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6)

<93화>

송어회를 조금 남기고, 서원은 점원에게 매운탕을 부탁했다.

도겸은 점원이 서원에게 매운탕을 꼭 대접하고 싶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서원이 먹고 싶다고도 하고, 앞서 먹은 음식 맛이 평균 이상이었기도 해서 그런지 크게 말리지는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송어회를 손질하고 남은 뼈와 머리를 냄비에 넣어 팔팔 끓인 매운탕이 나왔다. 그 위로는 쑥갓과 대파가 올라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앞서 송어회랑 모둠 채소를 함께 먹어 배가 차 있는 상태인데도 맛있어 보여 군침이 돌았다. 서원이 눈을 반짝이자, 도겸이 간이 그릇에 국물과 건더기를 한가득 떠서 서원에게 내밀었다.

“먹어 봐.”

“감사합니다.”

서원은 양손으로 그릇을 받아 앞에 내려놓고는, 수저를 들어 빨간 국물부터 맛봤다.

호로록 국물을 삼키자, 얼큰하고 개운한 맛이 느껴졌다. 이 식당에 유난히 술판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맛이었다. 서원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도겸에게 말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얼른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나 보네.”

서원이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말하자, 도겸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그릇에도 건더기와 국물을 담았다.

제가 너무 오버했나? 2차로 매운탕을 먹으면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자중해야겠다 싶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며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도겸이 국물에 입을 대기 전에 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도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여기는 말고.”

“네……?”

“여긴 다시 올 일 없잖아.”

도겸이 다정하게, 그러나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이 시골 바닥에 다시 발 들일 일 절대로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았다.

아마 저 점원 때문이겠지. 아까부터 거슬린다는 눈치였으니까……. 서원이 황당함에 헛웃음을 지었으나,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매운탕을 먹기 시작했다.

회를 많이 먹었음에도 매운탕이 워낙 얼큰하고 맛있어서 술술 넘어갔다. 도겸도 조금만 먹는 편은 아니라, 정신없이 먹다 보니 금방 건더기를 거의 다 건져 먹고 국물도 반도 안 남게 됐다.

도겸에 비해 소식하는 서원은 이제 더는 못 먹을 것 같아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선 더 먹고 싶은데, 위장에 남은 공간이 없는 것 같았다. 입 안에 남은 짭짤한 기운을 없애려 물을 삼키는데, 도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돌아가지 않고요?”

여기서 자고 가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서원이 조금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 쉬는 날이기도 하고,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래도 여기보다는 돌아가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여기 집, 침대도 일인용인데요……. 근처에 숙소도 없고요.”

“나 바닥에서도 잘 자는 거 봤잖아.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운전하기도 피곤한데……. 안 될까?”

“…….”

도겸이 슬그머니 서원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바닥에서 잘 잤다는 건 아마 섬마을에서 하루 묵을 때 바닥에 요만 깔고 잤던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졸음운전은 안 되는데……. 저도 운전면허가 있으니 제가 해도 됐지만, 장롱 면허라서 고속도로를 탈 자신이 없었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는데, 도겸이 방법이 하나 더 있다는 듯 말했다.

“침대가 좁아서 그런 거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안고 자도 될 텐데.”

“저번에요?”

“페로몬 때문에 너희 집 갔을 때 말이야. 마주 보고 안고 잤었잖아. 너도 잘 잤었는데. 기억 안 나?”

언제를 말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참 그가 페로몬 때문에 고생할 때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날, 저는 도겸의 몸 위로 올라가 잠깐 누워 있으려다가 깜빡 잠들었었다. 누가 봐도 불편할 자세인데, 그날은 많이 피곤했는지 그런 자세로 아침까지 잘도 잤다. 도겸도 제가 무겁지도 않은지 아침에 일어났다고 했었고. 서원은 그날을 떠올리며 조금 민망한 기색을 담아 에둘러 거절했다.

“그때는 그러긴 했는데……, 이제는 배가 눌려서 그렇게 자면 불편해요.”

“아, 그런가.”

도겸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아쉬운 기색을 담아 대답했다. 내심 그걸 원하기라도 했던 눈치였다.

그는 정말 그 자세가 불편하지도 않았나? 열성 오메가라 다른 남성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편이기는 해도 성인 남성인데…….

조금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도겸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설득을 이었다.

“아무튼 난 정말로 바닥에서 자는 것도 상관없어. 나랑 같이 자는 게 불편하다면 돌아가야겠지만…….”

“아, 아뇨……. 제가 불편한 게 아니라 형이 불편할까 봐 그랬죠. 그럼 그냥 자고 가요. 졸다가 사고 나는 것보다는…… 낫겠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서원이 허둥지둥 해명하다가 자고 가도 된다고 허락하자, 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바로 대답이 나오는 걸 보면 왠지 제가 허락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제가 너무 그에게 무른 건가 싶으면서도,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해 왔으니 그가 제 성격을 잘 아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도겸이 저에게 아무리 잘해 주고 좋아해 준다고 해도, 매번 지기만 했던 성정을 버리기는 힘들 것 같았다. 도겸은 제게 각인까지 했는데도, 제가 그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원이 조금 허탈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이 힐끗 서원의 그릇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먹었으면 돌아갈까?”

