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36)

<96화>

도겸도 제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고, 저도 그와 결혼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가정을 꾸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아직 너무 빠르긴 했다. 사귀기로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을……. 사귀기로 했어도 환상처럼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서로에게 실망할 수도 있는 건데. 아직 결혼까지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배 비서님은 저와 도겸이 사귀고 있다는 걸 어째서 저렇게 확신하고 있는 거지?’

의아한 게, 사귀기로 한 이후로 배 비서님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전부터 사귀는 것처럼 보였었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황을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서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 비서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고민되는 건 압니다. 좋으신 분은 맞지만, 결혼까지 하기에는 좀 그렇죠?”

“……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워낙 까다로우시니까요.”

배 비서는 서원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알다마다’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까다롭다는 건 무슨 뜻이지? 잠시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니, 뒤늦게 그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배 비서의 말뜻은, 도겸이 워낙 까다로운 성정을 가진 사람이니 아무리 애를 가졌어도 결혼까지 결심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난 그거 때문에 대답을 망설였던 게 아닌데?

“그래도 좋은 분이십니다. 특히 서원 씨한테는 더욱이요.”

서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특히나 제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의중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인 거지, 특히 나한테 좋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에 서원 씨는 전무님 없이 살 수 있어도, 전무님은 서원 씨 없이는 못 사실 것 같거든요.”

“…….”

“아, 이건 이사님이 일방 각인하시기 전부터 느꼈던 점이에요.”

내가 더 도련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파트너 생활을 할 때 제 마음에만 전전긍긍해서 도겸의 마음이 어떤지는 보지 않았었다. 혼자만의 짝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일찌감치 단념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제 엄마도 배 비서님도 도겸의 행동이 저를 대할 때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저번에 도겸이 제게 고백하면서,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사실은 예전부터 저를 좋아했었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주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저희만 모르고 있었다는 게 정말 바보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모르고 애먼 곳에 삽질을 죽어라 해 댄 느낌이었다.

더 빠르게 도겸이 제 마음을 알아채고 일찌감치 마음고생을 접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서로의 마음이 닿은 게 감지덕지했다. 제게는 이보다도 더 기적 같은 상황은 없으니까.

가슴 한구석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해졌다. 서원은 사르르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이 좋아지다가, 눈앞에 있는 배 비서님을 떠올리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원은 표정을 가다듬고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그……. 말씀해 주신 건 고마운데요. 저는 그런 이유로 대답 망설인 거 아니에요. 아직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도 안 지났고, 아무리 서로 좋다고 해도 결혼은 고려해야 할 게 많잖아요.”

“네? 일주일도 안 됐다고요? 저 몰래 비밀 연애라도 하신 줄 알았는데!”

“아,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몰라서 끼어들지를 못했는데……. 진지하게 만나 보기로 한 건 저번 주부터고 한 번도 사귄 적 없어요. 그때, 배 비서님도 보셨잖아요. 일방 각인 판정 받으셨을 때 도련님이 한사코 부정하셨던 거요.”

“그때야, 기억이 나긴 하는데요. 원래 사이가 좋으셨고, 그때만 사이가 안 좋으셨던 거라……. 제가 모르는 사이에 비밀 연애를 하시다가 헤어지고, 다시 재결합이라도 하신 줄 알았죠.”

“어우, 아니에요…….”

서원이 한사코 부정했다. 배 비서님이 어떤 점에서 오해했는지 알겠다만, 정말로 그런 게 아니었다. 서원은 열심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다, 애써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 생각이 어떻든 결혼은 이리저리 고려해야 할 게 많잖아요. 지금 무언가를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아요.”

“하긴 그렇죠. 게다가 상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으니까. 제가 멋대로 생각하고 앞서나갔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녜요…….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만약 그였다면, 저도 그런 오해를 할 만했으니까.

서원이 머쓱하게 대답하는데, 배 비서는 커피가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저, 비밀 꼭 지킬 테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비밀이요?”

“사모님이요. 두 분 만나기로 하는 거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러고 보니까 사모님이 있었지…….

제가 별다른 의미 없이 도겸과 종종 만나는 것만으로도 싫어하셨던 분인데, 그의 어머님이 저와 도겸이 사귀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조금 두려웠다.

사모님에게 이미 미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오갈 데 없던 저와 엄마를 받아주신 분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제가 도겸과 만나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다.

페로몬 파트너일 때는 단순히 몸만 주고받는 관계라고 합리화하며 도겸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마음까지 주고받는 관계니까. 게다가 도겸이 저를 보고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오실지. 아니, 그 전에 그의 아이를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노발대발하실 분이었다.

