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도겸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것이 찜찜했다. 그래서 서원은 맞장구치지 않고 자연스레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아, 아무튼…… 도련님이 임신했다는 걸 껄끄러워하는 눈치인 걸 보니까,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서원아. 그런 일 생기면 엄마랑 같이 해외 나가서 살자고 했잖아. 그래도 된다고.”
“네, 알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임신 초기에 비행기나 장시간 배를 타면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고백은 제 선택이었는데, 그날 돌아가면 엄마가 부추겼다고 생각할 것 같았고요…….”
기대감을 심어 줬으니 부추긴 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 고백한 건 제 선택이었다.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날 집으로 돌아가 엄마를 보면, 괜히 제가 엄마 탓을 할 수도, 반대로 엄마가 저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서원은 목이 말라 침을 삼킨 뒤에 마저 말을 이었다.
“부산으로 내려간 다음, 작은 섬으로 넘어갔어요. 거기서 이름 모르는 할머니가 저를 거둬들여 주셨고요.”
“섬이라고? 그런 곳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지내다니. 너무 위험하잖아.”
“위험한 건 아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좋은 할머니를 만나서 묵을 곳도, 음식도 잘 챙겨 주셨어요. 걱정하실 만한 일 같은 거 전혀 없었고요.”
“음……. 고생한 얼굴은 아니긴 하네…….”
지희는 줄곧 불신 가득한 얼굴을 하다가, 서원의 얼굴을 다시금 보고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저번에 잠시 서울에서 지냈을 때만 해도 마음고생도, 입덧도 심해서 살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섬으로 간 이후로는 입덧 약도 챙겨 먹고 할머니가 워낙 음식을 정갈하게 잘 차려주셔서 살이 조금 붙었다. 그게 이제야 엄마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그녀의 시름을 놓게 한 서원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어젯밤쯤에 도련님이 섬으로 찾아오셨어요.”
하루 전의 일을 말하려니, 자연스레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중충했던 하늘, 고생한 흔적이 엿보이던 도겸의 얼굴, 그의 고백을 아프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제 모습, 그리고 비에 쫄딱 젖어 돌아오던 도겸의 모습까지. 오래간만에 봐 반가웠으면서도 딱히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날을 떠올리던 서원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지자 지희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도련님한테 너 좀 찾아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설마 찾아와서 도련님이 아이를 지우라고 한 건 아니지?”
“아뇨! 그런 말은 안 했어요. 그런데 음……. 거절할 땐 언제고, 갑자기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하더라고요. 여태까지 몰랐던 것뿐이라고…….”
“어? 엄마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도련님은 모르는 것뿐이라고.”
지희는 서로 마음이 통하면 잘된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서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보나 마나 일방 각인 때문일 게 뻔한데.”
“…….”
서원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지희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서원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게 아닐까 잠시 기다리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를 지우게 할 생각은 없었나 봐요. 아이를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서울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다행이네.”
“오늘 산부인과도 같이 다녀왔는데, 찰떡이 초음파 사진 보고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평소 아이를 안 좋아하시던 분이니까 일방 각인 때문일지도 모르지만요.”
“흠……. 이상하네. 처음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땐 내키지 않아 했다면서?”
서원의 말을 듣던 지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도겸이 갑자기 그렇게 태도를 달리한 이유가 뭐냐는 물음이었다.
그건 서원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단순히 일방 각인 때문에 반기는 것이라면, 고백했을 때도 반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저 역시 의아하긴 했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각인통이 심해지는 만큼 저를 원하는 마음도 커졌을 거고, 그래서 아이까지 반기게 된 거 아닐까요?”
그나마 그럴싸한 이유라고는 지금 말한 것이었다. 만일 이러한 이유로 찰떡이를 반기는 거라면, 자주 보며 각인통이 잦아들면 또 찰떡이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둬서 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찰떡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일 도겸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씁쓸해졌다.
무작정 도겸을 피해 다녀야 하고, 고립된 섬에서 지내는 것보다야 당당히 그를 마주하고 부모님과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구석에는 서글픈 마음이 남아 있었다.
분명히 아이만 잘 낳고 키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왜 자꾸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그가 제게 희망을 심어 줬기 때문일까. 여전히 미련이 제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서원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자, 가만히 말을 듣던 지희는 어떤 상황에 처했었던 건지 알겠다는 듯 정리했다.
“상황은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그래도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고 그러지 마. 엄마 진짜 많이 걱정했어. 알지?”
“……죄송해요.”
“오늘 갔다는 산부인과에서는 별다른 말 없었지?”
“네. 건강하다고 해요.”
“다행이네. 오늘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겠다. 좀 들어가서 쉬어.”
지희는 서원의 어깨를 도닥이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으니 할 말은 많은 눈치였으나, 제 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기에 다음에 더 말을 나누자는 눈치였다.
서원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시간이야 많으니, 대화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었다. 다시는 도망쳐야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씻은 뒤 잠옷 차림으로 점심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웠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는지, 일어나니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그대로 잠들었기 때문에 또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뱃속에 거지라도 든 것처럼 먹으려니 또 먹히긴 했다. 입덧 약이 효과가 좋은지 먹고 자고의 반복이었다.
배불리 먹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책을 읽는데, 매트리스 위에 던져 뒀던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책을 덮고 확인해 보니 도겸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19:12 서도겸 도련님] 집이야?
……그러고 보니까, 헤어질 때 연락 꼭 받으라고 당부했었지.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연락을 주고받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말하는 것이나 태도를 봐서는 일이 끝나자마자 전화할 것 같았는데. 지금에서야 회의가 끝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서원은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도겸의 파트너와 간간한 번역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겸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몰랐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이 시간까지 바삐 일했을 생각을 하니 조금 측은했다.
서원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19:14 윤서원] 네. 쉬고 있어요.
[19:14 서도겸 도련님] 보러 가도 돼?
답장을 보낸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
설마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상상이 되질 않았다. 꼭 제 답장을 기다렸다기보다는, 다른 일이 있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걸지도.
그나저나 보러 와도 되냐고? 저야 그를 보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제부터 오늘 낮까지 계속해서 같이 있지 않았나. 게다가 집에 엄마까지 있고.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엄마에게 보이는 것이 부담됐다.
[19:16 윤서원] 아뇨... 아까 봤잖아요. 집에 엄마도 있고요.
[19:16 윤서원] 혹시 무슨 할 말 있으세요?
[19:17 서도겸 도련님] 그런 건 아니고. 보고 싶어서.
“…….”
보고 싶어서…….
제게 할 말이 있는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 짧은 시간 보지 않았다고 보고 싶어졌다고 그런다.
일방 각인 때문에 그가 저를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거라는 걸 아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심하게 마음이 요동쳤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어 댔다.
[19:18 서도겸 도련님] 그러면 전화해도 돼?
“……전화?”
서원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찾아오지 말라고 한 번 거절해서 그런가, 한 번 더 거절하는 게 매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예전이었으면 전화도 당연하다는 듯이 걸었을 텐데, 메시지로 먼저 허락을 받는 것도 달라져서……. 제가 그만큼 그를 거절해서 그가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저는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지만, 그는 제 행동이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 생각할 테니……. 제 행동이 그에게 상처로 남을까, 서원은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
[19:25 윤서원] 하세요.
이게 뭐라고, 중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답장하는데 손에 땀이 났다.
꾹, 꾹. 손가락에 힘을 줘 가며 답장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도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