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36)

<74화>

배에서 내려 차에 올라타기까지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뱃멀미가 너무 심해서 기력이 다 떨어졌다. 그나마 도겸과 배 비서님은 멀미약을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체력이 뛰어난 알파라 그런 건지 좀 나아 보였는데, 서원은 거의 반 시체 상태였다.

서울에 올라가는 동안 자라고 해서, 서원은 도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거의 기절하듯 잠든 데다가 차도 별로 흔들리지 않아, 깨어났을 때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서원은 방금 막 일어나 비몽사몽 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다, 건물을 보고 놀란 반응을 보였다.

“여기는 회사가 아니잖아요?”

일정이 빠듯하다기에 배 비서님이 강조하던 회의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회사가 아니었다. 서원이 검진을 받았던 산부인과 앞이었다.

서원은 얼빠진 얼굴로 건물을 올려다보다, 도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병원은 왜……. 오늘 회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미뤘어. 들어가자.”

도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서원의 어깨를 감싸고 산부인과 안으로 이끌었다.

친구랑 잡은 약속도 아니고 회사끼리 잡은 약속일 텐데, 저렇게 막 시간을 바꿔도 되는 건가?

서원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면서도, 괜히 저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늘 중요한 회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막 미뤄도 되는 거예요?”

“더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중요한 일정이 병원이라고요?”

서원이 황당하다는 낯으로 물었으나 도겸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서원은 도겸에게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뒤따라오는 배 비서에게 물었다.

“배 비서님, 비서님이 생각하기에도 병원 일정이 더 급해요?”

“그게…….”

배 비서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가늘어진 도겸의 눈초리를 받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배 비서님께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는 그른 것 같았다.

일분일초가 급한 위급 상황이라면 병원에 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서원은 무척이나 멀쩡했다. 멀미의 후유증으로 팔다리에 기운이 축 빠지고 늘어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병원에 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간 병원에서 제대로 된 검진을 받지 못했으니 걱정되는 것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몇 시간 조금 늦게 검진받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으나, 도겸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이미 차례가 온 데다가 미팅 시간도 미뤘다고 하니 이제 와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저게 도련님네 회사지, 제가 몸 담고 있는 회사도 아니니까. 일을 망치든지 어쩌든지 제 알 바 아니다.

서원은 어쩔 수 없이 검진을 위해 간호사가 하라는 검사를 다 받았다. 조금 기다리자 진료실 문이 열렸다.

“윤서원 씨,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배 비서님은 진료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도겸을 보호자 삼아 함께 들어갔다.

서원이 진료실 의자에 앉자, 의사가 서원과 도겸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알파 분이랑 오셨네요.”

한 번밖에 오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의사는 서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병원에 오지 않은 것을 혼낼 것 같아 서원이 어색하게 웃는데, 의사의 쓴소리는 제가 아닌 도겸에게로 향했다.

“보통 알파 분이랑 함께 진료받으러 오는데, 그때 환자분 어머님이랑만 오셔서 알파 분은 뭐 하시나 생각했어요. 미혼이시기도 했고.”

말투도 표정도 다정하기만 한데, 묘하게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기가 센 사람이 화내지 않고 상대를 찍어누르듯 한 기세였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지. 초면일 텐데, 둘 사이에 싸움이 나는 건 아니겠지? 서원이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데, 도겸은 화내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자주 올 겁니다. 같이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이제 결과 볼까요.”

다행히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

휴……. 서원이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뱉는데, 의사가 기록지를 보더니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덧이 좀 줄으셨나 봐요. 저번보다 수치가 안정적으로 나왔어요. 딱히 별다른 이상도 보이지 않고요.”

“다행이네요…….”

“네. 그렇지만 안정기에 들어가도 열성이시라, 다른 오메가 분에 비해서는 마음 놓을 수준은 아니에요. 이런 건 저번에 말했듯이 알파 분이랑 오랜 시간을 함께 있을수록 좋아져요.”

“…….”

같이…….

서원이 힐끗 도겸을 바라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원의 무릎 위에 얹어진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안도시키려는 행동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 자연스레 페로몬 영향도 받을 수 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한시름 놓였다.

