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너무 당황한 탓에 서원의 표정이 경직되자, 그것을 본 도겸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늦게 물어봤나? 능이버섯 싫으면 닭고기 살만 발라 먹어도 돼. 삼계탕은 괜찮다고 했지?”
“아, 아뇨. 싫은 거 아니에요. 좋아요. 그냥 제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거든요.”
“아아. 내가 말 안 해 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도겸이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는 듯,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차에서도 느꼈지만, 도겸이 저러니까 이질감이……. 다정하게 대하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이라, 서원은 불편하게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챙겨 주시는 거 고맙긴 한데…….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가 무슨 뜻이야?”
“어제부터 절 과하게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좀 부담스러운데요…….”
“내가?”
도겸이 서원을 보며 한쪽 눈썹을 움칠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어제도 미팅 늦으시면서까지 산부인과 데려가셨고, 저녁에 통화할 때도 단순히 잠 많이 잔 거로 병원 데려가고 싶어 하시고……. 오늘도 보양식까지 챙겨 주시잖아요.”
“…….”
“산부인과 검진 날에 휴가 쓰신 건 그렇다 쳐도 다른 건 좀 과한 것 같아요. 아프지도 않은데 계속 걱정하시는 것도 그렇고요.”
이질감이 들어 불편한 것도 그렇지만, 너무 그가 저를 떠받들 듯 맞춰 주니까 죄책감이 들었다. 제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자처한 건데,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앉아 있어도 자리가 편치 않게 느껴졌다.
서원이 용기 내어 말하자 도겸에게서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조금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담스럽게 느껴졌으면 미안한데……. 근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네? 안 된다기보다는…….”
“차에서 말했던 것처럼 난 네가 신경 쓰여. 안 아팠으면 좋겠어. 찰떡이도 잘 태어나서 함께 키우……, 지는 못하더라도 건강했으면 좋겠고. 근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야?”
도겸은 같이 키우자는 말을 하려고 했었던지, 말을 하다가 급히 선회했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미래를 그리고 싶지만, 그건 서원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색이었다.
아직 찰떡이는 태어나지도 않았건만, 아이와 그를 생이별 시키는 느낌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서원의 케이스는 지금과 다르긴 하지만,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또한 그가 말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가 아니긴 해서……. 절절하게 말하니까 또 안 된다고 밀어내는 게 좀…….
서원이 난감하게 그를 바라보자, 도겸이 그 망설임을 읽었는지 설득을 이어 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하게 해 줘. 찰떡이 낳으면 나 만나주지도 않을 거잖아.”
“그건…….”
차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오늘만 해도 그를 만난 명분은 페로몬을 받기 위해서였으니까.
아이의 성장기에 부모의 페로몬을 받으면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어 도겸을 볼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서원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자, 도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찰떡이를 명분으로 생각하고 널 만나는 것 같네.”
“…….”
그렇게 느끼진 않았는데…….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 서원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무튼, 내 마음이 일방 각인으로만 보일 테니까 아니꼽게 보일 건 알아.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게 내 진심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서 울림을 줬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다는 말은 서원이 믿어 주지를 않으니, 적어도 진심으로 움직이는 제 행동을 나쁘게 봐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가 설득을 잘하는 건지, 아니면 제가 그에게 있어 무른 건지……. 서원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 지었다.
“아, 알겠어요……. 그래도 너무 저한테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어요.”
“너무 내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을게.”
이번에도 또 반박하고 설득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도겸은 이쯤에서 받아들였다.
키 작고 비실비실한 편이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인기척이 느껴져 문 쪽을 돌아보자, 직원이 양손에 커다란 그릇을 들고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삼계탕 나왔습니다. 약재 빼고 능이버섯만 넣은 건 어디로 드릴까요?”
“둘 다 이쪽으로 주세요.”
서원이 ‘저한테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도겸이 직원에게서 두 삼계탕 모두를 받아냈다.
분명 약재 빼고 능이버섯만 들어간 건 내 거라고 하지 않았나?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자, 도겸이 삼계탕과 함께 나온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며 말했다.
“살 발라 줄게.”
“예……? 무슨, 제가 무슨 손이 없어요?”
“보양시켜 주려고 왔는데 힘쓰게 할 수 없잖아. 기다려.”
