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36)

<92화>

마치 졸업사진을 보여 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 꺼려졌지만, 제가 그를 거절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앞에선 매번 졌으니까. 서원은 우물거리며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대신, 나중에 읽어요. 지금은 말고.”

“음……. 그래.”

도겸은 당장 편지를 펼쳐 읽고 싶은 눈치였지만, 주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서원은 도겸이 셔츠 앞주머니에 편지를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넣는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제가 막 보관하던 것이라 변색도 되고 생활 구겨짐이 많건만, 더 구겨지지 않게 하려고 소중히 다루는 것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편지를 주고 나니 도겸은 책장 정리에 열성이 됐다. 또 특별한 무언가가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것 없이 책장 정리가 끝이 났다.

한참 동안 수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배가 무거워서 그런지 허리가 좀 뻐근했다. 서원이 찌뿌둥하게 허리를 펴는데, 그것을 본 도겸이 창밖을 힐끗거리다 입을 열었다.

“얼추 다 정리된 것 같은데, 그만하고 저녁 먹을까?”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정리하느라 몰랐는데, 벌써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고 창밖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해가 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저녁을 때워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해 보니 식자재를 마지막으로 산 것도 그때였다.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아도 식자재들은 썩고 유통기한도 다 지나 있을 게 훤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겸도 알 테지만, 냉장고를 보여 주는 건 좀 민망했다. 서원은 자연스레 바깥에서 먹는 것을 유도했다.

“나가서 먹을까요? 이 근처에 송어 맛있게 하는 곳이 있더라고요.”

“송어?”

“네, 회랑 야채랑 해서 비벼 먹는 건데……, 매운탕 끓여서 먹는 방법도 있더라고요.”

“그래, 가 보자.”

회를 잘 먹는 건 알지만 혹여 송어회는 싫어할까 봐 다른 먹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별다른 의미 없이 평소에는 자주 접하는 음식이 아니라서 되물어봤을 뿐이었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해 먹자고 안 해서 다행이다. 하기야, 그도 이 집에 먹을 게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지도.

서원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도겸과 함께 집 밖을 나섰다.

* * *

“어서 오세요!”

저녁의 쌀쌀한 기운을 헤치고 송어 집에 들어가자, 저번처럼 떠들썩한 분위기가 서원과 도겸을 반겼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꽤 손님이 많았다. 다행히 구석에 자리가 있어, 서원과 도겸은 테이블 밑에 있던 방석을 끌어다 마주 보고 앉았다.

서원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들어다, 상체를 살짝 기울이고 도겸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저번에 송어 회, 이거 시켰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럼 이거로 두 개 시킬까?”

“좋아요. 마실 건 안 드세요? 다른 손님들은 소주랑 많이들 드시던데.”

“너 술 못 마시니까 그냥 안 마실래.”

“저 신경 쓰지 않고 마셔도 되는데…….”

“별로. 술 마시는 거 좋아하지도 않고.”

서원이 중얼거렸으나 도겸은 됐다며 음식만 주문하자고 했다. 제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 배려하는 게 싫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밝게 인사했던 점원이 앞치마를 두른 채 테이블로 다가왔다. 상의를 끝내고 서원이 주문하려고 점원을 바라보는데, 남자 점원이 서원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저번에도 오셨었죠?”

점원은 마치 알아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딱 서원을 보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저번에 주문을 받아 갔던 직원도 이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워낙 침울하고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꽤 젊은 남성이었다. 도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긴 한다만, 스타일이 이래서 그렇지 실제로는 엇비슷한 나이일 것 같은 감상을 줬다.

그나저나 한 번밖에 오지를 않았는데 기억을 한다고? 온 적 있는 건 맞지만, 왠지 사람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기억에 남는 외모인 것도 아니고. 서원은 무안하게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 온 적은 있는데, 저 예전에 한 번밖에 안 왔었는데요. 다른 분이랑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그때 혼자 오셔서 드셨었잖아요.”

“그건 맞는데…….”

정말 저를 기억하는 건가? 한 번밖에 안 왔고 그때로부터 한 달 넘게 지났는데? 도대체 어떻게 저를 기억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직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집이 매운탕 맛집이라 매운탕도 함께 드셨으면 했는데, 아쉬웠거든요. 다음번에 오시면 양 적게라도 준비해드리려고 했어요.”

“아…….”

“오늘은 일행분도 계시니까 확실하게 대접해드릴게요.”

