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잠깐 그런 생각 했을 뿐인데 페로몬이 야해졌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도겸이 눈치챈 걸 보면 제 페로몬이 이상야릇하게 바뀐 건 맞는 모양이었다. 숨기고 싶어도 페로몬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부끄러움과 낭패감이 몰려왔으나, 탄식하면 인정하는 꼴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서원은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야해져? 나랑 섹스하는 상상이라도 했어?”
“상상이 아니라……!”
“그러면 예전 일을 떠올리기라도 했나?”
“…….”
훅 들어오는 음담패설에 서원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이려 했으나, 이어지는 도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무언이 강한 긍정을 뜻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도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금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서원에게 말했다.
“그나마 내 좆이라도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조……. 하, 무, 무슨 그런 헛소리를……!”
차마 ‘좆’이라는 남사스러운 단어를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말했다가는 입이 더러워질 것만 같았다.
방이 어두워서 보일지 모르겠지만, 서원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 그를 쏘아붙였다.
“그런 거 마음에 들어 한 적 없고, 애가 듣거든요? 상스러운 말 하지 말고 주무시기나 하세요.”
“이런 말 하면 애한테 악영향이라도 갈까 봐?”
“당연하죠.”
여전히 가벼운 태도가 실린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임신한 오메가들처럼 아이의 정서 발달에 좋다는 태교 음악을 듣는다든지, 좋은 음식을 먹는다든지, 건강 검진을 꾸준히 받는다든지…… 그런 노력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나쁜 거라도 하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예를 들면 욕하거나 듣지 않기, 담배 냄새 맡지 말기, 커피 마시지 않기와 같은 그런 거.
그러자 대답을 들은 도겸이 이제 와서 그런 걸 걱정하기에는 늦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그걸 걱정했으면 나한테 먼저 왔어야지. 태아에게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짝인 알파랑 떨어져 있는 거잖아.”
마치 지금 서원이 하는 행동이 아이를 위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듯이.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서원에게는 그 말이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제가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서원은 울컥해서 바로 반박했다.
“그래서 가려고 했잖아요. 제가 도련님께 좋아한다고, 아이 생겼다고 고백했을 때 내치셨으면서.”
“……지금부터라도 잘하자는 얘기지.”
야릇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려던 도겸은 제가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태도를 달리하고 변명했다.
그의 모습에 서원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전에 그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던 날, 그때만 해도 그와 제 배 속에 있는 찰떡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미래를 상상했었다.
상상 속의 저와 도겸의 모습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하는 진지한 토론까지 하고 서로를 걱정해 주는, 그런 다정다감한 미래까지 그렸었다.
그런데 실상의 저와 도겸이 나누는 대화는 그것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환상과의 괴리감에 왠지 더 서글퍼졌다.
비아냥거리듯 한 말에 울컥했었는데, 제가 상상했던 것까지 떠올리니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임신해서 예민해진 건지, 도겸이 저를 이런 상황까지 몰아세운 건지 모르겠다.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꾹 억누르는데 도겸이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사과했다.
“내가 말실수했어. 미안해. 울지 마.”
“……안 울어요.”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울음이 터지는 성격이라,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을 터트리면 상황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몸을 돌리려는데, 그것이 도겸에게는 화난 것처럼 보였는지 우물거리다 물었다.
“내가 너무 미워? 상종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래?”
“…….”
미운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믿을 수가 없는 거였다.
6년 동안 페로몬 파트너로 지내며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해 왔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의 곁을 다른 사람이 지키는 걸 보기 싫었다.
이제야 미련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건데, 일방 각인 때문에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는 그에게 기댔다가 아이도, 마음도 다 버려질 미래가 무서워서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진심을 말해 봐야 지금의 도겸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할 테니 소용없었다. 서원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도겸은 그것이 긍정이라 여겼는지 안타까움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제안 하나를 했다.
“차라리 날 이용해.”
“그게 무슨 의미예요……?”
이용하라니?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어 눈물이 쏙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을 깜빡거리자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넌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워내고 싶잖아. 이제는 내가 싫어져서 더는 보기 싫다고 잘라내는 거고.”
