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진짜 그거면 된다고?
믿을 수 없어서 서원이 잠시 입을 다무는데, 도겸은 그 틈을 기다리지도 못하겠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어? 다른 걸 더 원해? 말만 해.”
“아, 아뇨! 더 필요한 건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도련님이 내건 조건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도 페널티를 받아야 하는 것 같은데…….”
“말도 없이 또 사라지려고?”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이었으나 도겸은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두 눈을 형형하게 떴다.
순간 주변을 맴돌던 알파 페로몬마저 날카로워져 써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가, 이불 속에 파묻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꼼지락거렸다.
“그러겠다는 거 아니라요……. 만일에 대비해서…….”
“…….”
“계약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조금 겁먹은 서원이 우물거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해명하자, 싸늘해졌던 도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지만 알파 페로몬은 여전히 예민하게 곤두세워진 채였다.
도겸은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풀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네가 없어지고, 다시 잡힌다면…….”
도겸은 페널티로 회사 지분을 내걸었으니, 그가 제게 주는 페널티 또한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어야 공정한 것일 터였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그가 저에게 받아갈 만한 게 없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것을 받아가려는 걸까 조금 두려웠다.
바싹 긴장한 채로 그의 말을 기다리는데, 도겸이 뜬금없는 것을 내걸었다.
“그땐 나랑 결혼해.”
“네? 결혼……이요?”
“그래.”
“그게 페널티라고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이상한 것 같아서 되물었으나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걸……. 순간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당황해, 서원은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야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결혼이 페널티가 될 수 있어요?”
“내가 너한테 받아갈 게 뭐가 있겠어. 돈을 받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 원하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
제게서 받아갈 만한 게 없단 건 맞는 말이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넘긴다고 해도 그에게는 푼돈에 불과할 테니까.
서원이 반박하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결혼은 너무하지 않냐는 얼굴을 하자,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나를 싫어하니까…… 결혼이 싫어서라도 잠적할 생각은 안 하겠지. 안 그래?”
“…….”
싫어하는 건 아닌데…….
결혼은 오히려 하고 싶기까지 했었는데…….
이번에도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도겸의 얼굴 위로 씁쓸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대답은?”
“음…….”
도겸의 물음에 서원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제가 도겸의 곁에 있는다면, 줄곧 마음에 걸렸던 그의 각인통도 차츰차츰 줄어들 것이고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였다. 페널티가 강력하기에 최종적으로 제가 가장 원하는 아이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제가 계약을 어길 경우 주어질 결혼이라는 페널티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계약을 지키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말도 없이 도망치지 않는 것.
그의 곁에 있으면 단념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섬마을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제가 손해 볼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그의 회사가 망가지는 것도, 후에 몰아칠 폭풍을 감당할 여력도 없었다.
“아……, 알겠어요. 계약해요.”
서원이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대답하자마자 도겸의 얼굴 위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상체를 일으키더니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말했다.
“그러면 내일 서울로 가자. 지금 당장 배 비서한테 바로 계약서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지, 지금 계약서를 준비시킨다고요? 이렇게 늦었는데요?”
“어차피 바로 근처에 있잖아.”
서원이 놀란 눈으로 물었으나,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게 무슨 갑질……. 배 비서님이 아무리 충실한 직원이라지만 섬까지 데려온 것도 모자라 새벽에 깨우기까지 하면 진절머리 나서 그만두실지도 모른다.
게다가 배 비서님께만 피해 가는 게 아니라, 지금 배 비서님이 묵고 있는 집 주인들까지 피해를 볼지 몰랐다.
서원은 다급한 손길로 도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를 만류했다.
“됐어요……!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해요. 급한 일도 아니잖아요.”
“급해.”
“무슨, 급할 게 하나도 없어요.”
“네 마음이 바뀌면 어떡해. 또 말도 없이 떠나 버리면?”
도겸이 서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주친 그의 두 눈동자는 너무나도 진지했고 두려움마저 담겨 있었다.
도겸은 사라지는 것에 예민했다. 안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싶었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이전에 히트사이클과 러트를 함께 보낸 후 한국에서 휴가를 겹쳐 썼을 때 도망친 거 아니냐고 찾아왔었고, 파트너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떠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기준에 저는 벌써 세 번이나 도망친 사람일 거다.
그래서 이번에도 밤사이에 도망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것도 일방 각인 때문이겠지. 제 짝이라고 생각하는 오메가와 떨어지면 극도로 심한 통증과 불안함을 안게 되니까.
이런 고립된 섬에서 도망쳐 봐야 어딜 간다고……. 황당했지만, 일단 도겸의 두려운 마음을 달래는 게 우선일 듯했다.
“저 이제 어디 안 가요. 섬인데 제가 가 봤자 어딜 간다고…….”
“새벽 일찍 바다가 잔잔해져서 나갈 수도 있잖아.”
“저는 저 하나 섬 나가겠다고 배 띄울 수 있을 정도로 돈 많지도 않아요.”
