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서원은 거실에 있던 엄마에게 잠시 도겸을 안으로 들여도 되냐고 물었다. 다행히 엄마는 장 보러 나갈 준비 중이었다고, 눈치 보지 말고 안에서 편히 이야기 나누라고 하며 장바구니를 챙겨 나갔다.
저 때문에 나가신 건 아니겠지……? 서원은 미안한 얼굴로 엄마가 나간 현관문을 바라보다, 도겸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그의 차 안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굳이 집에 들어와서 말하겠다는 저의가 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제게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다면 집보다는, 오히려 차에 태우는 게 더 나았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데도 그를 향한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서원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오해라는 건 뭐고요.”
“……사실은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서원이 고저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묻자, 도겸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제, 제 입에 서채연의 이름을 올렸을 때부터 그의 반응이 미묘하게 이상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열성 오메가 파트너라는 확신이 굳어진 채였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안는 도겸이라니. 상상하기도 싫어 듣지도 않고 싶었지만, 저렇게까지 오해라고 하는데 다른 이유는 아닐까……. 그를 믿어 보고 싶었다. 결국에는 아직도 미련의 끈을 잘라내지 못한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그의 입에서 열성 오메가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에 대한 기대를 뿌리째로 뽑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서원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게 뭔데요?”
“…….”
도겸은 당장이라도 오해를 풀고 싶다는 듯이 굴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또 머뭇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시간을 끌까 싶었다. 서원도 덩달아 허리에 힘을 주고 바싹 긴장해 있는데, 그가 작게 숨을 내뱉더니 긴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서채연. 내 이복동생이야.”
“……네?”
도겸의 말에 서원이 눈을 멍청하게 깜빡였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복동생이라면……, 배다른 남매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면 서채연과 서도겸은 둘 다 같은 성을 가지긴 했다. 집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걸 꺼리는 그가 그녀를 집에 들인 이유도 설명이 되고, 집에 옷을 두고 간 것도, 대화하는 투가 조금 가벼웠던 것도.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됐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야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은 것처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그가 이런 중대한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 진짜일 것 같긴 한데…… 믿기 힘들었다.
“이복동생이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그의 곁에 오랜 시간 함께 있었으면서 이복동생에 대한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도 들었다면, 워낙 큰 이슈이기 때문에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서채연도 꽤 유명한 배우인데도 서도겸과 얽혀 있다는 기사 같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생아라고 말이 돌았을 게 뻔한데 제가 몰랐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믿을 수 없어서 작게 중얼거리는데, 도겸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탄식하듯 대답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까. 집안에서도 쉬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
“그래서 집에서 얘기하자고 부탁한 거야.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서.”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재벌가의 이복동생 이야기라 믿기 힘들었지만, 도겸이 선을 넘는 거짓말을 할 정도의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진짜인가……. 다른 곳에 알려지지 않은 건 쉬쉬하며 비밀로 했기 때문이고?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게 민망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복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는데 같은 성을 가졌다고 해서 이복동생일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어?
혼자 오해하고 그에게 나쁜 짓을 했었다는 게 흑역사를 되짚는 것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익어 가는 벼처럼 얼굴이 점점 바닥으로 향해 가는데, 퍼뜩 든 생각에 서원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어제 물어봤을 때는 서채연 씨랑 별 사이 아니라고 했었잖아요?”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굳이 설명해야겠다 생각하지 않았어. 비밀이기도 했고.”
“…….”
확실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기업에 꽤 큰 이미지 실추가 이어질 테니까.
그의 백화점은 각종 기부활동으로 기업 이미지가 꽤 좋았다. 그런 곳에서 불륜 스캔들이 터지면 파급력이 클 테니 쉬쉬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내면서도 그의 이복동생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서원은 어제 어물쩍 넘어가려던 도겸의 태도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비밀을 저한테 알려 줘도 되는 거예요?”
“오해로 인해서 널 못 보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네가 다른 곳에 알릴 것 같지도 않기도 하고.”
“…….”
“알릴 거야?”
