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20:31 서도겸 도련님] 오늘 보러 가도 돼?
그날 저녁, 저녁밥을 먹고 쉬는데 도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용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늘 그랬던 것처럼 그저 보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낸 걸 수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돈을 흥청망청 쓴 것 때문에 찾아오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33 윤서원] 네, 오세요.
만일 후자의 이유라면 바라던 일이었다. 서원은 마음의 준비를 끝낸 후 오라고 메시지 전송 버튼까지 눌렀다.
제대로 전송된 메시지 창을 바라보는데, 순간 심장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서원은 체한 것처럼 갑갑한 심장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치며 숨을 골랐다.
“하…….”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지? 메시지를 보내고 난 후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도겸이 제게 보내올 냉담한 시선이 떠올라 두려운 것 같았다.
이전에 그에게 고백했을 때 보았던 차가운 반응이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때의 모습을 또 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정을 떨어트리겠다고 일부러 돈을 펑펑 썼고, 제가 바라던 일인데 왜 떨리는 건지…….
그렇게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갑갑한 시간이 흐르고,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벌써 도겸이 온 것 같았다.
서원은 나오려는 엄마를 말리고, 대충 얇은 카디건만 걸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자 도겸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서원아.”
“……도련님.”
메시지에서 느껴졌던 것처럼, 도겸은 어제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저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는 듯 표정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의 진심 어린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가 하라는 대로 그를 이용하고 돈을 썼을 뿐인데도 나쁜 짓을 한 후 숨긴 채 상대를 만나는 것처럼 찜찜하고 답답했다.
서원이 미적미적 눈도 못 마주치고 서 있자, 도겸이 가만한 눈으로 서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몸 좀 괜찮았어?”
“……괜찮았어요.”
“다행이네. 맞다, 너랑 어머님 좀 드시라고 과일 사 왔는데. 샤인머스켓 좋아해?”
도겸은 빈손으로 오기 뭣해 사 왔다는 듯, 조수석 문을 열어 박스를 꺼냈다. 박스 안에는 탐스럽고 탱탱한 알이 달린 샤인머스켓이 세 송이 들어 있었다. 흠집 하나 없고 맑은 초록빛이 도는 게 최상품처럼 보였다.
평소 단 걸 좋아하기도 하다 보니, 샤인머스켓을 정말 좋아했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다,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시선을 돌렸다.
도겸의 예상과는 다르게 서원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도겸이 왜 그러냐는 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이거 싫어해? 예전에 포도는 잘 먹었던 것 같은데.”
“아, 아뇨. 싫어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긴 하는데요…….”
샤인머스켓엔 죄가 없었다. 서원이 고개를 젓자, 도겸이 그럼 뭐가 문제냐는 듯 한쪽 눈매를 찡그리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바라는 시선에 서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백화점에서 돈을 생각보다 많이 써서 물어보려고 온 게 아니었나? 그냥 보고 싶고, 과일 좀 챙겨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건가?
그에겐 타격도 없을 돈이란 걸 알기에 오늘 돈 좀 쓴 정도로 뭐라고 할 것 같진 않긴 했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다 못해 더 다정해지기까지 해서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배알도 없이 그가 챙겨 주는 게 좋으면서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게 불편했다.
서원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에둘러 거절했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런 거 안 갖다주셔도 돼요. 필요하면 쓰라고 카드도 주셨잖아요.”
“그거는 계약한 거니까 그런 거고. 내가 챙겨 주고 싶은 거랑은 별개잖아.”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도 점점 과해지는 것 같은데…….
평소랑 똑같은 어투인데, 왜인지 모르게 간질간질하고 낯선 느낌이라 대꾸할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할 말은 있는데 입 속에서만 돌고 내뱉어지질 않았다.
결국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대화가 끊겨 버리자, 도겸은 숨을 작게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리고는 마침 만나면 할 말이 있었다는 듯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옷 샀던데. 다음엔 같이 가자. 골라 줄게.”
미적거리던 서원이 도겸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옷이라면…….
“알고 계셨어요?”
“뭐를?”
“저…… 오늘 백화점 다녀온 거요.”
“어? 응. 카드 쓰면 메시지 오게 했거든.”
서원이 놀라 물었지만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반응이 없기에 혹여 제가 돈을 쓴 걸 모르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제가 오늘 쓴 정도로는 그에게 긁힘 수준도 주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오늘 돈을 생각보다 많이 못 쓰긴 했지만, 그래도 몇 시간 만에 몇천만 원을 긁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닌데 이렇게까지나 금전 감각이 다른 게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얼마나 더 카드를 긁어 대야 그를 자극할 수 있을지 가늠이 오질 않았다.
카드로 집을 살 수 있나? 그래야 신경 쓰려나? 그런 것치곤 저한테 아파트까지 줬는데…….
