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진심이라는 걸 알아채니 얼굴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저런 말에 내성이 없기도 했고, 또 차에는 저희만 있는 게 아니라 배 비서님과 기사님도 있었다.
애초에 커플도 아니건만, 도로 한복판에서 유난 떠는 닭살 커플이 된 느낌이었다. 서원은 달아오른 열기를 가라앉히며 태명의 뜻을 알려 줬다.
“그, 그게 아니라, 유산할 확률이 높다고 해서 떨어지지 말라고 지은 거거든요?”
“아……, 그래?”
도겸은 제가 생각한 이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듯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태명을 그런 식으로 짓냐고…….
서원이 여전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자, 그가 무안한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서울에서는 부모님네 집에서 지낼 거지?”
“아무래도……, 네.”
섬으로 가기 전, 엄마에게 메시지만 덜렁 남겨 놓고 떠났었다. 돌아오고 싶어질까 봐 연락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엄마를 먼저 찾아 봬야 할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하자, 도겸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는 너 서울 돌아왔다고 연락 드렸어.”
“네? 도련님이 저희 엄마한테요? 그건 제가 해도 됐는데…….”
“너희 어머니, 너 없어졌다고 실종 신고까지 하셨었어. 그래서 섬에서 너 만나자마자 연락 드렸고. 기다리고 계실 거야.”
“실종 신고까지 했다고요?”
서원이 놀라 되묻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도 아니고, 연락이 이렇게까지 끊어진 적은 없긴 하지만 미리 말해 두고 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생각을 하니 미안해서 심장 언저리가 따끔했다. 유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마는 좁은 방에서 서원을 잘 키워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서원도 그걸 알기에 마음이 더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섬에서 나올 때쯤 엄마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전파가 잘 통하지 않으니 나와서 연락해야겠다고 미뤘다. 그러다 나와서는 멀미에 기절하듯 잠들었고,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병원 진료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그가 저 대신 연락을 해 줬다고 하니 고마웠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걸. 그런데 나 찰떡이 사진 찍어 가도 돼?”
“……그러세요.”
조금 분위기가 훈훈해지나 했더니, 갑자기 찰떡이…….
서원이 허락하자, 도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찰떡이의 사진을 하나하나 담았다. 누가 보면 팔불출이 심한 아빠인 줄 알 것 같은. 극성스러운 모습이었다.
도겸은 제가 임신하는 걸 꿈에도 바라지 않았고, 아이도 싫어하는 거로 아는데……. 일방 각인이라는 게 아이까지 좋아하게 될 정도로 사람을 바꿔 놓는 걸까? 태아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고, 또 사진까지 찍어 가려고 하는 도겸의 모습이 생소했다.
도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오늘 찍은 찰떡이의 사진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찰떡이 말이야……. 널 닮았을까, 날 닮았을까?”
“음……, 글쎄요.”
“널 닮았으면 좋겠다.”
“…….”
서원은 차마 수긍하지 못하고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이왕 닮았다면 도겸을 닮는 게 좋지 않나. 외모도 그렇고 체질도, 머리가 비상한 것도 그가 다 우월한데.
섬에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우성은 우성끼리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우성으로 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열성인 제가 그의 아이를 가진 걸 꺼릴 법한데, 저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도겸은 제가 아는 모습과 판이했다.
제가 좋아했던 도련님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지만, 서원은 어쩐지 바뀐 그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들어가서 쉬어.”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도겸이 따라 차에서 내려 서원을 배웅해 줬다.
굳이 따라 내릴 필요까진 없었는데. 서원은 대문 앞에 서서 그를 돌아봤다.
“회의 있다고 하셨잖아요. 얼른 가 보세요.”
“응……. 그래야지.”
말은 그러겠다고 하면서도,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지기는 아쉽다는 분위기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서원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렸다. 도겸에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저런 반응을 보였겠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이만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데, 가만히 서 있던 도겸이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서원아, 연락할게. 꼭 받아.”