“여기서 둘이 뭐해.”

“아, 전무님.”

심각하게 생각을 이어가는데,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도겸이 휴게실 앞에 서서 저와 배 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 설명을 하라는 듯한 도겸의 눈짓에 배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서원 씨가 전무님을 찾아오셨는데, 기다리신다고 하셔서요.”

“할 일 더 없으면 퇴근하지 그래.”

“……네. 그럼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두 분 좋은 저녁 보내세요.”

배 비서는 힐끗 서원과 도겸의 눈치를 보더니, 그대로 커피를 들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퇴근 시간이 됐으니까 비서님을 퇴근시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데, 말투 때문인가 상황 때문인가 어쩐지 도겸이 배 비서님을 쫓아내는 느낌이었다.

왠지 미안하네. 인사도 못 드렸는데……. 머쓱하게 배 비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도겸이 제 앞으로 다가오면서 시야가 차단됐다.

도겸은 서원의 하얀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저를 바라보도록 고개를 들게 했다. 그의 손바닥에 얼굴이 눌리면서 입술이 조금 삐쭉 튀어나왔다.

눌린 찐빵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됐을 것 같았다. 서원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데, 도겸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온 줄 알았으면 빨리 끝냈을 텐데. 연락하지 그랬어.”

“아, 아뇨. 그럴까 봐 말 안 한 거예요.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근데 이것 좀 놓고…….”

“그래서 배 비서랑 같이 있었다고?”

도겸이 서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마치 그래선 안 될 것을 타박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얼굴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겠다 싶어, 서원은 버둥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그와 시선을 올곧게 맞췄다.

“그러면 안 돼요?”

“배 비서도 알파야.”

배 비서님이랑 있으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 싶어 물었건만……. 배 비서님도 알파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배 비서님도 못 믿는 줄은 몰랐다. 서원은 시원찮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흘리며 그의 걱정을 가벼이 넘겼다.

“배 비서님이 저한테 뭐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러실 분 아니라는 거 형이 제일 잘 알잖아요.”

“넌 배 비서를 유난히 믿더라. 저번에 섬에서도 배 비서랑 같이 자려고 하지를 않나.”

서원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도겸은 다른 의미로 불만족스러운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때 일을 신경 쓰고 있었나?

“그때는 형이랑 자기 좀……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해 본 말이었고요.”

“…….”

그날은 같이 자기 좀 그런 분위기 아니었나. 거절한 사람이랑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서원이 그런 의미로 말했으나, 도겸은 여전히 부루퉁해 보였다.

앞으로 배 비서님이랑 안 그러겠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있었던 것뿐인데……. 섬마을에 있었을 때는 그와 사귀던 사이도 아니었고 사심을 품고 배 비서님과 같이 자겠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사과하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아, 서원은 자연스레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그, 그래서 오늘은 뭐 먹을 거예요?”

“음……, 사실 오늘 집에서 요리해 주려고 했는데.”

다행히 도겸은 이 주제로 차질을 빚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말을 따라와 줬다.

그나저나 저녁을 사 주려고 부른 건 줄 알았는데, 요리? 서원은 의외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 요리를요?”

“응, 원래는 장 다 보고 나서 너희 집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 장 보고 그러는 거 번거로우면 다음에 하고, 오늘은 사 먹을까?”

“아뇨, 아뇨! 저 형이 해 준 거 먹고 싶어요. 어떤 거 해 주실 거예요?”

“로제 파스타랑 스테이크. 괜찮아?”

“그런 것도 하실 줄 아세요? 전 좋아요.”

그가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듯한데, 메뉴도 서원이 평소 잘 먹는 것이었다.

이전에 도겸이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긴 했다. 저번에 끓여 준 야채죽처럼 간단한 건 해 줬으니까. 그런데 저런 요리도 할 줄 아는 줄은 몰랐다. 조금 놀라 묻자, 도겸이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설거지하는 거 볼 때도 신인류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더니……. 내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살 것 같아서 그래?”

“그, 그런 건 아닌데, 로제 파스타 같은 건 집에서 해먹을 일도 별로 없잖아요. 하실 줄 아는 게 신기해서요.”

“뭐, 요리는 레시피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까.”

“……자신만만하시네요.”

“겁먹을 것도 없잖아. 그럼 갈까?”

도겸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서원의 옆으로 와 가볍게 손을 잡았다.

뒤늦게 밖에서 이렇게 스킨십을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회사 안이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서원은 사람 없을 때만 이러고 있자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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