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오는 길에 사 올 걸.”
도겸이 어둑한 길을 걸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서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너무나도 들떠 있는 바람에 미처 칫솔과 속옷을 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원을 뭘 어떻게 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저 같은 집에서 자겠다는 것뿐이었는데, 소풍 갈 생각에 들뜨는 어린 시절처럼 기분이 고조돼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내가 서원이를 엄청나게 좋아하긴 하나 보다. 서원의 앞에서만 바보가 되니.
허무맹랑하게 웃으며 슈퍼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서원이 졸린 얼굴로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여기서 입던 잠옷인지, 펑퍼짐한 옷을 입은 채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별거 아닌 모습이었는데도 예전부터 서원을 보면 보송보송해 보여서 귀엽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려서 그런가……. 그런 것 치고 서원이보다 어린 녀석을 봐도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데. 그냥 서원이가 태생 자체가 귀엽게 태어난 것 같다.
이전에 볼일이 있어서 구내식당을 들렀다가, 직원이 핸드폰으로 연예인 사진을 띄워 놓고 MBTI 검사를 하면 CUTE가 나올 거라고 온갖 주접을 떠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뭔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서원에게 딱 어울리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중증이다. 도겸이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서서 서원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서원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머리 털던 것을 멈추고 도겸을 돌아봤다.
“다녀오셨어요?”
“응. 머리 말려 줄까.”
“네? 아, 아뇨? 도련, 아니 형도 얼른 씻고 오세요.”
도겸이 가볍게 제안했으나, 서원은 음담패설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허둥지둥거렸다. 내내 형이라고 잘 부르더니만, 갑자기 도련님이라고 부르려고 할 정도로 당황한 눈치였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여서 만지작거릴 생각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아쉽게 됐다. 도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아쉬움을 표하지 않고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알겠어. 졸려 보이는데, 피곤하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음, 네…….”
서원이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원의 모습이 기특했다. 별것도 아닌데 그랬다.
도겸은 희미하게 웃어 보인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좀 전에 서원이 씻고 나왔던 터라 욕실 안에는 물기와 따듯한 수증기가 가득했고, 향긋한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평소에는 서원의 페로몬에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은은하게 나던 바디워시 냄새가 이거였나 싶다. 베이비 로션과 비슷한 달콤한 향기였다.
“자기랑 어울리는 건 아나 보네.”
도겸이 피식 웃으며 탈의했다. 제가 사용하는 바디워시와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서원과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도 성인이고 마냥 어리지만도 않은데 어렸을 때부터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앳된 느낌이 나서 그런 건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몸을 겹치거나 한 침대에서 잘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데, 서원이 저를 허락한 상황이라 그런가. 씻는 동안에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잘 준비를 온전히 다 끝마치고 수건만 두르고 나오자, 욕실 앞에 옷 두 개가 가지런하게 개어 있었다. 잘 때 입으라고 자신의 옷 중에 큰 것을 골라 챙겨 준 것 같았다.
섬마을에 억지로 찾으러 내려갔을 때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이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갔는데, 서원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도 했다. 줄곧 고조되어 있던 감정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가라앉았다.
“……윤서원?”
도겸이 주방과 거실을 거치며 서원을 불렀지만 반응은 없었다. 넓은 창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도 아무도 없었다.
말도 없이 어딜 간 거지? 차도 잡기 힘든 이런 외딴 시골에서, 그것도 제가 씻는 사이에 도망칠 생각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긴 했다. 도망을 쳐 봐야 거기서 거기니까.
그러나 도겸에게 서원은 이미 도망친 전적이 몇 번이나 있는 사람이었다. 믿고 사랑하지만, 제가 워낙 서원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또 떠나려 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사귀기로 했고 계약까지 했는데……. 말없이 사라지면 나랑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는 걸 아는데도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하던 도겸은 빠르게 집 안을 돌아다니며 서원을 찾았다.
“서원아.”
옷방에도 없고……. 두 번째로 불이 켜져 있는 잠자는 방의 문을 열었는데 이곳에도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하기만 할 뿐 서원은 보이지 않았다.
집을 다 둘러봤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나가서 찾을 생각을 하는데, 순간 침대 위에 이불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고 동그랗게 불룩 튀어나온 것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조심조심 다가가 이불을 거두자마자, 도겸은 탄식하듯 숨을 터트렸다.
“……하.”
다름이 아니라, 서원이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이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고? 저는 그 짧은 순간에 서원이 도망이라도 간 줄 알고 머리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안도가 돼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집안이 유독 조용하면 ‘자나?’하고 생각하는 게 먼저인데, 분리불안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한 건 저이지 않았나.
허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 도겸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침대에 팔과 턱을 기대고 서원의 얼굴을 정면에서 구경했다.
“……진짜 자네.”
이렇게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긴 한데, 솔직히 좀 아쉽긴 했다.
하루 자고 가자고 했을 때,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 침대에서 자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 장난도 치다가 행복하게 잠들 생각을 했다.