힘 좀 내라고 보양식을 먹이는 건데, 살점을 뜯는 데 힘을 허비하게 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살 바르는 게 뭐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건지. 분명 몇 분 전에 ‘너무 내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을게.’ 해 놓고서는 바로 이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뜨거운 닭고기를 정성스레 살을 바르는 도겸의 모습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다. 마음고생을 시켰으니 저 정도는 해 줘도 될 것 같기도 했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보다는 저렇게 정성 들여 해 주는 것이 그의 진심이 더 느껴지기도 했다.
그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도겸이 금방 살을 발라내 앞접시에 담았다.
그는 한창 살 바르기에 집중하다가 먼저 먹고 있으라는 듯, 닭다리 살을 담은 그릇을 서원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맛있게 먹어.”
“네……. 도련님도 좀 드세요.”
“도련님 아니고 형.”
“…….”
분위기가 딱딱해졌다고 생각해서 유머를 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형이라고 부르라고 강조하는 건지…….
황당했지만,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던 방 안의 공기가 환기된 것도 사실이었다. 도겸이 제가 한 말에 크게 상처받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서원은 조금 마음의 짐을 덜어 놓고, 그가 살을 발라 준 닭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풍기는 담백한 맛과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 단풍잎 물결이 마음에 들었다.
* * *
“잘 먹었습니다.”
배부르고 맛있는 식사였다.
달콤한 디저트류를 제외하면 이렇게 담백한 음식이 가장 입에 잘 받았다. 입덧 약을 꾸준히 복용 중이기도 했지만, 임신하기 전보다 훨씬 더 맛있게 들어가는 음식들 특징이 대부분 그러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도겸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 먹더라. 입덧 약을 먹어서 그런가?”
“그, 그것도 그렇고, 배가 고프기도 했고요.”
왠지 너무 잘 먹는 거 아니냐고 놀리는 것 같아 변명하듯 대답하게 됐다.
“하긴, 조금 멀어서 차를 좀 오래 타긴 했지.”
도겸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불을 붙이려다, 퍼뜩 뭔가 생각이 난 듯 서원을 내려봤다.
“아…….”
그러고는 작게 탄식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묘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색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서원이 의아하게 그를 올려보자,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떼어내며 머쓱하게 말했다.
“음……. 서원아. 나 잠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갈 테니까, 잠깐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래? 금방 뒤따라갈게.”
“아, 네.”
왜 그렇게 불안에 떠나 싶더니만, 제 앞에서 흡연하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한 모양이었다.
서원도 임신한 이후로는 담배 냄새가 나는 곳을 빙 돌아 피해 갈 정도로 이전보다 예민해졌다. 그래서 별다른 말 없이 그에게서 차 키를 받고 혼자 그의 차가 주차된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손님! 잠시만요!”
손님?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밖에 없었기에, 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머리를 곱게 올린 직원이 제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서원이 다가가자, 그녀가 바삐 뛰어오느라 숨이 가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서원에게 내밀었다.
“핸드폰 놓고 가셨어요.”
핸드폰? 제 것은 주머니에 멀쩡히 있었기에 잘못 가져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니 도겸의 것이었다.
앉으면서 외투에 있던 핸드폰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답지 않게 칠칠치 못했다고 생각하며, 서원은 그녀에게 감사와 사과의 뜻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뭘요. 맛있게 드셨다면 다음에도 꼭 찾아와 주세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님에 대한 예의를 마지막까지 갖췄다. 음식도 맛있고 직원도 친절하다고 감탄하는데,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쯤 손 위에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전화인가? 도겸에게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액정을 보는데, 순간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서원이 미간을 좁혔다.
[서채연]
“……서채연?”
서채연이라면, 요즘 드라마로 한창 인기를 날리고 있는 여배우였다.
그리고 현재 도겸이 경영하는 백화점의 전속 모델로 활동 중이기도 했다. 동명이인의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흔한 이름도 아니고 그런 우연까지 겹쳤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직접 도겸에게 전화할 이유가 뭐가 있지? 그녀의 화려한 외모와 역대 필모그라피를 떠올리는데 순간 머릿속에 써늘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열성 오메가라는 것.
그 생각 하나에 어쩐지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