“…….”
왜 그렇게 당부하듯 말하는 건가 했더니……. 그는 서원과 계약까지 했으면서도, 여전히 서원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연락을 받겠다는 확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안 받으면 찾으러 올 거야.”
“……알았으니까 얼른 가시기나 하세요. 배 비서님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요.”
서원이 하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눈짓으로 조수석에 탑승한 배 비서님을 가리켰다.
도겸은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바쁜 일 따위 없는 사람처럼 굴었는데, 배 비서님은 아니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듯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하거나 늦은 눈치였다.
서원의 말에 도겸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태평하게 굴기에 아닌 줄 알았는데, 나름 일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 눈치였다.
이제 진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차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서원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뭐 하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려는데, 순식간에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붙었다 떨어졌다. 도겸의 입술이었다.
“뭐하는……!”
“푹 쉬어.”
서원이 놀라서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도겸은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금방 차에 올라탔다.
도망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빠르게 차가 출발했다.
“허…….”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원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 건 일 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여전히 뭔가가 이마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아, 그러고 보니까 배 비서님이랑 기사님이 또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차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질 않나, 내려서는 이마에 키스하지 않나……. 누가 봐도 연인과 다름없는 모습이라 저와 도겸의 사이를 오해할 것 같았다.
다음에 만나면 해명해야겠다. 서원은 그런 생각을 이어 가며 가만히 서 있다가, 일단 집에 들어가야지 싶어 대문 초인종을 눌렀다.
익숙한 벨소리가 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문 너머로 바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대문이 활짝 열렸다.
“서원아!”
“엄마.”
줄곧 보고 싶었던 얼굴. 서원이 환하게 웃으며 엄마를 끌어안으려고 하는데, 포옹보다 팔뚝에 손찌검을 당하는 것이 먼저였다.
찰싹, 찰싹, 찰싹! 난데없이 팔뚝으로 쏟아지는 따끔한 매질에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
“아야, 아! 가, 갑자기 왜 때려?”
“넌 엄마한테 연락도 없이 떠나는 게 어딨어? 어떻게 된 줄 알고 걱정했잖아!”
“연락했는데……. 잠깐 다녀오겠다고…….”
“그래서 잘했다고?”
“아뇨…….”
매서운 그녀의 기세에 서원이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에서 도겸에게 들은 바로는, 엄마가 저를 찾으려 실종 신고까지 시도했다고 들었다.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서원이 어깨를 옹그리고 쭈글쭈글 대답하자, 지희는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들어와.”
“네…….”
서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간 서원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내부를 둘러봤다. 얼마나 그녀가 그간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집안이 어질러져 있었다. 더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평소 집을 깔끔하게 정돈하던 그녀의 행실과 비교하면 난장판이었다.
제가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하고 떠났다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았을 텐데……. 서원이 죄책감을 느끼는데, 그녀는 서원을 끌어 거실 소파에 앉히며 물었다.
“돌아왔으니까 얘기나 들어보자. 왜 갑자기 사라진 거고, 그동안 어디서 뭐 하고 지냈어?”
“음…….”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지희는 그 틈조차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심장을 주먹으로 팍팍 내리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말하기 싫어서 그래? 엄마 속 터지게 할래?”
“아, 아뇨! 대답하려니 좀 어려워서요. 생각 좀 했어요.”
서원이 황급히 해명하자, 지희는 그제야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뒷말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원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떠난 날에 도련님한테 고백했었거든요.”
“정말? 아니……. 잠깐. 그래서, 도련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엄마는 그걸 이제야 했냐는 듯 눈을 반짝이다가도, 서원과 연락 끊긴 것이 그쯤이라 불길한 얼굴을 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려니, 저를 바라보던 도겸의 싸늘한 시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얼굴이라, 서원은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아이도 도련님의 아이라고 했는데…….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더라고요. 아니,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안 좋아하셨어요.”
“뭐……? 진짜 쓰레기였나?”
서원을 말을 들은 지희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