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6)

<80화>

열성 오메가야, 세상 어디든 있고 저 역시 그런 체질이니까 열성 오메가에게서 전화가 온다고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인맥의 대부분은 우성의 뛰어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가 사람을 가려 사귄다기보다 재벌들의 세계가 그러했다. 그렇다 보니 그에게 제가 아닌 다른 열성 오메가의 지인이 있다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설마…….”

저번에 도겸에게 다른 오메가를 만난 적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미국에서 지금까지 줄곧 저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었고.

그런데 만남이라는 게, 사귄다는 것을 전제로 물어본 것이었지 저처럼 파트너로서 몸을 겹치던 오메가가 있었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혹…… 서채연이 혹 저 대신 그의 파트너로 잠시 지냈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의 도겸은 일방 각인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안는다고 해서 페로몬 체증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방 각인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그가 다른 사람을 파트너로 들였던 건 아닐까? 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한 것도 최근이었기에 그럴 가능성이…….

“하, 아니야. 그만 생각하자.”

깊게 생각하던 서원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암울한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 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그가 이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었는지 시기 질투할 이유는 없었다. 만난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지나간 사람들까지 하나하나 파헤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 일인데…….

생각을 지워 내려고 애쓰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도겸이 돌아오면 전화 왔었다고 알려 줘야겠다. 그리 넘어가려고 하는데 한 번 더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서채연이었다.

“급한 전화인가…….”

보통 전화는 한 번 걸고 안 받으면 메시지를 남긴다든지 하는데, 연달아 전화하는 것을 보면 급한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업무 쪽 일일지도.

솔직히 가져다주기 싫었지만, 상대가 도겸이 만나던 열성 오메가일 거라는 건 추측일 뿐이었다. 서원은 조금 고민하다, 핸드폰을 들고 도겸이 간 쪽으로 걸어갔다.

도겸은 식당 외곽 쪽,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는 서원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도련님, 전화 왔는데요.”

“어? 전화?”

서원이 그의 곁에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자, 도겸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인기척을 못 느낀 것도 그렇지만,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자각조차 없었는지 자신의 핸드폰이 서원에게 들린 것에 놀란 눈치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건네받으려다, 일단 손에 있던 담뱃불부터 꺼트렸다.

“너한테 있었구나. 미안.”

“아뇨……. 그것보다 전화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한 번 끊겼었어요. 급한 전화 같던데.”

“…….”

서원이 말하자, 도겸은 여전히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왠지 받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그는 서원을 힐끗 보더니 자연스레 말했다.

“들어가 있어.”

“…….”

어쩐지 분위기가 제가 돌아가야만 전화를 받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원은 그 묘한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찜찜함이 자리 잡았다.

제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부정하면서도, 이전에 그를 스쳐 지나간 오메가라고 해도 제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명백한 월권이니까.

그러나 나쁜 호기심은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갔다. 어쩌면 그를 다시 마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런 감정은 예견되어 있었다. 저는 그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미적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돌아가는데, 코너를 돌 때쯤 멀찍이 도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걸음이 우뚝 멈췄다. 돌아가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발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도겸이 왜 그 배우와 통화를 나누는 건지 궁금했다.

망설이던 서원은 돌아가는 척하다가 식당 모퉁이 벽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제가 왜 첩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이러는지 자신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냉정한 이성과 달리 불안한 감정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

숨도 멈춘 채 가만히 있자, 멀리서 도겸의 목소리가 작고 흐릿하게 들렸다.

“안 그래도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날 너무 취해서 걱정되더라.”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의 내용을 취합해 보니, 도겸과 배우 서채연이 함께 술자리를 가진 것 같았다.

제가 알기로 도겸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하긴 뭣하고, 그래도 즐길 수 있는 편이었다. 이따금 업무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일 적으로는 만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걱정된다니. 빈말이라도 저런 말은 안 하던 사람인데……. 게다가 말을 놓은 것이 꽤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친구 사이라도 되는 걸까? 의외의 인맥에 조금 놀라는데 도겸이 말하는 소리가 더 들렸다.