“아, 네.”

도겸은 잠시 벗어 뒀던 외투를 챙기더니,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원의 옆으로 왔다.

눈 깜짝할 사이 얼른 움직이기에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가 했는데, 도겸은 제게 다가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도와줬다.

그냥 손을 뻗어 잡아 일어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거의 포옹하다시피 하며 서원을 일으켜 세웠다. 나이 든 사람들만 가득하던 곳에서 갑자기 젊은이들의 애정행각이 일어나서 그런지,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친절하게 대하던 점원 역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들이라지만 시선이 모이니 민망했다. 서원은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저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어요…….”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잖아.”

도겸은 다정하게 말하더니,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서원의 이마에 보드라운 입술을 맞췄다.

도겸이 제게 사랑을 쏟아 주는 건 맞았지만, 평소엔 밖에서 애정행각을 자제하면서……. 왜 오늘은 이렇게까지…….

그러지 않아도 이목이 쏠려 있었는데, 이마에 입술까지 맞추니 주변에 있던 손님들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을 때다’ 하면서 말을 얹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도겸은 그 소리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서원은 차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도겸이 원하는 대로 이 식당은 다시 오지 못할 듯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원은 계속해서 도겸이 신경 쓰였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한 적은 숱하게 있었다. 파트너 일을 하다가 제가 기절하듯 잠들기라도 하면 도겸도 같이 자고 가서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이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당장 도겸이 페로몬 체증 때문에 고생할 때도 그의 위에서 자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새삼스럽게 어색해할 필요가 없는데, 이번에는 조금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와 사귀기로 하고 처음으로 함께 자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같이 잠을 자는 것보다 더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격하게 몸을 겹치긴 했지만, 오랜 세월 혼자 지켜왔던 첫사랑이 이뤄졌다는 기쁨에 충동적으로 한 일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었다. 언제 엄마가 돌아올지 모르는 본가에서 거사를 치를 정도였지…….

여전히 그와 사귀게 되었다는 게 기쁘긴 하지만, 어제보다는 많이 차분해져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식당에서 돌아오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어떻게 자지?’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가장 먼저 소파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꼭 침대나 바닥에서 잘 게 아니라, 소파에서 자는 것도 괜찮겠다. 저 역시 일하다가 피곤하면 잠시 소파에 누워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잘 때도 종종 있었으니까.

짐을 정리하겠다고 소파 위에 잡동사니들이 잔뜩 올라와 있긴 했지만, 그건 바닥에 잠시 내려놓으면 문제없을 듯했다. 서원은 머릿속에서 계획을 정리하고 도겸에게 전했다.

“제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형은 침대에서 주무세요.”

“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서원의 제안에 도겸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데? 서원이 뭐가 문제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하……. 내가 그걸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가 제집 소파에서 자겠는데 허락을 받아야 해요?”

“제발, 홑몸도 아닌데 그러지 마.”

도겸이 서원의 양쪽 팔을 붙잡으며 간절한 부탁을 하듯 말했다.

홑몸이 아니니 막 대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를 침대에서 재워야겠다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분명 송어횟집에서 바닥에서 자도 된다는 말을 들었고 섬마을에서는 바닥에서 자는 걸 보기까지 했는데도 그런 대우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제가 모시던 도련님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집에 들인 손님을 막 대할 수 없어서 그러게 되는 것 같았다.

서원이 도겸의 말에도 이견이 있는 얼굴을 하자,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같이 침대에서 잘 수 없다면 내가 소파에서 자면 될 일이야. 바닥에서 잘 생각까지 했는데 소파면 감지덕지하지.”

“그렇긴 한데……, 마음이 불편한걸요.”

“그러는 나는 안 그러겠어? 몸도 불편한데 소파에서 재우는 거 진짜 나쁜 새끼 된 느낌이라고.”

“…….”

그를 침대에서 재우려던 게 그에게 죄책감을 실어줄 줄은 몰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서원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도겸은 설득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마저 말을 이었다.

“오늘 이삿짐 싸자고 제안한 것도 나고, 자고 가자고 한 것도 나니까 그냥 침대에서 자.”

“……알겠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이번에는 서원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제 마음이 불편해서 침대에서 재우려고 한 건데 그에게 죄책감을 실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서원이 수긍하자, 도겸은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씻고 와. 나는 나가서 칫솔이랑 필요한 것 좀 사 올 테니까.”

“아……. 네.”

그러고 보니 칫솔이 없었구나……. 오는 길에 편의점 가서 사 왔으면 됐는데, 잠자리를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이 웃으며 카드만 챙기고 집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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