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도겸은 차로 서원을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서원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도겸이 대뜸 서원의 무릎 위에 있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서원의 손등 위로 따스한 체온이 내려앉았다. 서원이 내리려던 걸 멈추고 도겸을 돌아보자, 그가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지기 아쉽다.”
“…….”
선택권이 서원에게 있으니, 우회적으로 함께 있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다지 늦은 시간도 아니었기에 무언가를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를 들면 카페를 간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한강처럼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눠도 나쁘지 않을 만한 시간.
도겸과 그러한 일상을 보내는 걸 꿈꾼 적도 있기에 쉽게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서원은 은근슬쩍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이만 들어가셔야죠.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잖아요.”
“…….”
배려로 포장한 거절의 뜻에, 도겸이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를 아래로 떨궜다. 서원에게 거절당한 손은 여전히 무릎 위에 얹어진 채 가만히 있었다.
내려도 되는 건가……. 잡힌 손이 신경 쓰여 가만히 기다리는데, 그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서원아, 혹시…… 내가 오늘 뭐 잘못했어?”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한껏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이전에는 뭔가를 잘못해도 인정하지 않더니, 오늘은 제 눈치를 보다가 먼저 제가 뭘 잘못했냐고 묻는다.
서원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지금 물어봐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까 통화한 배우랑 무슨 사이냐고, 그녀가 왜 당신의 집에 옷을 두고 간 거냐고?
그런 충동이 일면서도, 그걸 물어보면 통화를 몰래 훔쳐 들은 걸 인정한 꼴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서원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아까 핸드폰 보니까 서채연이라고 떠 있던데……, 도련님네 백화점 모델 맞죠?”
전화를 엿들은 것은 말할 수 없어도, 아까 핸드폰을 가져다주면서 발신인은 볼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물으며 도겸을 바라보자, 그가 미세하게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아주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은 맞는데……, 그건 왜?”
“연예인이니까 신기해서요. 혹시 사적으로 친한가 해서요.”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사람이었다면 질투로 보일 수 있는 걸 연예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포장할 수 있는 거였다.
예전에는 거짓말도, 연기도 못했었다. 할 때마다 족족 도겸에게 걸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제가 그의 눈치를 보는 게 조금 줄어든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늘었다.
아무튼, 제가 만일 오해하는 거라면 어떤 사이인지 설명하면서 풀리지 않을까. 내심 그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다지……, 그런 사이는 아닌데.”
그러나 도겸은 제 생각과 달리, 대답을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제가 그를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인지, 마치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원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이 역으로 서원에게 물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해?”
“…….”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별 사이 아닌데 그런 대화를 나눈다고? 제 상식선으로는 믿기 힘들었다. 오히려…… 도겸이 회피하려고 어물쩍 흘려보낸 게 아닌가 싶어졌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페로몬 파트너 상대설에 확신이 기울었다.
‘역시 그런 게 맞았어.’
엄청난 실망감이 몰아쳤다. 따지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서원은 애써 삼키고 별거 아니었다는 듯 심심하게 대답했다.
“신기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연예인이랑 연락 주고받는 거 평범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서원이 용건은 그게 끝이었다는 듯 더 듣지 않고 그에게 잡힌 손을 자연스레 빼냈다. 몸에 두르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자, 도겸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힘없이 미소지었다.
“알았어. 내일 연락할게.”
“……그러세요.”
“잘 자.”
다정한 굿나잇 인사를 들은 서원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차에서 내렸다.
도겸은 서원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먼저 출발하지 않았다. 서원은 멈춰 있는 차를 잠잠한 눈으로 바라보다, 먼저 몸을 돌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대문을 뒤로 쾅 닫고 나니, 제 한심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다 나왔다.
“하……. 진짜 왜 이러냐.”
너무나 가볍게도 그에게 속고, 의지하고, 기대하고……. 자신이 천하의 호구 새끼처럼 느껴져 자괴감이 밀려왔다.
도겸의 눈에는 제가 얼마나 쉬워 보였을까. 저를 보고 속으론 비웃고 있진 않았을까. 제가 봐 온 겉모습은 다정하기 그지없었으나 뭐든 잘하는 사람이니 연기 또한 출중할 수도 있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오늘 일찍이 외출했던 엄마가 먼저 돌아왔는지 거실에 있었다.
그녀는 혼자 차를 홀짝이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귀가하는 서원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반겼다.
“어, 아들 왔어? 맛있는 거 먹었고?”
“네. 삼계탕 먹고 왔어요. 약재 빼고 능이버섯만 넣어서.”
“어휴, 맛있는 거 먹고 왔네. 나는 오랜만에 동창 만나서 파스타 집 갔는데 느끼해서 탈 났다니까?”