“다음에? 아아……. 그래, 시간 나면 연락해.”

“…….”

“맞다. 그날, 너 그날 집에 옷 두고 갔더라. 택배로 보낼까?”

옷……?

그러고 보면, 저번에 제가 시골에 있었을 때 도겸이 이지환에게 제집에 옷을 두고 갔었다고 했었다. 당시 이지환의 표정이 마치 충격적인 것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아졌다.

집에 옷을 두고 갔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뜻했다. 첫 번째로 그의 집에 서채연이 발을 들였다는 것. 두 번째는 옷을 벗었다는 것.

술, 집, 옷…….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면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키워드의 조합이었다. 안 그래도 도겸이 그녀와 왜 연락을 주고받을까 의심했던 터라 상상에 더욱 확신을 실어 줬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저를 만나지 않던 며칠 사이에 다른 열성 오메가를 만나고 시시덕거렸을 생각을 하니 배신감이 몰아쳤다.

그럼 그렇지……. 도련님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조금 잘해 줬다고 그새 실실거리고. 당장 백숙 좀 먹었다고 좋아하던 제 모습이 한심하고, 자괴감까지 느껴졌다.

음식 한 번 먹여 주고 환심을 살 수 있었으니 그에게는 매우 싸게 먹힌 것일 터다. 내가 뭘 바란 거지? 고백했을 때 차였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 그럼 그때 가져가. 어. 그래, 쉬어.”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전화를 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서원은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도겸의 차에 올라탔다. 다행히 도겸은 담배를 더 피우다 들어올 생각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하…….”

서원은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또 한 번 깨달았다. 저 남자에게서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어쩌면 다 계산적인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말해야 제가 그의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그라면 그런 수 같은 건 아주 쉽게 보였을 거다.

발밑이 진흙 아래로 푹 꺼지는 것처럼 불쾌했다. 또 그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계약서가 남아 있었다. 말없이 도망치면 그와 결혼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페널티가 걸린 계약.

아무리 제가 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망칠 수 없으니,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선 그가 제게 집착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방법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일방 각인을 어떻게 끊을 수 있다고 했더라. 단념하면 자연스럽게 끊긴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가 저를 미워하게 하고, 그 각인을 끊어 버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늦었지. 담배 냄새 좀 빼느라고.”

서원이 한창 암울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도겸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말은 사실인 듯, 그에게서는 향긋한 페로몬 냄새만 날 뿐 매캐한 냄새는 묻어나지 않았다.

아까도 이런 식으로 저를 배려하듯 한, 찰떡이까지 생각하듯 한 모습에 깜빡 속을 뻔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으면 저를 생각해 줬다며 수줍어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서원은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운전대를 잡으려던 도겸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맞다, 줄 거 있는데.”

“…….”

줄 거? 뭐하려는 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그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제게 준 카드는 새까맸고 방금 만든 것처럼 빳빳하게 광이 났다. 서원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것을 받으며 물었다.

“카드는 왜요?”

“그때 말했잖아. 서울로 돌아오기만 하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뭐 살 일 있으면 카드로 쓰고, 현금 필요하면 연락해. 일단 일억 넣어둘게.”

“……일억이요?”

“더 필요하면 말해. 카드는 한도 제한이 없으니까, 카드 쓰면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을 거야.”

“…….”

돈을 더 달라고 되물은 게 아니었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로 한 건 그의 계약 조건이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계속 생각하던 것을 떠올리면 왈칵왈칵 뜨거운 말이 치솟았다. 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거냐고, 제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서원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자, 도겸은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했는지 마저 말을 이었다.

“부담가지지 말고 얼마든지 써도 돼. 나, 이용하라고 그랬잖아.”

이용하라고…….

서원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