검사 수치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다가, 저번처럼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 초음파 검사를 처음 했을 때 느꼈던 느낌이 워낙 신기했던 터라, 그간 찰떡이가 얼마나 자랐을까 기대되고 긴장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화면을 바라보는데, 저번처럼 화면이 지지직거리더니 뭔가 보였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찰떡이의 형태는 저번과 완전히 달랐다. 이전에는 콩알만 한 게 있을 뿐이었다. 그게 어떻게 아기가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아무런 형태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와는 달랐다. 몸과 머리가 확실히 보였다. 머리가 크고 몸은 아주 작았다. 제 배 속에 저런 게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꼼지락꼼지락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까지 보였다.

놀람과 신기함을 느끼는 건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음파 검사를 보러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더 놀란 눈치였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겸과 서원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의사가 작게 웃으며 설명했다.

“다행히 잘 자라고 있네요. 머리 모양도 예쁘고. 팔이랑 다리 움직이는 거 보이시죠?”

“네…….”

“아기는 주수보다 조금 작긴 한데, 열성 오메가 분의 태아는 대부분 이 정도 크기예요.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에요. 기형 소견도 없고.”

병원을 자주 오지도, 신경을 많이 써 주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찰떡이는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도겸의 페로몬도 자주 접하지 못하고, 또 배를 타고 나가 아는 사람 없는 타지에서 사느라 아이한테 고생을 시킨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기쁨과 죄책감을 품고 있는 사이 초음파 진료가 끝이 났다. 먹먹한 기분으로 진료실을 나오자, 자연스럽게 도겸이 수납했다.

곁에서 기다리는데, 카운터에 있던 간호사가 서원에게 임신 오메가 수첩을 돌려주며 말했다.

“저번처럼 태아 사진 넣어드렸어요. 확인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서원은 웃으며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수첩을 펼쳐 봤다. 아까 초음파로 봤던 찰떡이의 모습이 수첩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봤는데도 새로운 걸 보듯 감회가 새로웠다. 계속해서 눈에 담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스케줄이 있었다. 일단 도겸을 회사에 돌려보낸 후 보려고 가방에 넣으려는데, 도겸이 서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거, 나 줘 봐.”

“네……? 네.”

갑자기 임신 오메가 수첩은 왜. 서원이 그에게 수첩을 건네자, 도겸은 그 자리에 서서 멀거니 수첩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찍었던 초음파 사진과 오늘 찍은 사진을 번갈아 보며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왜 달라고 하는 건가 했더니만, 도겸도 태아 사진을 보는 게 신기하고 놀라운 눈치였다. 이전에 임신 오메가 수첩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자신의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제대로 눈에 담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 병원에서 수첩을 받았을 때 서원도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이해됐다. 저는 그래도 두 번째로 보는 거라고 그때보다는 감회가 비교적 덜해서 보라고 놔두는데, 도겸이 작게 중얼거렸다.

“사진이 너무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처음에 태아 사진을 찍은 뒤로 페이지가 조금 비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더 보고 싶은데 사진이 별로 없는 게 퍽 아쉬운 눈치였다.

하긴……. 서원도 처음으로 임신 오메가 수첩을 간호사에게 받았을 때, 페이지를 꽉 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찰떡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못했다. 늘 도망쳐 다녔으니까…….

서원은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떠나 있느라 병원을 몇 번 못 왔으니까요.”

“앞으로 자주 오자.”

도겸은 서원이 산부인과를 자주 들르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책임감을 느끼는 듯 의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서원과 눈을 맞췄다.

그가 지금 이렇게 잘해 주는 것도, 아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지켜 주려고 하는 것도 일방 각인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정하고 마치 연애하는 것처럼 좋아서…… 서원은 그러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수첩을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차에 올라타는데, 도겸이 서원의 안전띠를 손수 매 주며 물었다.

“그런데 태명은 지었어?”

“네.”

“뭔데?”

도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그가 호기심을 보인 적이 있던가?

궁금해하니 대답해 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촌스러운 태명에 비웃을 것 같아 말하기가 꺼려졌다. 엄마가 촌스럽게 지으라고 해서 지은 건 맞는데, 그에게 말하려고 하니 좀 부끄러웠다.

서원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기어가듯 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찰떡이요.”

“찰떡이? 이름도 너 같은 거로 잘 지었네.”

의외로 도겸은 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잘 지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너 같은 거’로 잘 지었다고? 그게 무슨 의미지? 설마 비꼬는 건가 싶어 서원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 같다고요?”

“네가 찹쌀떡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해서, 아기도 너 닮으라고 그렇게 지은 거 아니야?”

“……?”

그게 무슨……. 농담하는 건가? 아니,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서원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도겸을 바라봤으나, 그는 진심인 듯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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