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전화 걸어도 된다고 허락해 놓고서는, 전화 온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긴장됐다. 서원은 머뭇거리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서원아.
오늘도 숱하게 많이 들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전화 너머로 들어서 그런가, 그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목소리였건만, 어제오늘 낮까지 정신이 없어서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투가 유달리 부드러워서 그런가…….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에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고 가만히 있는데, 도겸이 물었다.
- 오늘 뭐 하고 보냈어?
사사로운 질문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보고 싶어서 집에 오려고 했다는 게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파트너일 때도 그와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긴 했었지만, 용건을 나누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흘러갔을 때만이었다. 이렇게 그가 먼저 전화를 걸고, 제 일과를 묻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어색했다. 서원은 손바닥 아래의 목덜미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워낙 오늘 한 일이 없다 보니, 그에게 일과를 설명하는 것이 민망했다.
“음……. 딱히 한 건 없고. 엄마랑 얘기하다가 먹고 자고 그랬어요.”
- 차에서 그렇게 자고 또 잤다고? 어디 몸 안 좋은 거 아니야?
“산부인과 들렀다 왔잖아요. 별문제 없다고도 했고. 아픈 곳도 없어요.”
- 그건 산부인과고. 다른 병원을 가 봤어야 했나…….
도겸이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산부인과에서 다양한 검사를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검사하는 분야가 다르기에 다른 병원을 갈 걸 그랬다고 후회가 담긴 목소리였다.
저를 걱정해 주는 거야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원은 그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며 말을 덧붙였다.
“아파서 잔 게 아니라요. 워낙 멀미도 워낙 심하게 했고……. 오자마자 병원도 갔고, 입덧 약까지 먹으니까 졸려서 그런 거예요.”
-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도겸은 그런 거냐며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여전히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느낌을 뚝뚝 흘려보냈다.
제가 그렇게 아파 보이나? 아까 엄마와 대화를 나눈 걸 떠올리면, 저번에 서울에 왔을 때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 눈치던데…….
이렇게 뒀다간 정말 끝까지 걱정할 눈치였다. 서원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을 택했다.
“그, 그런데 도련님은 오늘 뭐하셨어요?”
- 나야, 뭐……. 회의하고 밀린 일 하고 그랬지.
“아까 안 늦으셨어요? 아까 배 비서님 반응 보면 늦으셨을 것 같기도 하던데요.”
- 그다지. 그것보다 저번부터 배 비서 눈치는 왜 봐? 신경 쓸 거 없어. 쳐다보지도 말고.
“…….”
병원에서, 그리고 집 앞에서 배 비서님의 눈치가 조금 보였을 뿐인데……. 누가 봐서는 한눈판 애인을 타박하는 줄 알겠다.
그런 의미로 배 비서님을 본 게 아니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또 말하자니 그런 사이도 아닌데 해명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데, 도겸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 그런데 이제 호칭 바꿔도 괜찮지 않을까?
“……호칭이요?”
- 예전부터 계속 도련님이라고 부르잖아, 너.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진 않은데…….”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작게 대답했다.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줄곧 도련님이라고 불러왔기에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듯, 도겸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처럼 서원에게 말했다.
- 지금은 네가 내 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니까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딱히 바꿀 생각을 안 해 봤었어요. 바꿀 호칭도 마땅치 않고요.”
- 바꿀 호칭이 왜 없어.
“좋은 생각 있으세요?”
- 형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네?”
형?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서원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그를 도련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부른다고? 특별할 것 없는 호칭이었으나, 상대가 도겸인 경우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음……. 그건 좀…….”
- 왜, 여섯 살 차이나 나서 형이라고 부르기 싫어?
“아,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도겸의 말에 서원이 당황하여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부정했다.
저번에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전 직장 상사라고 한 말을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정을 떨어트리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지만, 사실 그가 나이가 많은 편인 것도 아니고, 많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렇게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라는 게 좀 어색해서요.”
- 부르다 보면 차차 괜찮아지겠지.
나름 완만하게 잘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바꾸는 게 어려우면 차근차근, 천천히 바꿔가면 된다며 자연스레 이끌어 가고 있었다.
- 한 번 불러 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잖아.
“…….”
그는 마치 호칭 바꾸는 것을 도와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시키기까지 했다. 어쩐지 재촉처럼 와닿았다.
서원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다음에 하겠다고 해 봐야 도겸이 한 번 문 것을 놓칠 리가 없어 보였고, 단칼에 싫다고 거절하기에는 이상한 걸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를 도련님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고 크게 받아들여서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을 대할 땐 형이란 호칭을 잘만 썼었다. 대학교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선배들도 몇몇은 형이라고 부른 적도 있고.
