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서, 서원아?”
서원이 갑자기 말도 없이 눈물을 흘리자, 도겸은 무척이나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마주한 두 눈동자가 순간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것이 보였다.
도겸은 눈에 보일 정도로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서원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상체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서원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게 됐다.
“흑…….”
“왜, 하……. 왜 그래. 왜 울어. 울지 마.”
도겸이 다급하게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꺼내며 서원을 달랬다. 끌어안고 등허리를 도닥이며 위로하고 있긴 한데, 말투나 목소리에서는 방황하는 낌새가 가득했다. 왜 우는 건지도 모르면서, 달래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어리숙한 위로였고, 손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던 서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원이 그의 허리춤을 살포시 잡으며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원은 한참 동안 그의 셔츠를 눈물로 적시다가, 뒤늦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흐으……, 이렇게까지 하고 나중에 일방 각인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흐, 진짜 저 큰일 나요. 그러면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안 그래.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거야. 바보처럼.”
“정말이죠……?”
“응, 한 번만 더 믿어 줘.”
도겸이 애걸복걸하듯 말했다.
사실, 서원은 여전히 마음이 혼란했다. 그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실수로’ 각인해서 생긴 인위적인 마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수라고 해도 각인했으면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서원은 그런 사랑이 싫었다. 제가 너무 극적인 걸 바라는지 몰라도, 각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랑이 아니라 마음이 통해서 하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심이 아닐 거라고 그를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그의 행동에 휘둘렸다. 아주 어렸을 때는 도련님과 가정부의 아들, 그리고 이전에는 페로몬 파트너라는 갑과 을의 사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굽히던 것이 아직 안 고쳐진 건가 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아서 끌려다닌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믿어 보고 싶기도 했고.
어쩌지. 상처받을 제 모습이 두려워 머뭇거리는데, 도겸이 마저 입을 열었다.
“내가 많이 신뢰 주지 못했다는 거 알아. 뭐 때문에 못 미더워하는 건지도 알고.”
“…….”
“그렇지만 이제는 내 마음을 아니까 안 그럴 거야. 이 말도 못 믿을 수 있는 거 아는데, 난 네가…… 나한테 각인을 해 줬으면 좋겠어.”
“각인……이라고요?”
“응.”
각인? 서원이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확인차 묻자, 도겸이 포옹하고 있던 손을 풀고 조금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였다. 일방적 각인은 그래도 푸는 방법이라도 있었다. 단념이라는. 쌍방 각인도 풀래야 풀 수는 있지만, 쌍방 각인을 하게 되면 서로가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하게 되는데 단념할 틈이 있을 리가 없다.
즉, 쌍방 각인을 하고 싶다는 건 단순히 만나자거나 사귀자는 말을 넘어…… 평생을 약속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시선을 고정하자, 그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어.”
“…….”
결혼…….
이미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다가, 손잡기, 포옹, 입맞춤, 섹스, 그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임신한 상황이니 사귀는 것보다 결혼을 먼저 할 수는 있긴 했다. 다른 건 다 건너뛰고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껴서 결혼하는 것만 해도 은근하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막상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게 언제인데, 너무 빠르기도 했고 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서원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도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급하다는 것도 알고, 일방 각인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보일 것도 알아. 그런데 진심이야. 찰떡이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이전처럼 말고, 이젠 너랑 진지하게 만나 보고 싶어.”
도겸이 고백하며 서원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오롯이 마주한 새카만 눈동자에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서원이 놀란 얼굴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자, 도겸이 조금 힘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장 해 달라고 꺼낸 말은 아니야. 부담스럽고, 싫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너랑 각인하고 결혼도 하고, 찰떡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고 싶은 건 진심이야.”
“…….”
부담스럽거나 싫다기보다는 놀란 건데…….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자고,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이 상황을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해가 풀리며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탓일까. 서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만약’을 가정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도련님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도련님한테 영원히 각인을 못 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왜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해?”
서원이 각인의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묻자, 도겸이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렸다.
둘 다 각인이 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한 명만 일방 각인이 된 상태라면, 좋은 마음을 가지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한쪽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
서원은 그에게 각인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만일 진지하게 만나게 된다면 저도 그에게 각인하고 서로 죽고 못 사는 사랑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야……, 저야말로 도련님을 옛날부터 좋아했는데 여태까지 각인이 되지도 않았고. 믿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 어쩌면 도련님한테 평생 각인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각인은…… 믿음을 전제로 하잖아요.”
이전에 질문 사이트에서 봤듯, 각인은 사랑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도 그렇지만, 서로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했다.
서원이 여태까지 그를 좋아하고, 몸을 숱하게 겹치면서도 그에게 실수로라도 각인하지 않은 건…… 그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저를 좋아했다고, 계속해서 믿어 달라고 했고 저 또한 조금은 믿음이 갔지만, 아직 그에게 받은 상처도 컸다. 그가 제게 각인했던 날의 상황이 평범치 않았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제게 각인한 게 아닐까 하는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에게 기회를 준다고 해도……. 진짜로 그가 바라던 결혼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제가 그에게 각인할 수 있을지. 그게 자신이 없었다.
서원이 그 부분을 생각하며 묻자, 도겸이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각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이 거짓인 건 아니잖아.”
“…….”
“만일 시도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내가 모자란 탓이겠지. 내가 노력할게.”
도겸은 꼭 제게 각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만나면서도 각인하지 못하는 건 믿음을 주지 못한 제 탓이라고 떠안았다.
“나 좀 좋아해 주라. 서원아.”
“…….”
쐐기를 박듯 하는 말에 서원은 입 안쪽의 살을 물었다.
이성은 아직 아니라고,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마음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갔다. 그 괴리감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가 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더라고 하더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힘들 미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게 맞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은 이상적인 선택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를 짝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페로몬 파트너가 됐고, 그런 관계를 6년 동안 이어 갔고, 어느 날 히트사이클과 러트를 함께 보내게 되어 아이를 가지게 됐다. 그것도 모자라 그가 제게 일방 각인을 한 것까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 번쯤은, 제가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사랑 받는 연애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불쑥 머리를 쳐들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워 그의 고백을 받고도 뒷걸음질 쳤던 거지만, 일단 만나만 보는 거니까……. 힘들어하지 말고 진짜 연인다운 것을 해 보고 싶었다.
오늘 제가 엄마와 그랬던 것처럼 그와 육아용품점에 가서 아이의 물건을 고르고. 한여름 밤의 꿈이어도 좋으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아니면 이런 사랑은 해 보지도 못할 것 같으니까.
“저 좋아했다는 거, 믿어 볼 테니까…….”
“…….”
“제가 다시 도련님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욕심은 눈덩이가 되어 점점 커져만 갔고, 고민 끝에 서원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가만히 듣던 도겸의 눈이 잠시간 크게 뜨였다. 그는 서원에게서 긍정의 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랐다가 조금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서원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그는, 어떤 확실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서원의 양 뺨을 붙잡았다.
도겸이 허리를 굽히더니, 그대로 서원의 부드러운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흐읍…….”
예고도 없이 맞춰온 입술에 서원은 조금 놀랐으나, 사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으니……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는 나쁜 생각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