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서원이 그런 생각으로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말하자, 지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태까지 쓴 게 서원의 돈이어도 놀랍건만, 긁고 다닌 게 남의 돈이라니. 더 충격적이었다.
“뭐? 도, 도, 도련님 돈이라고? 도련님 돈으로 이래도 되는 거야?”
“네, 마음대로 쓰라던데요.”
“무슨 일로?”
“제가 저번에 도련님 설득으로 서울에 온 거라고 말했잖아요. 이것도 포함이에요.”
“도련님의 돈을 쓰는 게 포함이라고?”
지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도겸이 어떤 식으로 설득했길래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게 포함된 거냐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네, 임신 중이니까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이에 드는 전반적인 비용과 돈 쓸 일 있으면 이 카드로 긁으래요.”
“그런 일이라면 이해는 되지만…… 그걸로 내 옷을 사도 되는 거야?”
“네, 상관없대요. 아, 그리고 제 통장에 일억도 넣었대요. 그것도 필요하면 쓰라고 하셨어요, 더 필요하면 말하라던데요.”
“일억이라고?! 아니, 더 필요할 일이……. 무슨 그런…….”
서원의 설명에 지희는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된다는 듯 주억거리다가도, 일억이라는 소리에 펄쩍 놀랐다. 더 필요하면 더 주겠다는 뒷말에 더 놀라서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멈칫멈칫 멈추게 됐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지희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나름 도겸도 제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고백까지 했다고 하니 후원해 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블랙카드와 함께 일억을 주는 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도겸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이니 스케일이 남다른 걸 수도 있었고.
그렇지만 제가 저런 상황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간 서원에게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들어왔음에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도련님과 가정부의 아들. 그 이후에는 고용인과 부하직원인가 했는데……. 대뜸 임신해서 오질 않나 좋아한다고 하지를 않나, 일방 각인 까지 하고……. 그런데 이제는 금전적인 후원까지 받는다고?”
“……그렇게 됐어요.”
“아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너희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진지하게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의 세계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지희가 그런 궁금증을 담아 묻자, 서원이 “음…….”하며 목을 긁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사이라기보다는, 서로가 필요하니까 같이 있는 거 아닐까요?”
“필요에 의한 사이라고?”
“네. 도련님은 일방 각인 때문에 제가 필요하고, 저는 아이를 지키려고 하니까요. 각인만 풀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사이일 것 같은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서원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씁쓸했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지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원아. 너 좀…… 변한 것 같아.”
“제가요?”
“뭐랄까…….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많이 지친 것처럼 보여. 의심도 많아진 것 같고.”
“…….”
지희는 제 아이가 겪었을 상심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전해 들었다고 해도, 제가 겪은 일도 아니고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다르니까.
그러나 한평생 봐 온 제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제 아이는 이렇게 자조적이고 암울한 아이가 아니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단 말이다. 크게 데여 트라우마라도 생긴 것처럼 바뀌니 그의 부모로서는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텐데…….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으나, 서원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두 번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요. 딱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아요.”
“네가 그렇다니 할 말은 없지만……, 정말 지금이 좋아? 만족스러워?”
“…….”
지희의 물음에 서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도겸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여전했고 계산대에 블랙 카드를 내밀 때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것은 소용이 없었고, 도겸에게는 저를 대체할 수 있는 열성 오메가가 있는데 제가 뭘 더 해야 하는 건지…….
서원은 침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꿋꿋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해 보고 싶어요. 의외로 잘 맞을 수도 있고.”
“……알았어. 그럼 밥 먹고는 네 옷 좀 사자. 내 건 이제 됐으니까.”
서원의 의지에 그녀가 어쩔 수 없겠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에 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하는 사이, 음식이 준비됐는지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그릇을 옮겼다. 서원은 좀전의 대화로 기분이 바닥에 치닫는 수준이었지만, 먹다 보면 나아질 거라며 수저를 들었다.
* * *
“서원아, 넌 정말 그 정도로 되겠어? 엄마 거는 많이 사 줬으면서.”
서원이 금방 남성 의류 매장을 나오자, 지희가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리며 물었다. 엄마 옷을 고를 땐 많이 사더니, 정작 본인 옷은 왜 고르질 않느냐는 눈치였다.
“음…….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네요. 그래도 전 이 정도면 됐어요. 올해는 입을 옷 걱정은 없겠는데요.”
“예쁜 옷 많던데…….”
엄마의 아쉽다는 말에 서원이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돈도 써 본 사람이 써 보고, 옷도 입어 본 사람이 잘 고른다고. 막상 제 옷을 사려니 손이 가는 게 없었다.
그래도 그간 도겸을 따라다니면서 엄마뻘의 돈 많은 사모님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어떤 게 트렌드인지는 알았기에 엄마의 옷과 가방 등을 고르는 건 쉬웠다. 모자간의 사이가 좋은 편이라, 그녀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제가 입을 옷을 고르려니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이건 이래서 안 어울리고, 사면 안 입을 것 같다며 재단하게 됐다. 어차피 도겸의 돈을 펑펑 쓸 생각에 사는 거고, 마음에 안 들면 입질 않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됐다.