직원이 도겸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저를 기억하고 있나 신기했는데, 혼자 와서 송어회 덮밥만 먹고 간 것이 아쉽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걸 다 기억하나 싶으면서도, 이 마을에 젊은 사람이 몇 없기도 하고, 혼자 오가는 분위기의 식당은 아니라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동네 장사이기도 하니, 손님을 하나하나 기억해서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마케팅 방법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아무리 그렇대도 해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하네. 서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신기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가만히 있던 도겸이 옆에서 말했다.

“송어 회 이 인분 주세요.”

도겸은 서원과 직원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하는지,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직원 역시 사담을 길게 나눴다는 자각이 있는지, 곧바로 손에 들린 주문서에 주문한 내역을 체크했다.

“아! 네. 음료는 따로 필요 없으세요?”

“음……. 서원이는 임신했으니까 술은 안 되겠다. 사이다 괜찮지?”

분명 직원이 오기 전에 음료는 마시지 않기로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도겸은 다시금 서원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까 제가 술 마실 거냐고 물을 때, 임신했으니까 먹지 않겠다고 말을 나눴었는데 굳이 임신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지. 그리고 아까는 사이다 얘기도 없었는데…….

임신이란 말 때문인지, 직원이 힐끗 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둘 다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원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사이다 한 병 주세요.”

“네.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이번 역시 주문서에 체크하더니, 빠릿빠릿하게 주방으로 돌아갔다.

뭐지, 기분 탓인가……? 왠지 찜찜한 기분이라 가만히 있는데, 도겸이 굳은 얼굴로 점원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서원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나 송어회 처음 먹어 보는데, 오면 방법 좀 알려 줘.”

저 직원이랑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도겸은 의외로 캐묻지 않았다. 그저 송어회에 대한 기대감만 드러낼 뿐이었다.

갑자기 이상 행동을 하기에 견제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기야, 나누던 대화에서 한 번 마주쳤던 게 전부였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질투할 건덕지도 없긴 했다. 서원은 찜찜한 기분을 지우고 가볍게 그의 부탁에 대답했다.

“형도 안 먹어 본 게 있네요.”

“아무래도 흔히 파는 음식은 아니니까.”

“하긴, 저도 저번에 처음 먹어 봤었는데, 점원분이 먹는 방법을 알려 주시더라고요.”

“방금 지나간 그 사람?”

“네.”

“…….”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카운터로 향하는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역시 아까 느꼈던 건 기우가 아니었나?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거였으나, 도겸이 점원을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도겸은 훨씬 그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하긴 도겸은 평소에 워낙 질투를 많이 하는 편인 것 같기도 하지. 서원이 잠시 생각하는데, 금방 아까 주문을 받았던 점원이 돌아왔다.

쟁반에 갖가지 음식을 담아 돌아온 점원은 능숙하게 테이블 위로 송어회와 채소가 가득 든 하얀 대접, 마지막으로 초록색 병에 든 사이다를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송어 회 나왔습니다! 채소랑 초고추장이랑 기호에 맞게 섞어서 드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서원이 고개를 꾸벅이자, 점원 역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도겸이 점원을 못마땅하게 보기에, 서원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비비기 어려우면 제가 해 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할게. 어떻게 하라고 했었지?”

다행히 서원이 화제를 돌리자, 도겸은 금방 따라왔다.

도겸은 서원이 설명해 주는 것을 따라 차근차근 젓가락을 움직였다. 모둠 채소와 송어회, 다진 마늘, 초고추장, 참기름, 그리고 콩가루까지 솔솔 뿌리고 나자 저번과 같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완성됐다.

“이제 드시면 돼요.”

서원이 말하자, 도겸은 미심쩍게 바라보다 채소와 송어회 한 점을 집어 정갈하게 입에 넣었다.

서원은 제가 그를 이곳에 데려왔던 터라 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고 괜히 조마조마해졌다. 도겸이 별다른 반응 없이 오물오물 먹어서 더 반응이 궁금했다.

“어때요?”

“음……? 생각보다 맛있는데? 너도 얼른 먹어 봐.”

다행히 도겸에게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눈치였는데, 생각보다 맛있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저와 도겸, 그리고 찰떡이의 입맛에 고루고루 맞는 음식인 듯했다. 서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저도 한술 떴다.

그나저나 저번에 혼자 송어회를 먹으며 다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상대가 도겸이 될 줄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그와 이곳에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와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함께 오게 된 것도 놀라운데 연인 사이로 오게 된 것이 신기하고…… 너무 좋았다.

서원은 오늘따라 더 음식이 맛있는 것 같아, 도겸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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