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6)

<95화>

“더워…….”

서원이 미간을 좁힌 채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개운하지가 않았다. 뜨겁고 무거운 것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가위에 눌린 건가. 서원은 한껏 찜찜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가, 덥고 무거운 게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도겸이 곤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일인용 침대에 성인 남성 둘이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더울 법한데, 한술 더 떠 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무겁다고 느낀 건 제 몸 위로 그의 단단한 팔이 눌려서 그런 거였군……. 대강 상황을 파악한 서원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형. 자요?”

“…….”

서원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도겸은 눈을 단정하게 감은 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지? 소파에서 잔다고 할 땐 언제고……. 바닥에서 자는 게 아닌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하더니만, 소파가 불편해서 침대로 왔나?

당당하게 말할 땐 언제고 이러고 자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말을 바꿨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몰래 들어와 저를 꼭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 마치 혼자서는 못 자는 아이가 방을 쪼르르 찾아온 것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서원은 갈증이 일었지만, 그에게 꽉 안겨 있다 보니 물을 마시러 일어나기가 망설여졌다.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꽤 예민한 편이니 깨우기라도 할 것 같았다.

결국 서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안겨 도겸을 바라보는 일밖에 없었다. 물끄러미 눈앞의 그를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진짜 잘생겼다…….”

그와 파트너로 관계를 이어 갈 때만 해도, 그의 자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었다. 우리가 파트너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라는 게 너무나도 허무한데, 그의 곁에 있는 게 너무 달콤해서 놓칠 수가 없어서 걱정을 모르는 척했다.

사실 지금도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보다는 마음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짙은 눈썹은 깔끔하게 정돈된 것도, 눈을 뜨면 날카로운 분위기를 주지만 감으면 순해 보이는 것도, 날렵한 콧날이나 단단한 턱선도. 모든 것이 미남의 정석이었다. 재벌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똑똑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잘먹고 잘살 얼굴이었다.

외모보다는 그의 다른 면모를 많이 좋아한다고는 생각하는데, 외모가 너무나도 특출나다 보니 가끔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아냐……. 평소엔 이렇게까지 자세히 안 보는데, 빤히 보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남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훔쳐보는 것도 무례한 일이니까 그만 보자.

서원은 그리 생각하며 겨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침대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려는데, 그때 도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할 말은 없어?”

화들짝 놀라 다시 도겸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졸음 하나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 일어나셨어요?”

“꼼지락거릴 때부터?”

“…….”

그게 언제지? 그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가만히 있으려고 한 게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까부터 계속 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일어났으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비키라고 할 거였잖아.”

도겸이 그렇게 말하며 팔에 힘을 주고 서원을 더 꽉 끌어안았다. 몸이 완전히 맞닿으면서 엉덩이에 그의 고간이 비벼졌다.

그의 것은 몽둥이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아침 발기는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니 아무 일도 없던 척 넘어가고 싶은데……. 그것이 엉덩이에 농밀하게 비벼지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상황이 야릇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낀 서원이 퍼뜩 그의 몸에서 떨어지려고 했으나,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사타구니 사이로 그의 단단한 허벅다리가 들어왔다. 명백한 의도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아, 형……. 하지 말아요. 저 목말라요. 물 마시고 싶어요.”

“형이라고 부르면 더 이러고 싶어지는데.”

올가미 같은 손에서 벗어나고자 이유를 대 가며 놔달라고 부탁했지만, 도겸은 능구렁이처럼 말하며 문어 빨판처럼 더 달라붙었다.

그가 달라붙는 게 완전히 싫은 건 아니긴 했지만, 서원은 정말로 목이 마르기도 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을 겹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배도 고팠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는데, 도겸이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의 어깨에 제 턱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더 할 말 없어?”

“네? 무슨 할 말이요?”

“잘생겼다며. 그게 끝이야?”

아……! 자는 줄 알고 혼잣말했던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서원은 마치 숨기고 있던 사생활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민망함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목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그런 거 엿듣지 마세요……!”

“엿들은 게 아니라 대놓고 말했잖아.”

“그거야, 자는 줄 알고 말한 거죠…….”

“나도 그냥 눈 감고 있었던 것뿐인데.”

도겸은 누가 봐도 자는 척을 하고 있었으면서, 마치 자신은 속인 적이 없다는 듯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아까 얼굴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연기자라는 직업이 딱이었다.

“놔요.”

“말 안 해 줄 거야?”