아주 어렸을 때는 도겸을 친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 않나. 물론…… 지금 그가 친형이 된다면 아주 큰 일이 일어나겠지만.
그래, 그의 말대로 한 번 불러보는 게 어려운 거지 다음은 어려울 것도 없을 거다. 한 번 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잖아.
거기까지 합리화를 한 서원은 조심스레 새로운 호칭을 입에 담았다.
“형……. 도겸 형……?”
- …….
형. 다른 사람한테는 횟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자연스럽게 불러온 호칭인데 왠지 입에서 굴러 나오는 발음이 동글동글하고 간질간질했다.
원래 이 호칭이 이렇게 부끄러운 거였나. 혼자 열이 오른 걸 열심히 식히는데, 문득 도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자기가 시켜놓고 막상 형이라고 부르니까 예의 없게 느껴졌나? 하늘 아래에 저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존심 내려놓고 형, 동생 하자고 해 놓고서는, 막상 불리니 불쾌한 걸지도 모르겠다.
저도 너무 낯간지러워서 두 번은 부르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도련님으로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을 돌리려는데, 뒤늦게 도겸이 반응을 보였다.
- 진작 바꿀 걸 그랬어.
“……싫은 게 아니라요?”
- 싫을 이유가 있나? 내가 부르라고 한 건데.
“그렇긴 한데, 막상 들으니 별로일 수도 있잖아요.”
- 아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은데.
훨씬 좋다고……?
예전에 도겸이 제게 뭔가를 좋다고 한 적이 있나. 손에 꼽을 정도로 ‘좋다’고 말한 횟수가 적다 보니 생소했다. 낯설어서 괜히 발끝을 꼼지락거리는데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 듣기 좋다, 서원아. 한 번 더 불러 볼래?
“……됐어요. 한 번 불렀으면 됐잖아요.”
- 왜, 막상 불러보니까 괜찮았잖아.
“형 소리 한 번 더 듣는다고 좋을 것도 없잖아요.”
- 내 기분이 좋잖아. 한 번만 더.
“싫어요…….”
서원이 대놓고 거절했지만, 도겸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도대체 형이라는 호칭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불러 주는 걸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너무 좋아하는 게 목소리로 다 느껴지니까 낯간지러워서 더 부르기 힘들어졌다.
몇 번 옥신각신하다 보니 시간이 술술 흘러갔고, 진이 축 빠졌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늦었는지, 그렇게 자 놓고선 또 졸음이 왔다.
전화를 끊기는 뭣해 핸드폰을 조금 떨어트리고 늘어지게 하품하는데, 그 소리가 그에게 들렸던 건지 도겸이 조심스레 물었다.
- 피곤해?
“아……. 조금요.”
하품하다가 들킨 게 부끄러웠다. 면전에서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한 것도 아니건만 그 모습을 보인 느낌이었다.
조금 머쓱하게 대답하는데 도겸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 졸리면 얼른 자. 그리고 내일 병원 가 보자.
“……아파서 졸린 거 아니라니까요.”
- 혹시 페로몬 문제일지도 몰라. 알파 페로몬을 잘 못 받았으면 네 몸에도, 아이한테도 그다지 좋지 않다더라. 내일 같이 페로몬 풀고 있어 보자.
“…….”
페로몬이라는 말에 서원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만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있는데, 아이한테도 영향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평소 걱정했던 부분을 날카롭게 찔려서 더 그랬다.
서원이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그게 도겸에게까지 느껴졌는지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찰떡이는 좋겠다. 서원이가 그렇게까지 좋아해 줘서.
“……저 자러 갈게요.”
무슨 찰떡이를 부러워하듯 하는 반응까지 보이는 거야…….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부러워하는 것도, 그리고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서원이 후다닥 도망치듯 대답을 피하자, 다행히 도겸은 대답을 바라고 했던 말은 아니었던 듯 인사했다.
- 잘 자.
“……도련님도요.”
형도, 잘 자라고 할까 했지만, 아직 차마 입에 붙지 않아 다시 그를 도련님이라 불렀다.
전화를 끊고 서원은 새카매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꽤 통화를 오래 했는지 핸드폰이 뜨끈뜨끈했다.
전화하면서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형이라고 그를 부르는 부끄러운 짓만 했다. 그런데도 통화를 끊으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원은 한쪽 손에 핸드폰을 든 채, 늘어지듯 침대에 누웠다. 일방 각인 때문에 그가 저를 한 시라도 더 보고파 하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아는데…….
제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기대만 커지는 게 조금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