“아, 아뇨! 그,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해요…….”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불에 덴 것처럼 후다닥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는 다른 곳에 알리지 않을 것이었다. 알릴 사람도 없고 알려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도 혹여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제가 이것을 약점 삼아 빵 터트릴 수도 있을 텐데……. 저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걸까? 저를 믿어 주는 게 좋으면서도, 앞으로 평생 지켜야 할 비밀 하나가 생겼다는 게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괜한 오해를 해서 돈을 펑펑 쓰고, 그를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져, 사과하고 싶어졌다. 오해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는데, 그것보다 도겸이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너도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살았으니까 알겠지마는……, 아버지는 그다지 가정적이지 못했어.”
“…….”
이번에 꺼낸 이야기는 예전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만 해명해도 되는데…….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이전에 본 그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됐다.
서원은 다섯 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스무 살 때까지 그의 집 숙직실에서 지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지냈는데도 도겸의 아버지를 본 것은 양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 되지 않았다.
마주친 것도 적은데, 귀신처럼 지내는 것이 조건이었다 보니 서원이 그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는 추호도 모르지만, 그래도 집에 온 횟수가 몇 안 된다는 것만으로도 가정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만큼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서원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의 커다란 풍채를 떠올리고 있는데,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나한테도 그렇고, 어머니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 난 그게 아버지가 우리 집의 가장이고, 바쁘시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았어. 아버지에게는 가정에 관심이 없었던 거야. 어머니가 아닌 다른 오메가를 만나느라 바빴던 거고.”
그의 표정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해 보였지만, 목소리에서는 묘하게 실망감이 느껴졌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회상하듯 하던 그는, 그저 험담하기 위해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는 듯 다시 서원과 시선을 맞췄다.
“내게 배다른 남매가 있다는 것도, 우연히 채연이를 우리 회사 홍보모델로 쓰다가 만나서 알게 된 거였어.”
“그렇다면 최근……이겠네요.”
서채연이 도겸의 회사 홍보 모델을 맡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 서원이 그 점을 떠올리고 말하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지. 으레 재벌가들이 그렇듯, 어머니와 아버지는 비즈니스 파트너로 만나 한 결혼이었어. 그래야 합법적으로 돈을 합치고 모을 수 있으니까.”
“…….”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로 이복동생까지 있었다는 걸 내가 알아챘는데도 내게 선보기를 강요했어. 그런 모습을 보였으면서도 내게 자신들처럼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더라.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애초에 두 분 사이에 사랑 같은 건 없었던 거야.”
“……그래서 도련님이 여태까지 선을 안 보셨던 거군요.”
선을 먼저 보고 마음에 들 수도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잡아 온 선 자리는 그런 순수한 의도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비즈니스 파트너 같은 결혼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물론, 그런 자리에서도 사랑이 싹틀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서원은 여태까지 단순히 그가 인위적인 만남을 싫어해서 선을 거절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부모님의 나쁜 선례를 봤기 때문에 선 자리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진절머리를 내고 거절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부모님처럼 사랑 없는 가정을 꾸리기 싫었던 것이었다.
서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겸이 작은 웃음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고, 무의식중에도 널 좋아했으니까 다른 오메가를 만나기 싫은 것도 있었겠지.”
“…….”
그는 은근슬쩍 예전부터 좋아했었다는 말을 꺼냈다.
처음 그에게 저 말을 들었을 땐 개수작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느낌이 달랐다. 그가 몇 번씩이나 강조하고, 상황까지 겹치게 되니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호감은 있었던 게 맞지 않을까’하는 쪽으로 조금씩 마음이 기울었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저번처럼 단칼에 잘라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괜히 시선만 방황하는데, 도겸이 손을 뻗어 서원의 한쪽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서원이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서원아.”
“…….”
그는 모르겠다면 다시 한번 말해 주겠다는 듯 제 속마음을 고백하며, 잡은 손을 이끌어 서원의 하얀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말캉한 입술이 부드럽게 손등에 붙었다 떨어졌다. 손상되기 쉬운 것을 다루듯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읏…….”
그가 제게 스킨십하는 것도, 고백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 졸이며 오해하던 게 풀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가 정말 저를 좋아한다는 게 와닿아서 그런 걸까. 그에게 고백을 들었을 순간과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가슴에 퍼지는 따스한 느낌에,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눈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