔직한 심정을 말했을 뿐인데, 도겸에게서 반응이 없어서 그런지 좀 민망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포크에 돌돌 만 면을 입에 쏙 넣는데 도겸이 슬며시 표정을 풀었다.
“그런 줄은 몰랐네. 다음에 또 해 줄게.”
“…….”
다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음부턴 볼 일 없게 해 달라며 선을 긋곤 했었는데, 이제는 다음을 기약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다음에 비슷한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제가 도겸에게 요리를 해 줘야지. 서원이 남몰래 다짐하는데, 도겸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웃긴 생각이라도 들었나? 서원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묘하게 기분 좋음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부부 같다.”
“……켁!”
부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파스타 면발이 목에 턱 걸렸다.
급하게 잔에 따라두었던 과일 탄산음료를 들이켜자, 도겸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냐는 듯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안 놀랐어요.”
“빨리 결정해 줘. 기다리기 힘들다.”
“…….”
뭘 결정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서원은 맥락상 그가 결혼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