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08:03 서도겸 도련님] 오늘 저녁 같이 먹자. 7시에 데리러 갈게.
느지막이 일어나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어젯밤에 만나자고 하긴 했는데, 만나는 김에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것까지는 뭐 아무 생각 안 들긴 하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시간이었다. 오후 7시라니. 평소 야근을 당연하다는 듯 하던 사람인데, 회사에 급한 일이 없나? 왜 이렇게 일찍 끝나지?
워낙 큰 회사이니 일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 어제처럼 일을 빼먹고 오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됐지만, 나름대로 일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 무책임하게 내팽개치고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10:12 윤서원]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낸 후, 나름 할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심각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도겸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고, 임신한 중에 제가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임신 중에 일한다는 것이 힘들기도 했고, 외주 일은 섬에 들어가기 전에 정리했기에 받아 둔 일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이나 보며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노는데 온종일 시간을 다 보낸 것 같다. 그래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놀아서 양심이 찔리던 찰나에, 엄마가 예전에 듣던 태교라며 스피커로 틀어 줘서 나름 비생산적인 일만 한 것도 아니긴 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놀기만 해서 그런지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그렇게 약속했던 7시가 금방 다가오고, 도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집 앞이야. 준비하고 나와.
오늘 할 일이라고는 그와의 약속밖에 없었던 터라, 외출 준비는 일찌감치 해 둔 참이었다.
쌀쌀할지도 몰라 카디건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 대문 앞에 서 있던 도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서원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옅게 웃더니 서원에게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서원아.”
별말 한 것도 아니고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반가움이 뚝뚝 묻어났다.
어젯밤에도 보고 싶다고, 찾아오고 싶다고 하기에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고작 하루밖에 안 되는 시간밖에 안 흘렀는데도 엄청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가만히 그를 보는데, 어쩐지 사람만큼 커다란 검은 사냥개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도겸을 보고 강아지를 떠올린 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이러시지? 반쯤은 생소함, 다른 반쪽은 조금 놀란 기분으로 도겸을 바라보는데, 그는 서원의 굳은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일단, 타. 갈 곳이 있어.”
“네…….”
서원이 천천히 조수석에 올라타자, 도겸은 문을 닫아 주더니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운전대를 잡기 전에, 몸을 바짝 가까이 들이댔다. 서원은 순식간에 바싹 가까워진 거리에 등허리를 등받이에 바싹 붙이며 숨을 들이켰다.
순간 오늘은 운전기사나 배 비서님은 일찍 퇴근시켰는지 차 안에는 저희 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둘 중 하나라도 꼭 대동하던 도겸의 행실을 알기에, 혹여나 둘을 퇴근시킨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
괜히 엄한 생각을 하며 바싹 긴장하는데, ‘찰칵’ 하고 안전띠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특별한 접촉 없이 몸을 뒤로 물리며 물었다.
“페로몬 좀 풀어도 괜찮지?”
“아……. 그러세요.”
갑자기 뭐하는 건가 했더니…… 안전띠 매 주는 거였구나. 기사님과 배 비서님을 보낸 건 페로몬을 풀려고 그랬던 거고.
아무래도 알파가 알파 페로몬을 맡는 게 부담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굳이 도겸이 운전대를 잡은 것도 이해됐다.
이러니까 내가 애먼 기대한 것 같잖아……. 서원이 뻘쭘하게 대답했으나, 도겸은 그런 기색을 모르는 듯 차 안에 페로몬을 유유히 풀어냈다.
부끄러운 상상을 그에게 들키지 않은 것 같다고, 다행으로 여기는 새 차가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서원이 창문을 살짝 내리고 선선한 바람에 머리를 흐트러트리는데, 순간 목적지도 듣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자고 했으니 식당을 가는 것 같긴 한데……. 출출하기도 하고 뭘 먹는지 궁금해 슬쩍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저녁 먹게, 삼계탕집에 예약해 놨어. 괜찮지?”
“삼계탕이요? 괜찮긴 한데…….”
뭔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메뉴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삼계탕이라는 메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어쩐지 제가 아는 그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조금 어정쩡한 말투로 대답하게 됐는데, 다행히 도겸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다. 나도 처음 가 보는 곳인데, 보양식으로 괜찮다고 해서 예약해 봤어.”