‘근데 일인용 침대랑 서원의 몸 상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각방 쓰는 부부나 싸운 커플도 아니고. 한집에 있으면서, 그것도 이렇게 아기 다람쥐처럼 귀여운 서원을 두고 동떨어져서 자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곤히 잠든 서원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불을 켜고 이러고 있으면 금방 서원이 깰 것 같았다. 한참 잘 자야 할 시기라는 걸 알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겸은 불을 꺼 주고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왔다. 시간도 늦었고 할 일도 없겠다 싶어, 소파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 봤지만, 마음과 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애초에 피곤하지도 않았고 잠자리도 평소보다 불편한 탓인 듯했다. 이럴 시간에 일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업무용 태블릿이 자동차 안에 있어 오가다가 서원을 깨우기라도 할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료함에 뒤척이는데,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서원이 챙겨 준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입고 있던 셔츠를 소파에 걸쳐 뒀었는데, 뒤척거리다 셔츠를 건드렸더니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소리가 난 것이었다.
셔츠에서 왜 저런 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순간 앞주머니에 서원의 편지를 챙겨 뒀던 게 떠올랐다.
“아, 편지 읽으려고 했었는데.”
서원이 나중에 읽으라고 해서 궁금한 걸 억지로 참았는데, 깜빡 존재를 잊고 있었다.
부탁하자 결국 준 걸 보면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워낙 옛날에 쓴 편지라 그런지 주는 걸 꺼려 하는 눈치였다. 서원의 앞에서 봤다가는 화낼 것 같아서 참았지만 혼자 있으니까 봐도 될 것 같았다.
도겸은 몸을 일으켜, 편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앞주머니에서 꺼냈다.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니, 서원의 정갈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랑 글씨체가 크게 다를 게 없어, 도겸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찬찬히 읽어 내렸다.
To. 서도겸 도련님
안녕하세요, 도련님 생일 축하드려요.
다른 날도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더 특별하게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내일 생일 파티도 한다는데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 그리고 선물 사 드리고 싶어서 많이 고민했는데요. 도련님은 뭐든 다 가지고 계시니까……. 솔직히 뭘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다음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주세요. 비싼 건 힘들긴 한데, 제가 사 드릴 수 있는 선에서는 노력해 볼게요.
“자기가 뭘 사 주겠다고…….”
서원의 편지를 읽던 도겸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겸이 보기에 지금의 서원도 풍족해 보이지 않는데, 이때는 학생 때라 더더욱 없어 보였다.
제가 뭘 사 달라고 하면 무리라도 해서 사 줄 게 뻔해서 선물 대신 편지를 써 달라고 한 건데. 그리고 서원의 말대로 웬만한 건 제가 살 수 있기에 값진 선물을 받기보다는 정성 어린 편지를 받는 걸 더 좋아하기도 했다.
제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도겸은 헛웃음을 흘리며 마저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말은 못 했지만, 도련님이랑 노는 거 매일 기대되고 좋아요. 앞으로도 도련님이랑 계속 잘 지내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도 계속 도련님 곁에 있고 싶어요. 매년 제가 생일 챙겨드릴 테니까, 만약에 제가 저택에서 나가게 돼도 연락 주고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마 도련님이 바빠서 그때는 지금처럼 자주 연락은 못 하겠지만요.
그래도 저랑 같이 나눴던 추억들은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늘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From. 윤서원
“……귀엽네.”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서원이 숙직실에서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편지 썼을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정독하듯 몇 번이나 읽은 도겸은, 다시 조심스럽게 편지를 정리하고 살금살금 서원의 방으로 갔다.
서원은 아까까지만 해도 새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더니, 지금은 옆으로 누운 채 업어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고 있었다. 일인용 침대라 좁아 보였지만, 옆으로 자고 있는 덕분에 어떻게든 낑겨 들어가면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도겸은 슬그머니 서원을 끌어안으며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도겸의 덩치가 워낙 큰 탓에 여차하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판이었지만, 바싹 서원에게 몸을 붙이니 꽤 안정감이 느껴졌다.
품이 큰 옷을 입고 다녀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렇게 꽉 끌어안으면 배가 볼록 튀어나온 것이 만져졌다.
그 안에 있을 찰떡이도, 서원도 제 것처럼 느껴졌다.
도겸은 사실 어렸을 적부터 가족의 울타리라는 것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리저리 혜택을 누린 것은 인정하면서도 아버지는 무심했고 어머니는……, 저를 좋아하시긴 하지만 그 사랑이 조금 비뚤어진데다가 저를 사업수완의 아바타로 여기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가족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는데……. 저번에 서원에게도 말했듯이, 이상하게도 서원이랑 있으면 결혼하고 함께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각인 때문에 드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싶다.”
도겸이 작게 중얼거리며 서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결이 닿자 서원이 간지러운 듯 웅얼거리며 몸을 잘게 움찔거렸다.
찰떡이는 어떤 아이일지, 외모는 누굴 닮았을지, 성격은 또 어떨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서원이와 저, 그리고 찰떡이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밤 내내 지워지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