“…….”
“날 이용해서 돈이라도 뜯어내든가, 아이를 위해 페로몬만 풀게 하든가. 출산하고 내가 더는 쓸모 없어지면 그때 버려도 되니까, 이런 곳에서 지내지 말고 제발 서울로 올라와. 병원 검진도 제대로 받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만히 들어보니…… 도겸은 자신을 호구 취급하고 이용해도 좋으니 곁에 있어 달라는 뜻이었다.
집안이나 재산 등, 물질적인 것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접근해 본 적 없는 서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도덕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 죄책감 느끼지 않을 성격도 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으나, 그런 수많은 이유를 제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든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곁에 있다가 일방 각인이 풀려 버리면요? 그러면 또 제 탓하실 거잖아요.”
다시 원점.
그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다. 지금은 자신을 이용하라는 제안까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으르렁거리며 감히 절 그런 식으로 이용했냐며 화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할 수가 있나.
서원이 다시금 아까와 같은 말을 하자, 도겸은 답답하다는 듯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러나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한 어투로 설득했다.
“네 탓 안 해. 그렇게 못 미더우면 계약서를 쓰면 되잖아.”
“……저번에도 계약서 쓰고 안 지켜졌잖아요.”
도겸이 계약서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이전에도 별것 아닌 거래로 계약서까지 쓴 남자니까.
그렇지만 저번에 계약서를 써도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에 별로 미덥지 않았다. 감흥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도겸이 반박했다.
“그때는 너도 거짓말했잖아. 나 좋아한 거라면서.”
“…….”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으니까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기도 했다.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이 진지하게 말했다.
“만일 내가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든지, 뺏어가거나 해코지하려고 하면 내 회사 지분을 너한테 넘길게.”
“회, 회사 지분이요?”
서원이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을 더듬었다. 회사 지분이라면 도겸이 전무 이사로 일하고 있는 백화점을 말하는 건가?
도겸의 회사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업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어떤 업종이든 손대지 않는 게 없을 정도의 대기업. 그런데 그가 가진 지분을 제게 주겠다고?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것은 둘째 치고, 저처럼 사업에 문외한이 그 막대한 지분을 받게 된다면 일궈 온 회사를 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누구는 좋다고 냉큼 받을 수 있겠지만, 너무 그 규모가 크다 보니 무서울 수준이었다.
“그, 그렇게까진 필요 없는데…….”
“확실한 게 좋잖아. 난 그만큼 그러지 않을 자신 있어.”
“…….”
서원이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으나, 도겸은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당당하게 말했다.
두 눈에 달빛이 비쳐서 그런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지키겠다는 듯한 신뢰감이 물씬 느껴졌다. 만일 사업 파트너가 저런 눈빛으로, 저렇게 당당히 말한다면 누구라도 계약 도장을 찍을 것 같은 엄청난 기세였다.
서원은 그렇게까지 과한 담보를 받아야 하는 건가 망설여졌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받아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받을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회사를 넘긴다는 조건이라면 도겸도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 제게 가장 무서운 것이 아이를 잃거나 나중에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계약이라도 해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잠시 고민하다, 일단 조건이나 들어보자 싶어 질문했다.
“그럼 제가 해야 되는 건 뭔데요?”
“일단 나랑 같이 서울 올라가는 거. 그리고 말없이 사라지지 않는 거.”
물론 너무나도 큰 조건을 내걸기에, 단순히 이용만 하라는 계약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이건 도겸이 백 퍼센트 손해 보는 계약이었다. 이런 불공정 계약을 따내겠다고 그가 안달 내는 게 이상했다.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 속에 혹여나 함정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잠시 생각하는데, 도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부연해 설명했다.
“사귀자거나 예전처럼 몸을 겹쳐 달라는 말은 절대 아니야. 그런 식으로 부담 줄 생각은 없어. 저번이나 이번처럼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나지 말아 줘.”
“정말…… 그거면 돼요?”
“그래. 그것만 지켜 주면 얼마든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줄 수 있어. 그게 아이의 일이든, 네 일이든.”