“보양식이라니……. 설마 저 아프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어젯밤에 그와 통화하다가, 많이 잤다고 말하니 그는 당장 저를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확실하게 아픈 거 아니라고 거절하긴 했는데, 그것만으로 아쉬워서 보양식을 먹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서원이 혹시나 하고 묻자, 도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고. 워낙 몸이 약하니까 먹어 두면 좋겠다 싶어서.”
“제가 몸이 약하다고요?”
“그럼 안 연약해?”
몸이 약하다는 말에 황당해져서 물었으나, 도겸은 역으로 그럼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 제 몸이 연약하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러고 보면 저번에 섬 할머니도 제게 비실거린다고 했었다. 두 명이나 제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 눈에는 정말 제가 그렇게 보이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체구도 작고 비실비실하니까, 어디 아픈 게 아닌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저 오메가 중에서는 키가 그렇게 작은 편도 아닌데……. 비실비실한 적도 없어요.”
“비실비실한 적이 없다고? 내가 너 앓아누운 거 몇 번이나 봤는데.”
도겸이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전방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언제 앓아누웠다고……. 그의 파트너로 있을 때도 몇 번 쉰 적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비실비실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러진 않았는데…….
열성 오메가 치고 건강한 편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는 비정상적으로 건강한 우성 알파였다. 발현 전에도 튼튼해 보였는데, 발현 후로는 한 번도 감기조차 걸려본 적 없을 정도로 튼튼한 몸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 보니 반박해도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말을 말자……. 작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자, 전방을 주시하던 도겸이 힐끗힐끗 서원을 쳐다봤다.
조금 눈치 보듯 서원을 살피던 그는 자연스레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무튼, 다음 산부인과 예약 날에 같이 가자. 그때 3주 뒤라고 해서, 휴가도 미리 잡아놨어.”
“쉬시면서까지 오신다고요?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요.”
“막상 출근하면 일이 많아서 정시퇴근하기 힘들어. 그리고 내 시간에 맞추기보다는 네 시간에 맞춰서 가는 게 맞는 것 같고.”
“아니……. 저 백수라서 딱히 시간을 맞출 필요가…….”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상황이 다르니까. 내가 맞추는 게 맞는 거야.”
“…….”
아니, 그렇다고 해도 과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휴가까지 잡았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제가 그에게 맞춰 줄 필요도 없었고, 고용주의 관계도, 도련님도 아니었다. 아직은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동등한 관계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어쩐지 동등한…… 이 아니라 갑과 을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그를 생각하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무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이 수긍하자 도겸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운전에 집중했다.
조금 열어 둔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차 안을 가득 메운 그의 페로몬 덕분일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 * *
“도착했어.”
도겸의 말에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시원한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차를 타고 조금 비탈길을 오른다 생각했는데, 내리니 완전 산이었다. 갑자기 웬 산이래. 이런 곳에 식당이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차에서 내리니 토속적이면서도 은근히 고풍스러운 식당이 나타났다.
도겸이 등산을 자주 다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배 비서님이 알아 오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서원은 빽빽한 나무를 잠시 바라보다, 먼저 앞장서는 도겸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던 곱게 머리를 올려 묶은 직원이 도겸에게 물었다.
“예약하셨어요?”
“서도겸이요.”
“아, 네. 안쪽으로 따라오세요.”
직원은 이름을 듣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봤을 때도 식당이 생각보다 커 보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프라이빗 룸이 있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먹어도 되는데, 굳이 룸까지 잡다니. 잠시 생각하는데,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마자 그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와…….”
서원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붉은 단풍잎이 탁 보였기 때문이었다.
룸은 한쪽 창이 완전히 탁 트여 있었는데, 창 너머로 산의 정경이 보였다. 그냥 산이 보여도 시원하고 좋아 보일 것 같은데, 가을이 되면서 나뭇잎들이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앉는데, 직원이 도겸에게 확인차 물었다.
“예약할 때 말씀해 주셨던 삼계탕.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약재 빼고 능이버섯만 넣은 거 맞으시죠?”
“네.”
하나는 약재 빼고 능이버섯? 서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한데, 도겸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을 마친 직원이 금방 방을 빠져나갔다. 서원이 여전히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자, 도겸이 ‘아.’하며 뒤늦게 물었다.
“약재가 애한테 안 좋을 수도 있다고 해서 네 건 능이버섯만 넣고 끓여달라고 부탁했어. 괜찮지?”
“…….”
아니……. 그에게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면이 있었나? 일방 각인 때문에 저를 원하게 된 것 치고는 진심으로 찰떡이까지 신경 써 주는 모습이었다.
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생각하며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자 너무나도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