그렇게 서원은 지금 시즌에 입을 만한 옷 상하의로 서너 벌을 고르고 남성 의류 매장을 나왔다. 일 년에 옷 몇 벌 안 사는 서원으로서는 과소비에 가까웠으나, 그의 정을 떨어트리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소소한 지름이었다.
서원은 직원에게 부탁해 짐 대부분을 집으로 부쳐 달라고 하고, 백화점 중심부에 있는 쉼터에 앉아 쉬었다.
“후…….”
서원은 앉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손으로 콩콩 두드리고 주물렀다.
임신 후 체력이 떨어진 것도 그렇지만, 허리가 뻐근하게 아플 때가 종종 있었다. 아마 배가 무거워지면서 그런 것이리라.
서원은 미세하게 눈살을 좁히며,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희에게도 들렸는지, 그녀가 걱정스러운 낯을 하며 서원의 등을 대신 주물러 줬다.
“힘들면 이제 돌아갈까?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백화점이야,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그럴까요?”
“그래. 나도 이제 피곤하니까 좀만 앉았다가 들어가자.”
오늘 도겸의 돈을 다 탕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긴 했다. 본보기로 이 정도면 충분히 오늘치 할 일은 한 것 같았다. 서원은 그녀의 말에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쉰 뒤, 이만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백화점을 빠져나와 택시를 부르려는데, 순간 한 곳에 서원의 시선이 박혔다.
“저……. 엄마. 저기 좀 들렀다 가요.”
“응? 그래.”
서원의 부탁에 지희가 건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기용품점이었다.
서원은 아직 아이의 성별도 모르고,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거로 생각했다. 벌써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건물 밖에서도 보이는 작은 아기 옷이 눈에 밟혀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서원과 지희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달려 있던 작은 종이 울리더니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직원의 눈에는 임신한 사람이 없어 보이는지, 생글생글 친절한 낯으로 말했다.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선물하시는 거면 추천해드릴게요.”
“아, 아뇨……. 찾는 건 없고, 둘러볼게요.”
“아! 그럼 편히 둘러보세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물어보시고요.”
직원은 부담 줄 생각은 없다는 듯,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친절한 직원이었다.
엄마도 조용히 안을 둘러보고, 서원도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안에 있는 아기용품들을 눈에 담았다.
초보 부모라면 눈길을 끌만 한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쪽쪽이 클립, 치발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들면 귀여울 것 같은 토끼, 곰돌이 봉제 인형도 있었고 천장에 다는 귀여운 모빌도 있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에 서원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찰떡이도 많이 좋아하니까.’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서원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워냈다. 미쳤어. 무슨 그런 생각을 해? 어차피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저를 위한 일이었다.
제가 본 찰떡이를 좋아하는 그의 모습도 다 거짓말이었겠지. 평소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였으니 찰떡이 보고 감탄하던 것도 연기였을 터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물건을 다시 둘러보는데, 순간 서원의 눈에 들어온 한 물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귀엽다…….”
서원이 발견한 것은 손바닥보다 작은 신발이었다. 베이지색 굵은 털실로 짜인 신발이었는데 아기자기하고 너무나도 귀여웠다.
찰떡이가 이 신발을 신으면 엄청 귀여울 텐데. 찰떡이가 어떻게 생겼을지도 모르면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신발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감상에 젖어 있자, 안을 쓱 둘러본 엄마가 서원의 곁에 서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귀여워서요. 근데 안 맞을 수도 있겠죠?”
“예쁘면 사야지. 120에서 130 정도 사면 거의 신길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방에다 사 두고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달라. 나도 너 낳기 전에 그랬거든.”
지희는 꼭 필요 없는 것도 아니라며, 사도 된다는 쪽으로 이끌었다. 웬만하면 신길 수 있다는 말에 혹하긴 했지만, 찰떡이가 잘 태어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괜히 샀다가 마음만 아파지는 게 아닌지 좀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서 잘 자라고 있다곤 했지만, 그래도 저는 열성 오메가이고 불안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이유로 고민하는데 엄마가 힐끗 눈짓을 하며 물었다.
“이건 엄마가 사 줄까?”
“……아뇨, 제가 살게요.”
엄마는 제가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죄책감 들어 한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이 사 주겠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서원은 고민하다가 아기 신발을 사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런 것까지 살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사고 나니까 뿌듯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뒤, 서원은 방 책상 위에 아기 신발을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걸 보다가 문득 미혼모 지원 단체에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뜬금없이 삼천만 원을 기부했다. 옷을 살 때는 맞지도 않는 걸 사는 기분이었는데……, 어쩐지 아기가 신을 신발을 사고 기부할 때는 적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돈 쓰기인데 제게 맞는 일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