지희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걸 먹고 왔다며 부러운 기색을 뚝뚝 내비쳤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저 혼자 좋은 걸 홀랑 먹고 온 기분이 됐다. 같이 가서 먹고 올 걸 그랬나. 지금의 도겸이라면 제가 그렇게 해도 뭐라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잠깐 생각하던 서원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블랙카드가 떠올랐다. 그리고 도겸이 자신을 이용하라고 한 말까지.
순간 든 생각이었으나, 서원은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심란했던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저……, 엄마. 안 바쁘면 내일 저랑 백화점 갈래요?”
“으응? 백화점? 갑자기 거기는 왜?”
서원이 충동적으로 든 생각을 엄마에게 제안하자, 그녀는 조금 당황해했다. 서원이 평소 부모님에게 싹싹하지 않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먼저 약속을 잡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서원은 머쓱하다는 듯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냥요……. 요즘 신경 쓰게 해 드린 것도 많고, 고마운 것도 있고……. 내일 안 되면 다음에 해도 되고요.”
“아냐, 아냐. 엄마 시간 많아. 내일 데이트하자.”
백화점이 언제 데이트가 됐는지, 그녀는 입꼬리를 귀에 걸듯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가는 나들이에 벌써 기분이 좋아진 눈치였다.
그렇게 달가운 이유로 제안한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던 터라, 서원은 어쩐지 엄마를 이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서원은, 솔직히 도겸이 저를 거절하는 모습이 무서워서 그를 떨어트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차마 그를 냉정하게 떨어트릴 수 있으리란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 한 번 거절당하기도 했고, 또 이제는 그의 거짓말에 더는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도 결혼 페널티가 걸린 계약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으니…….
이제는 정말로 제가 그의 정을 떨어트릴 때가 된 것 같았다.
* * *
다음날, 서원은 아침이 밝자마자 엄마와 택시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서원은 그녀에게 가격 걱정하지 말고 사고 싶은 건 다 사라고 권했다. 둘러보다가 엄마와 어울릴 것 같은 건 대신 골라 주고 결제하기도 했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되고, 서원과 지희는 백화점 내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서원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둘러보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난 이런 건 잘 몰라서. 다 맛있어 보이는데?”
“이 코스요리가 다양하게 먹어 볼 수 있다는데, 그럼 이거로 주문해 볼게요.”
서원은 음식을 하나만 고르기는 쉬울 것 같지 않아, 그냥 하나씩 다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서원은 음식을 주문한 뒤, 통창으로 된 벽을 바라보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요즘 계속 시골과 섬을 왔다 갔다 해서 그런지, 한낮의 서울 스카이라인이 조금 낯설게 빡빡하게 느껴졌다.
조금 피곤하기도 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던 지희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속삭였다.
“그런데, 서원아.”
“네?”
“돈 말이야……. 이렇게까지 써도 되는 거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지희가 불안한 얼굴로 심각하게 물었다.
지희는 한두 번까지야, 제 아들이 꽤 높은 봉급으로 도겸의 밑에서 일했다는 걸 아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저와 어울릴 것 같다며 손수 옷까지 골라 주는데, 거절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나 양손에 들린 쇼핑백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자, 그녀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백화점에서 쓴 돈만 해도 VIP를 찍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기세였다. 무슨 복권 당첨이 되었다고 해도 하루에 이만큼이나 쓰는 건 그녀의 기준에서는 엄청난 사치였다.
처음에는 최근에 임신 소식을 알렸던 것도 그렇고, 실종된 게 아닌가 마음 졸인 일을 이런 식으로 사과해서 서원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받겠다는 마음으로 받았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가자, 이제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나쁜 생각하고 모아 둔 돈을 다 쓰려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안 하던 짓을 하고는 한다던데…….
혹여나 그런 게 아닌가 하고 그녀가 조심스레 묻자, 물을 홀짝이던 서원이 가볍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이런 돈이 어디서 나서?”
“이거 제 돈 아니에요.”
엄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서원이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그녀의 반응에 서원이 주머니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새로 발급한 듯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낯선 카드가 보이자 그녀가 생소한 얼굴로 그 카드를 주워들었다.
“뭐? 이거 누구 카드인데?”
“도련님 거요.”
여태까지 물건을 살 때마다 긁고 다닌 카드는 바로 도겸이 어제 준 블랙 카드였다.
도겸에게 돈이란 아주 쉬운 것일 걸 안다. 그는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돈이 많았으니까. 그러니 이런다고 그에게 흠집이나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헉 소리가 나올 만큼 거하게 긁어 댈 생각이었다.
저를 좋아한 적도 없는데 일방 각인을 한 그였다. 그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은 옛정이나 몸정일 테고, 이제는 그와 몸 겹칠 일은 없으니 옛정이라도 떨어트리면 일방 각인을 풀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면 저에 대한 정을 떨어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떠올린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