과연 돈 쓰는 정도로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하는데, 도겸은 서원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마저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랑 같이 이것저것 쇼핑하고 그런 것 같던데. 선물 많이 사 드렸어?”
“네…….”
“좋았겠네. 아, 그리고 미혼모 지원 센터에 기부한 거 말이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기부도 좋지만 우리 회사에서 장기적으로 후원하는 제도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더라.”
“…….”
“……서원아?”
도겸은 이 주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풀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뒤늦게 서원의 표정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서원이 멍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 마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어디에 카드 긁었는지 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런 거면 안 볼게. 난 그냥 뭐를 하는지도 보이고 재미있어서 본 건데, 네가 그렇게 느낄 줄 몰랐어.”
“…….”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는 제가 돈을 쓰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제가 어디서 쇼핑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게 재밌다니. 그의 정을 떨어트리려고 돈을 펑펑 쓴 건데 아예 잘못 짚었다. 서원은 제가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허무함이 몰려왔지만, 서원은 그가 카드 내역을 본 게 문제였던 것은 아니라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싫은 게 아니라요…….”
“그럼?”
“…….”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다시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서원이 죄 없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기자, 도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실수한 거야? 서원아. 말로 해 줘.”
“……아니에요.”
“아니야, 저번처럼 오해가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
오해라……. 서원은 그의 말에 열성 오메가 체질의 배우, 서채연을 떠올렸다.
도겸이 그녀를 파트너로 뒀다는 건 오해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고서야 그가 열성 오메가 체질의 배우를 곁에 둘 이유가 없을 텐데.
의심병처럼 괜한 사람을 잡는 걸 수도 있지만, 서원은 오랜 시간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그의 지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부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기우라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서원아.”
“…….”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이 부탁하듯 이름을 불렀다. 혼자 그러지 말고 말 좀 해 달라는 간곡한 바람이 담긴 목소리였다.
차라리…… 그에게 자백을 받고 그와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건 아닐까.
지금 말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서 그의 성질을 긁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작정하고 그의 돈을 긁을 때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양심이 찔렸다.
거짓말이 점점 늘었던 것처럼 그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짓도 하다 보면 편해질지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도, 그 과정을 버티는 것도 하기 싫었다.
맞지도 않는 일을 하느니 그냥 말로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하려면 제가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말해야 해서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서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제 들었던 내용을 꺼냈다.
“어제…… 도련님이랑 통화한 사람 있잖아요.”
“통화?”
“서채연 배우요. 그 사람이 도련님 집에 옷도 두고 갔다고 하던데……. 그거 뭐예요?”
“…….”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았으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무리 거짓말이 늘었대도 그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인지 완전히 숨기는 건 어려웠다.
겨우 물음을 입 밖으로 내뱉은 뒤, 서원이 뒤늦게 고개를 들고 도겸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쇼핑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서채연 배우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해명하지 않고 당황하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제가 생각했던 게 진짜였던 걸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확답 들을 생각을 하니 울적해지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서원은 목구멍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바싹바싹 말라, 마른침을 삼키고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분……, 열성 오메가 맞죠?”
“…….”
이번의 물음에도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을 뜻하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기도 했다. 진짜였구나……. 콧잔등에 이어 이제는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식으로 저는 두 번이나 버림받는구나 싶어졌다.
차라리 기대하게 만들지를 말지. 그냥 떠나게 두지. 아무리 일방 각인 때문에 제가 필요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여태까지는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감정이 격해져서 목소리가 볼품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좋아하는 사람…… 저밖에 없다고 했고. 다른 오메가도 안 만난다고 했으면서. 벌써 다른 열성 오메가 파트너를 구하신 거죠?”
“잠깐만, 서원아. 그건 오해야.”
“무슨 오해요?”
서원은 따지듯 말하며, 조금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도겸을 바라봤다. 눈물을 참느라 눈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울먹거리며 묻자, 도겸은 탄식하듯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그는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다 설명할게. 근데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래서……, 괜찮다면 네 방에서 말해도 될까?”
“제 방이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아니라고 해명하면 되는 건데 시간을 끄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는 걸 들으면 저만 더 비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자, 도겸이 제발 부탁한다는 듯이 서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밖에서 하기는 좀 그런 이야기라서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로 아니고. 십 분이면 돼. 부탁이야.”
“…….”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면 도대체 뭘까. 더 최악의 시나리오가 있을까?
솔직히 이대로 돌아가고 대답조차 듣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그를 믿어 보고 싶은 미련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지금조차도 그가 연기하는 걸지도 모르는데, 절박하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모습이 진심인 것만 같아서 기대하게 됐다.
서원은 됐다고 그를 뿌리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들어나 보자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