“믿어도 돼?”
“네. 그러니까 제발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그럼 안고 자도 돼?”
열심히 달래는데, 갑자기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네, 네.”하고 대답하려고 했던 서원은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정신 차렸다.
“갑자기 왜 안고 자는 거로 흘러요?”
“일어났는데 옆자리 비어 있으면 어떡해.”
“…….”
나름대로 열심히 달래줬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눈치다.
제가 그를 미워하고 싫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갑게 밀어냈고 도망도 많이 다녔으니……. 도겸의 반응을 유난이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조금 미안했다. 제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거였다.
서원은 어쩔까,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봐주기로 했다.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세요.”
“고마워.”
서원이 허락하자, 도겸은 그제야 불안을 없애더니 바닥에 누워 서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등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차마 몸을 돌릴 새도 없이 도겸이 끌어안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자세가 됐다.
폐부에 그의 페로몬이 가득 들어찼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밀어내고 싶다가도, 그의 페로몬이 또 너무나도 좋게 느껴져서. 그리고 그가 또 제 행동에 상처를 받을까 봐 밀어내기가 망설여졌다.
서원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손을 그의 허리에 살포시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약 조건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말로 호구도 아니고 그런 계약은 왜 할까 싶었다. 그런데 호구는 도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역시 그가 원한다면 들어주고야 마는 호구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이 자세로 잠을 청할 수 있을까. 가슴이 너무 뛰어서 잠에 못 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걱정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금방 잠들었다. 격동하는 상황과 달리 편안한 밤이었다.
* * *
날이 밝으니, 비가 그렇게 몰아쳤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늘이 쨍쨍해졌다.
서원은 아침이 될 때까지 그와 함께 섬 밖으로 나갈 마음의 준비가 안 되기도 했고 할머니와 정이 들어서 미적미적 천천히 나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겸은 날이 밝자마자 섬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나갈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오늘 도겸의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일찍 올라가 봐야 한다고 그랬다.
그 탓에 아쉽지만, 서원은 아침 일찍이 부둣가에 서서 할머니의 양손을 꼭 잡은 채 인사해야 했다.
“할머니. 그동안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할머니와 조금 더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어젯밤 보았던 도겸의 불안 증세를 떠올리면 중요한 회의까지 제치고 저를 기다릴 것 같았다. 그래서 서원은 어쩔 수 없이 부랴부랴 할머니에게 돌아가게 됐다는 인사를 나눴다.
할머니는 그런 서원의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기색이었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서원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간다고 하니까 아쉽네…….”
“연락 자주 할게요.”
“연락은 필요 없고, 서울 올라가면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잘 살고 그래.”
몇 초 전에 아쉽다고 했으면서 왜 연락은 필요 없다고……. 워낙 할머니의 성격이 낯부끄러운 말은 못 하시는 성격이시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 것 같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통화하든 메시지를 하든 마지막 만남이 아니니까. 그리고 도겸의 일정이 급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해야 할 것 같았다.
서원은 미련을 떨치고 배에 올라타려다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다시 할머니를 돌아봤다.
“아, 그리고 그간 지냈던 숙박비도 보내드릴게요. 혹시 계좌번호 있으세요?”
“돈? 참나, 그런 건 됐어.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리고 저 총각이 다 사례했어.”
할머니가 저 총각, 이라고 말하며 손끝으로 도겸을 가리켰다.
“……도련님이요?”
“도련님인지는 모르겠고. 거, 백화점 전무 이사라면서? 안 받으려고 했는데 못사는 양반도 아니길래 받았어. 그러니 뭐 신세 졌다고 생각하지 말어.”
“…….”
서원은 우물우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되면 또 도겸에게 신세를 진 게 되는데…….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데, 이미 배에 올라탄 도겸이 외치듯 말했다.
“배 시간 다 됐다. 가자.”
“……네. 할머니, 건강하게 지내세요.”
서원은 고민하다, 다시금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작은 배에는 도겸과 배 비서님, 그리고 선장님이 먼저 올라타 있었다. 저만 올라타면 부산으로 바로 출발할 것이었다.
저 때문에 기다리게 할 순 없어 빠르게 배에 올라타려고 하자, 도겸이 손을 내밀었다.
“잡아.”
“…….”
서원은 배에 올라타려다가 멈칫하고 그의 손을 바라봤다. 배가 흔들리니 넘어지지 않게 잡으라는 것뿐이었는데, 괜히 낯간지러웠다. 서원은 의식하지 않은 척 덤덤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서원이 작은 배에 올라타자 금방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배가 빨라 금방 섬과 멀어졌지만, 멀어지는 동안 할머니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배에 시선을 고정한 것이 보였다. 역시 급하게 떠나게 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서원은 미련 가득한 눈으로 할머니 쪽을 바라보다, 이제는 반대쪽의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간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상황은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갑’이었던 도겸이 ‘을’로, 제가 ‘갑’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눈치 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그와 자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전히 막막했지만, 어쩐지 예전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