서원은 제 몸 위로 둘러진 도겸의 손을 가까스로 치워내고 상체를 일으켰지만, 도겸이 누운 채로 허리를 끌어안고 제 허벅지 위로 머리를 기대면서 다시금 달라붙었다.

이래서야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않나. 그는 듣고 싶은 말을 들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 좀……. 더 할 말도 없었거든요?”

“더 칭찬해 주라.”

도겸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칭찬해 달라니. 강아지도 아니고 무슨 그런 걸 부탁해?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외모를 활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이럴 때 저런 식으로 웃는 건 반칙 아닌가.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좀 떨어지세요…….”

“서원아아.”

도겸은 어울리지도 않게 말을 늘어트리며 서원의 배에 얼굴을 콕 박고 떨어지질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웬 애교를 부리는 건가 싶은데, 저에게만 보여 주는 모습인 것 같아서 밀어낼 수도 없었다.

나 진짜 목도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그렇게 서원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까지, 한참이나 시달려야 했다.

* * *

서울에 돌아온 이후로는 평소와 비슷했다. 집에서 휴식하고, 다음 주부터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이따금 들러서 본가에 있던 짐을 가져다 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이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던 날, 도겸이 저녁을 같이 먹자며 퇴근 후에 만나기를 제안했다.

도겸이 집 앞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했지만, 서원은 매번 그가 저희 집 앞까지 오는 것이 미안해서 몰래 그의 회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회사 건물 안으로 가려면 사원증이 필요했지만, 이전에 도겸이 준 것이 있어서 진입하기는 쉬웠다. 익숙하게 전무이사실 앞까지 찾아가자, 배 비서가 전무이사실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원은 조심스레 그의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배 비서님.”

“엇, 서원 씨. 전무님 뵈러 오신 건가요?”

“네.”

퇴근 시간에 맞춰서 오긴 했으나, 눈치를 보아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은 듯 보였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배 비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오셨다고 말씀드릴게요.”

“아, 아뇨! 전하지 마세요. 방해될 것 같으니까, 퇴근하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 그러실래요? 금방 끝날 것 같긴 해요.”

서원의 말에 배 비서는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납득했다. 배 비서가 생각하기에도 서원이 왔다고 언질을 넣으면 도겸이 다른 걸 다 제쳐 놓고 나와 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서원이 그렇게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려고 하는데, 배 비서는 다시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럼 차라도 한잔 내오겠습니다.”

“괜찮은데요. 저 목 안 말라요.”

“이러는 김에 잠깐 쉬면 좋잖아요. 휴게실로 갈까요.”

서원이 그럴 필요 없다고, 놀라서 빠르게 손사래를 쳤으나 배 비서는 지금이야말로 쉴 기회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배 비서님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긴 해도 아주 친하지는 않았었는데……. 배 비서님의 기분이 오늘따라 좀 좋아 보여서 그런가? 최근 들어 딱딱한 얼굴밖에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꽤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서원이 앞장서는 배 비서를 따라 같은 층에 있는 휴게실로 가자, 그가 국화차를 내어왔다. 양손으로 잔을 받아들자 손바닥 아래로 따듯한 온기가 퍼졌다.

“감사합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배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로스팅 기계를 이용해 자신이 마실 것도 한 잔 탔다. 그의 것은 진한 블랙커피였다.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네. 일이 많은가? 잠시 생각하는데, 그가 커피를 든 채 서원의 맞은편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저 서원 씨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저한테요? 어떤 건데요?”

배 비서님이 나한테 궁금할 게 있나?

서원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작게 낮추며 물었다.

“혹시…… 전무님이랑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번에 보아하니 임신도 하신 것 같던데요.”

“아…….”

아무리 생각해도 배 비서님이 저한테 궁금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였구나.

그러고 보면 배 비서님은 저와 도겸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추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도겸이 제게 일방 각인을 했다는 것도 알고, 섬에서 안고 자고 싶다고 도겸이 대놓고 말하는 걸 듣기도 했고, 또 서울에 돌아와서는 제가 임신했다는 것도……. 두 눈으로 다 목격한 사람이었다.

저번에 도겸이 이마에 대놓고 키스를 하기에 해명해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둘러대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도겸이 비밀 연애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귀기로 했다는 걸 밝혀도 되는 건지……. 배 비서님이 온전히 도겸의 사람이고 입이 무겁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망설여졌다. 도겸이 질 나쁜 구설수에 오를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서원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채 고민만 하는데, 배 비서가 다시금 물었다.

“결혼하실 겁니까?”

“네? 겨, 결혼이요?”

사귀는지 물어보는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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